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24) / 수인들과 함께－허전의 ‘담 밖에 갇히다’ 담 밖에 갇히다 허전 덜컹 교도관의 지문을 읽고서야 열리는 육중한 철문 네 개 격자 철창 출석부를 넘기면 빗금으로 얼룩진 수인번호와 행적이 낮달처럼 숨는다 응급으로 허둥지둥 큰 산 하나 허물며 비유를 한다 시란 나를 버리는 기술이다 ―내가 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가 나를 만드는 것이다* 나를 가두고 나서야 세상이 넓게 보인다 라고 밑줄을 긋자 수인들은 하나둘 자세를 바로잡으며 어머니 품으로 돌아들 간다 감방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시는 참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23) / 탄광에서 죽다－박헌오의 ‘은광 탐방기’ 은광 탐방기 박헌오 오따시* 폐광에서 뼛조각을 보았다 등뼈에 매달린 박쥐들의 긴 침묵 조센징** 칼 빛 메아리 동바리에 맺힌 눈물 밤새도록 부두에서 기다리다 떠나간 배 철 천지 갈던 이빨 막장에 빠져 있고 먼 파도 넘어지면서 피맺힌 손 놓고 갔다 은반지 귀에 대면 아비의 거친 숨소리 고갯마루에 꽂아놓은 푯대는 종적 없고 폐경 된 달이 떠오르는 폐광에서 증언 듣다 팔순의 해설사는 눈자위 촉촉하다 은발의 구름밭에 걸려 있는 아리랑 갱도는 악몽을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22) / 소심하지 않은 책방－나기철의 ‘독립서점 1’ 독립서점 1 나기철 폐업하는 서점 앞이다 나도 언젠간 문을 닫겠지 독립 어려워 －『작은詩앗 채송화』제21호(고요아침, 2019)에서 나기철은 제주가 낳은 시인이므로 제주도의 독립서점 ‘소심한책방’을 두고 쓴 시인지 모르겠다. 설마, 소심한책방이 문을 닫았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아마도 다른 서점을 두고 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이 서점, 문 닫지 말고, 대를 물려서 하면 얼마나 좋으랴. 미당은 자신을 키운 것이 팔할이 바람이라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21) / 시인과 범인－전선용의 ‘시인의 별’ 시인의 별 전선용 한 숟갈 밥을 들기 위해 하늘의 별을 본다 역기처럼 무거운 생 시인에게 별은 그리움이요 노래, 일용직에겐 고달픈 눈물의 반짝임 아니던가 별은 떠 있고 철학자는 죽었다 수두룩하게 떠 있는 별에서 나는 밥 냄새 겨울에도 별은 동파되지 않았고 별을 해부하던 시인은 메스를 던진다 죽고 사는 문제 누군가 직업을 물었을 때 망설인 적,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직분이라는 모호한 호명에 백수라 말해야 할지 시인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별이 별로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20) / 연어의 모천회귀－김현석의 ‘연어’ 연어 김현석 병장 너의 어머니는 알을 낳았다 구름조각마저 삼켜버린 시퍼런 하늘이 높던 날 맑은 물 잔잔한 귀퉁이에 몸을 뉘어 하늘을 눈에 담지만 바다를 삼켜버린 눈빛은 하늘보다 깊었다 쓴물 짠물 마셔가며 온몸으로 부딪쳐 집 버리고 떠나온 지난 세월 한숨 한 번 뱉어내고 쏟아진 별빛 한 움큼 쥐어 허기를 채우며 물보라 머금은 성난 폭포수 향해 서러운 몸을 던지던 나날 자식에게 쓴물 짠물 먹이가 싫어 되돌아와 너를 낳았다 네 앞에 놓인 것은 서슬 푸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19) / 개의 수난사－송찬호의 ‘거짓말’ 거짓말 송찬호 우리 집 개, 돌이가 고삐를 풀고 집을 나갔다가 사흘 만에 돌아와 죽었다 누구한테 맞았나? 밖에서 나쁜 걸 먹었나? 아빠는 이제 개똥을 치우지 않아 좋다 하고 엄마는 시끄럽게 짖는 소리 듣지 않아 좋다 하고 나는 개밥 당번을 하지 않아 좋다 다 거짓말이다 —『저녁별』(문학동네, 2011) 오늘이 복날이다. 수백 마리의 개와 수만 마리의 닭이 사람들 뱃속으로 들어갔으리라. 제 명대로 못 살고 죽은 생명체들에게 감히 애도의 뜻을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18) / 인턴사원의 비애－구지평의 ‘너덜겅을 걷다’ 너덜겅을 걷다 구지평 짧은 자소서에 낭만은 감점 포인트 하얗게 밤 새우며 너덜겅*을 걷는다만 그래도 고래 한 마리 가슴속에 키운다 사막에서 찾는 막다른 정규직행 쉽게 쓰고 버려지는 삶의 결이 거칠다 힘겹게 채용 사이트에 매달리는 사이보그 영혼이 푸석푸석 서른 살의 스펙 쌓기 진짜인 듯 가짜인 듯 인공지능 이중대 오늘도 헬조선 풍경에 젖어드는 티슈인턴** * 너덜겅：돌이 많이 깔린 비탈길. ** 티슈인턴：인턴 근무 후에 채용되지 못하고 일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17) / 죽음을 앞두고－김득수의 ‘가벼움에 대하여’ 가벼움에 대하여 김득수 일요일 아침 수족관에 탈진한 도다리처럼 엎드려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 발뒤꿈치를 본다 호떡 같다 동대문시장, 애기 업은 아줌마 호떡 리어카 철판 위에 눌리는 호떡 가장자리 같다 등에 형제들 한 놈 한 놈 다섯 놈을 광목 띠로 묶어본다 머리에 방물 보따리와 보따리 위에 돈 대신 받은 쌀을 그 위에 보리쌀 그 위에 끝전으로 받은 콩 한 됫박을 얹어본다 스스스 치맛자락 스치는 수수밭 어이요－ 어이요－ 극락강 저편 줄배 사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16) / 짝사랑의 아픔을 아시는가－김달진의 ‘체념’ 체념 김달진 봄안개 자욱히 나린 밤거리 가등(街燈)은 서러워 서러워 깊은 설움을 눈물처럼 머금었다 마음을 앓은 너의 아스라한 눈동자는 빛나는 웃음보다 아름다워라 몰려가고 오는 사람 구름처럼 흐르고 청춘도 노래도 바람처럼 흐르고 오로지 먼 하늘가로 귀 기울이는 응시 혼자 정열의 등불을 달굴 뿐 내 너 그림자 앞에 서노니 먼 사람아 우리는 진정 비수(悲愁)에 사는 운명 다채로운 행복을 삼가고 견디기보다 큰 괴로움이면 멀리 깊은 산 구름 속에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15) / 구수한 농담－허홍구의 ‘아지매는 할매 되고’ 아지매는 할매 되고 허홍구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 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다보면 돈 떨어질 테고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부린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주모가 뭐 그냥 주모가 되었겠는가 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 “안주 안 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 나 같은 사람을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14) / 거짓말을 참말처럼－이오장의 ‘김성태’ 김성태 이오장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게 아니라 아궁이 없는 굴뚝에 연기 나는 거다 남의 집 아궁이 탓하더니 제 집 아궁이 숯 감추는가 －『꽃구름 탔더니 먹구름 나룻배 탔더니 조각배』(스타북스, 2019)에서 김성태 국회의원의 딸 KT 입사가 부정채용이냐 아니냐를 두고 법정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다. 김성태 의원 자신은 부정청탁을 하지 않았다고 울면서 기자회견을 했지만 그 기사에 딸린 수많은 댓글을 보니 국민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13) / 예전에는 그렇게－정끝별의 ‘세세세‘ 세세세 정끝별 시간이 너라면 시간이 나라면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가 놓친 엽서 한 장이라면 신데렐라는 어려서 나보다 늦게 늙고 계모와 언니들보다 먼저 춤추고 서러서리 찬바람에 너보다 오래 울고 푸른 하늘 은하수에 무럭무럭 차오르는 하얀 쪽배는 대박일까 쪽박일까 계수나무 한 나무에 도끼 한 자루는 눈먼 바람 찬바람에 썩어가고 울지 마요 그믐의 구름 가지 마오 그날의 여름 너랑 나랑은 그렇게 빨리 서로에게 털린 두 손을 백기처럼 내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12) / 고마워할 줄 아는 아이－김선영의 ‘따뜻한 손’ 따뜻한 손 김선영 엘리베이터 안에 물동이 오르락내리락 아주머니의 발걸음도 오르락내리락 걸레도 오르락내리락 아주머니가 닦은 계단이 반짝반짝 윤이 난다. 아주머니의 땀방울처럼 반짝반짝 윤이 난다. 잔뜩 찌푸렸던 아파트 하늘도 오늘은 반짝반짝 윤이 난다. 월요일이면 아파트 계단이 청소 아주머니의 따뜻한 손길로 말갛게 변신한다. —『바람 빠진 자전거』(아동문예, 2013)에서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영화를 보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11) / 만해축전을 위하여－김진대의 ‘만해의 계절’ 만해의 계절 김진대 백담사 마당에 팥배나무 가지마다 만해가 전하지 못한 자유와 평화가 경내를 휩싸고 돌아 꽃으로 피기까지 지난날 과육만 먹고 버린 씨앗 한 알 만해로 퍼지게 잎까지 손 맞잡아 천둥과 번개 앞에서 열매를 맺었다 오늘 아침엔 이방인도 입맛을 다시고 우레와 침묵으로 만해에 이르려고 열매에 담긴 경전을 가슴에 새긴다 ―『월간문학』 (2019. 4)에서 만해 한용운은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일제 강점기 때 종교계 인사들의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10) / 아픈 가족사－고형렬의 ‘모자’ 모자(母子) 고형렬 어머니 그래 어머니 손에서 제 손이 생겼지요 그래 어머니 무릎에서 제 무릎이 나왔지요 그래 어머니 눈에서 제 눈이 왔고요 그래 어머니 고생에서 제 고생도 왔어요 그래 어머니 마음이 제 마음에 있어요 그래 어머니 그래 그때 아버지 목소리도 들었어요 그래 마을 사람들 소리도 들었어요 그래 들었구나 예, 잎 지는 바람도 들었어요 그래 총소리도 들었지 그래 우리는 이곳에서 와서 이곳에서 산단다 ―『이 땅의 어머니를 위하여/ 시인 61인의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09) / 우리의 마지막 모습－강경호의 ‘영혼과 고깃덩이 1’ 영혼과 고깃덩이 1 강경호 뇌출혈로 누님이 쓰러졌다 머리를 깎고 옷을 벗기자 처음 보는 누님의 몸뚱이가 피에 젖은 수술용 침대 위에 버려졌는데 참을 수 없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수치심보다도, 몸뚱이가 정육점 고깃덩이 같다는 것 정숙하고 예의바른 그 몸에서 혈관이 터져 피가 뇌를 적시는데 그것이 영혼의 세포를 죽이는 일이라니 누님이 보았던 꽃과 노래와 기도 어둠과 빛의 말씀이 순식간에 지워진 CD처럼 일생을 두고 입력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08) / 직업 중에는－이오장의 ‘대리기사’ 대리기사 －99인의 자화상ㆍ39 이오장 서로 기대어 이름 불러주는 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등으로 온기 받아들이고 손 내밀어 전해주는 진심이 통했을 때 곡식 앞에 모여든 새 쫓을 자격이 있다 혼자 치는 손뼉이 누구를 모으겠는가 외줄바퀴는 멈추면 넘어진다 일터에서 뛰쳐나와 낮 밤 구분하지 못하고 방향 잃어버려 제자리 맴돌다가 전화기에 매달려 호출을 기다리는 일상이 어느덧 밤낮 구분이 없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길을 간다는 건 뜨거운 기운 나눠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07) / 떡 본 김에－김유의 ‘김에’ 김에 김유 세상을 살다보면 얼떨결에 가뿐해질 때가 있지 일을 보러 가다가 일을 하다가 일을 보고 오다가 ‘다가’라는 잠깐에 다음에 ‘꼭!’ 하던 꼭이 생각나면 나는 ‘맞아!’ 하며 일을 내고야 말았었지 그런데 세상을 사는 맛은 ‘다가’보다 ‘김에’에 더 있는 거 같지 않아? ‘다가’ 이전에는 구름 낀 하늘 같다 ‘김에’ 뒤에는 잠깐 볕 든 느낌 같은 거 그래서 나는 세상을 살아가다 살아가는 김에 어떤 일 낼 궁리를 하는 내친 김에 묻어가고픈 그런 생각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06) / 정선에 가고 싶다－전윤호의 ‘정선에게’ 정선에게 전윤호 화암리* 벼랑인 양 버티는 너를 좋아했지 마음 한 번 받지 못한 짝사랑이었어 가문 여름의 옥수수 밭처럼 매련없이 울다가 아무도 없는 역에서 밤기차 타고 떠났지 굴이 무너지고 철교가 끊어졌어 밀려난 것들끼리 거품이나 흘리는 하류에서 늘 입석으로 살았어 빈자리가 생겨도 앉지 않았지 언제든 돌아가야 하니까 가슴속엔 구멍이 생기고 점점 커졌어 한 방울 한 방울 그리움이 떨어져 종유석이 된다면 몇 억 년을 건너야 입구를 찾을까 오래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05) / 책이 싫어요 - 한혜영의 '책 도둑' 책 도둑 한혜영 아빠는 나한테책 선물을 하는 게 취미다그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똑같다아빠는 책 살 돈이 없어서남의 집 책 몰래훔쳐다가 읽었다가 얘기아빠 같은 책 도둑 어디에 없을까?어휴! 저 두꺼운눈꺼풀 저절로 내려오게 하는 책들!누가 와서 몽땅 훔쳐갔으면 —『닭장 옆 탱자나무』(푸른사상사, 2012) 책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다. 대학생 중에도 한사코 책을 안 사는 학생이 있어서 안타깝기도 하다. 이 동시에 공감하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