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이야기 장경호 누워 있다가벌렁 엎드려방긋 웃는 내 동생아유 잘 했어우리 아기 잘 하네할머니의 들뜬 목소리에다시 드러누워영차 영차내 목소리에 쳐다보는 내 동생너무 좋아얼른 뽀뽀해 주니깔깔 웃는 얼굴정말 예뻐그런 동생번쩍 치켜 안은 할머니앞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거야동생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그저 좋아 웃기만 한다ㅡ『PEN문학』(2023년 3ㆍ4월호)에서 어떤 화가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릴 수는 없다. 아기인 동생은 이제 막 몸 뒤집기를 하게 되었다. 곧 배밀이를 하다가 기기 시작할 것이고 걸음마도 하게 될 것이

신체 포기각서 이소영 대출받은 사랑을 기한 내 변제하지 못해계약서에 사인한 대로 오늘 이 시각부터신체에 대한 모든 권리를 당신에게 양도합니다남은 기간 두 눈은 당신만을 바라보고양손은 언제나 당신 손만 잡을 것이며심장은 늘 당신만을 향해 뛸 것을 약속합니다ㅡ『시조21』(2023년 봄호)에서 신체 포기각서는 아무리 자발적으로 동의를 했다고 하더라도 법률상 무효라고 한다.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본인의 장기를 자발적으로 파는 것도 금지되어 있고 다른 사람의 장기를 강제적으로 가져와서 파는 건 더 엄하게 처벌되고 있다고

내 동생 태어난 날 이승하 엄마 배 뻥뻥 차더니엄마 배 많이 아파서 병원에 가셨다어떤 아기가 내 동생일까나를 졸졸 따라다닐까 오빠라고 부를까밤늦게 병원에서 오신 엄마와 아빠보자기에 돌돌 싸여 같이 온 내 동생새빨간 얼굴인데 두 눈이 깜박깜박업어주어야지 손 잡고 다녀야지 떼쓰면 양보하고잘못하면 고쳐주어야지내 동생이랑 오래오래사이좋게 지내야지 오빠야 응 선영아 오늘이 어린이날이다. 동시를 지상에 발표해본 적이 없는데 누이동생 생각이 나서 한 편 써보았다. 문학작품 가운데 형제 이야기, 자매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정다운 오누이 이

비 끝 정병근당신은 나보다나를 더 많이 아는 사람내가 꿈에서처럼걱정 없이 행복할 때당신은 잠시 소꿉을 접고안 보이는 곳에 가서홀로 울고 돌아오네ㅡ『중얼거리는 사람』(여우난골, 2023)에서대한민국에서 정병근의 술주정을 모르는 사람은 김정은이 보낸 간첩이다. 아아, 정말 끔찍했다. 정병근 시인의 주사 때문에 여행지에서 밤에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윤후명 작가와 김영승 시인의 술주정도 대단했었는데 이 두 분은 완전히 끊었다. 다 아내 덕분일 것이다. 소문이 들려왔다. 정병근이가 술을 끊었대. 설마?이 시를 보니 끊은 것을 알겠다

반려견 임재정구석구석 얼룩을 지리고송곳니를 내보이며 으르렁대죠머릿속을 헤집는 방법도 터득했어요반려는 끔찍한 나를 짐승에게 덜어내는 방법그토록 견고하던 적막이두루마리 휴지처럼 쉬 찢어질 수도 있다는 것아내의 선택은 언제나 완벽해요죽은 이를 대신할 반려로초인종에 반응하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구입했지 뭐예요ㅡ『아돌프, 내가 해롭습니까』(시인의 일요일, 2023)에서 반려(伴侶)의 뜻은 짝이 되는 동무다. 아이가 없는 부부가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경우가 있는데, 애완견이나 애완묘가 아니다. 완전히 반려견, 반려묘다. 아내보다도 남

돌비 서라운드 조명희휴일이 쉰다식탁에서 소파로 소파에서 리모컨으로 옮겨 다니며부풀 대로 부푼 난 팝콘과 같아남자와 마른오징어는 일단 씹고 본다영화나 보러 갈래?한 번씩 먹어줘야 하는 우리는 콜라다중독성이 강해 매번이 이번만이다영화가 꼭 너 같아 기대를 잔뜩 하고 갔다 나올 땐 본전 생각 나거든이 말은 노굿이어서 컷!다시 갑시다레디 액션!후다다탁과 질겅질겅과 꺼어억이 사방에서 입체적으로 시작은 로맨스였다 잡음이 없는전쟁같이 싸우고도 배는 고파 포개진 접시를 보고 우린 겹치곤 했는데 따따부따반쪽짜리 어깨를 맞대고 앉아 이를 쑤신다어금니

전태일 군이성부불에 몸을 맡겨지금 시커멓게 누워버린 청년은결코 죽음으로쫓겨간 것은 아니다.잿더미 위에 그는 하나로 죽어 있었지만 어두움의 입구에, 깊고 깊은 파멸의 처음 쪽에, 그는 짐승처럼 그을려 누워 있었지만 그의 입은 뭉개져서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끝끝내 타버린 눈으로 볼 수도 없었지만그때 다른 곳에서는단 한 사람의 자유의 짓밟힘도 세계를 아프게 만드는, 더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의 뭉친 울림이 하나가 되어 벌판을 자꾸 흔들고만 있었다. 굳게굳게 들려오는 큰 발자국 소리, 세계의 생각을 뭉쳐오는 소리, 사람들은 아무도 귀 기울

보시니 참 좋았다 손동연동물 없는 동물원식물 없는 식물원그리고,고아 없는 고아원……ㅡ『날마다 생일』(푸른책들, 2023)에서 물론, 지금은 ‘고아원’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보육원이라고 한다. ‘고아’라는 말에 비칭의 느낌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육원이 텅텅 비면 좋겠지만 요즈음에도 부모님께 버림받아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어린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거나 부모의 이혼과 재혼 과정에서 아이의 양육을 부모 중 한쪽이 맡지 않으면 고아 아닌 고아가 된다. 최근에 보육원에서 성장기를 보낸 이의 인터뷰를 보았다. 이혼

소낙비 심인자기능 상실한 다리를침상에 올리려던 아들이마를 쿵 찧었다옆으로 무너지던 눈빛절망을 끌어내리며온몸으로 받는 어미스물여섯 어쩌다저리됐을꼬 쯧쯧쯧이 침상 저 침상에서쏟아지는 소낙비외줄에매달린 재활 모자(母子)뒷말에 흠뻑 젖는다ㅡ『시조시학』(2023년 봄호)에서 어떤 병인지는 모르겠다. 스물여섯 살 난 아들이 다리 기능을 잃고 말아서 재활 훈련을 시작하였다. 침대에 올라가고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멀쩡히 걸어다니던 아들이 다리를 못 쓰게 되었으니 엄마는 얼마나 속이 탈 것인가. 몸이 말을 듣지

꿈꾸는 작은 돌멩이이승하아버지,서울의 하늘에 별이 깔리고 있습니다아버지와 함께 고향의 언덕에서 우러르던 그 겨울 별자리련만오늘은 저 별들이 멀리 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길바닥에 드러누워 바라보는 별, 눈뜨라고 돋아나는데매운 바람 때문인지, 아버지저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처진 자의 두려움길 잃은 자의 목마름위로받지 못한 자의 절망감으로 흘리는 눈물눈물로 정화되는 당신의 어린 아들입니다이 세상 모든 지고한 권위 강대한 세력저 별과 비교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밤하늘의 장엄미사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솟아나는 누군가의 눈물 방울 방울이이 지상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주종환한평생 채식을 위한 식당을 찾아 헤매었다그것은 이 문명의 미로와 같았다이 지구, 인류, 그리고 개인을 위해서육식의 종말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뿐육식에는 몸과 마음, 영혼에 해로운다량의 독성물질이 함유되어 있다고 한다이 어두운 음식체의 거리가향기로운 과수원길만 같았으면.ㅡ『마음 한 켤레 벗어두고 깜빡 조는 샛별처럼(꿈공장플러스, 2023)에서 채식주의자(vegetarian)를 요즘에는 흔히 ‘비건’이라 일컫는다. 서울시내에 채식 식당이 간간이 보이는 것을 보면 비건이 조금씩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스피스병동역서하침대칸만 있는 열차,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 시동을 건다단속이 느슨한 틈을 타 거뭇거뭇 숨어든 검버섯은 무임승차다 점점 헐거워지는 틀니가 받쳐 주는 저 승객을 어느 역에다 부리면 벌어진 밤송이처럼 환하게 웃을까 덜컥 저승사자가 검표원처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만성 불안증 환자들 역무원의 눈빛도 구겨 버린 승차권처럼 풀이 죽었다이 역驛에서는 역逆으로 살자 해도 쉰 소리로 들끓는 투병과 간병 사이, 더 머물기도, 허둥지둥 내려 버리기도 마땅찮은 작은 간이역, 경적인 듯 울어대는 신음소리만 살이 올라 통통한 도착과 출

지용(芝溶)의 안경은 무채색이다박지우소사에서는 색을 빼야 해 햇살에 귀걸이가 찰랑 자전거가 덜컹 지나가는 쪽으로 초록이 무너지네 소사동 85-14번지* 에서 맨드라미가 하얗게 키를 키우고 은행잎조차 색을 털어내 성당 종소리가 무색으로 쌓이네 1942, 아니면 1944, 한 편의 시도 없이, 하얀 마스크로 입을 지우네 옥천읍 하계리, 그리고 이원면 지탄리 소사는 옥천에서 멀다네 지용의 길로 비가 내리네‘웃절 중이 여섯 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비탈에서 내 안의 색을 털어내네 때아닌 장미가 달콤쌉싸름하네 개들이 황소

악수 신동집 많은 사람이여러 모양으로 죽어갔고죽지 않은 사람은여러 모양으로 살아왔고그리하여 서로들끼리말 못할 악수를 한다 죽은 사람과 죽지 않고 남은 사람과악수란 오늘무엇을 말하는 것이냐,나의 한 편 팔은땅속 깊이 꽂히어 있고다른 한 편 팔은짙은 밀도의 공간을 저항한다.죽은 사람이 살았을때를 그리워하며산 사람이 죽어갈때를 그리어 보며……ㅡ『장기판』(문학예술사, 1980) 신동집(1924〜2003) 시인의 이 시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예견하고 쓴 시인 것 같다. 하지만 70년대에 쓴 것이라 악수할 수 없는 상황이 오리라는 것

사진 송찬호작년 이맘때 할머니랑 벚꽃 구경 갔다가활짝 핀 벚꽃 아래벤치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사진 찍을 때할머니가 내 손을 잡으며말씀하셨다이 세상에 이제우리 홍두와 이 할미만 남았구나작년 이맘때 할머니와 찍은사진을핸드폰에서 꺼내 본다이제 나만 남았다ㅡ『신발 원정대』(창비, 2022)에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서 할말이 사실 없다. 홍두의 엄마와 아빠는 어디에 계실까? 돌아가신 걸까? 이혼을 하고선 홍두를 할머니께 맡기고 어디로 가버렸나? 각자 재혼하고 홍두를 버렸나? 여러 가지 경우가 생각나는데 여기에 대해

망각이순공인간에 홍익(弘益)하고세계를 이화(理化)하자숭고한 건국이념그 혼불 이어받아지구촌 약육강식을버티어낸 겨레여!한반도 동강내고형제가 갈라설 때‘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고절규한 우국충정을 어찌 벌써 잊었나?일천만 피눈물에 철조망은 녹이 슬고삶살이 한파에도 화려한 불꽃놀이배부른 네탓내탓에 해 저무는 한반도,망국의 백성 되어 사십 년 받은 설움허리를 절단하여 칠십 년 흘린 피는한민족 팔천만 동포가 망각해선 안 될 일!ㅡ『월간문학』(2023년 3월호)에서 시조 한 편에 우리나라 100년 역사가 담겨 있다. 지금 우리 민족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다이승하몸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모아눈을 뜬 아버지가족 한 번 쳐다보고천장 한 번 쳐다보고눈을 감았다가 금방다시 뜨신다이 세상 이 순간 이렇게뜨기는 싫은 듯이대로 그냥 눈을 감으면영원한 암흑,죽음의 세계일 테니한 번만 더 눈을 뜨자한 번만, 한 번만 더한 번만 더 사물을 보자고자, 한 번만 더 눈을 뜨자고아버지는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거다삶의 마지막 암벽에지금 매달려 있는 거다오르고 미끄러지기를갔다가 되돌아오기를예닐곱 번마지막 기운마저 빠지자눈을 크게 떴다가감은 아버지두 줄기 눈물을 주르르 흘린 뒤숨을 멈

반려 허은실이제 우리는 서로의 눈빛에 책임이 있어요거친 여울 머무는 기슭에서서로의 눈에 스민 계절을 헤아리며표정이 닮아갈 날들그리하여 어느 날세상에 지고 돌아온 당신이웅크려 누울 때적막한 등 뒤에서내 몸을 가만히 포개고우리는 인간의 말을 버리기로 해요우리 숨이 나란하도록밤이 깊도록당신이 나를 업고 걷던 그 밤처럼당신의 등에내 글썽임과 부끄럼까지를잠시 올려두고긴 밤을 낙타처럼 걸어갈 거예요서로의 잠 속으로 스며들어가젖은 얼굴 어루만지면새 빛은 다시 우리 가난한 창으로ㅡ『회복기』(문학동네, 2022)에서 반려(伴侶)의 뜻은 ‘짝

돈의 힘 김영은“쉽게 못 죽는다, 곱게 안 뒤진다”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달콤한 유혹을 받습니다저를 기억하시고 (누구?)라고 이름을 남겨주시면부자의 반열에 오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공황장애 걸려 몸둘 바 모르는 손가락이대박 난다는 황금 문자에 눈이 돌아가서하마터면 그 문자에 번호를 남길 뻔했습니다‘돈’ 앞에서는 부모 형제도 없다는 돈의 습성“곱게 안 뒤진다” 참 섬뜩하기도 하지만그렇다고 비겁하게 마다하지는 않겠습니다다만, 아귀처럼 벌어들이는 능력은 부족해도지갑 정도는 항상 두둑했으면 좋겠습니다. ㅡ『다시올문학』(2023년 봄호)에

트롯의 밤 신달자홀로 와인 반병을 마셨으니나는 지금부터 미쳐도(島)에 닿는다양(量)의 선을 넘으면 언제나 저미는 핏줄을 안고 운다아버지는 큰 부자였지만 주색잡기로 쫄딱 망해 고향 쫓겨나서울 변두리 살며 누울 때도 고향 바라보며 눕는다고 했던 아버지어느 날 술 한 잔 마시고 “고향 떠나 10년에 청춘은 늙어어” 울던 아버지그 눈물 아버지 피같이 내 가슴 위로 흘렀지아버지 바람나 집에 뜸할 때 술로 배를 채우며 울어 울어 울었던 어머니불현듯 마당 가운데 서서 아리랑을 살 찢어지게 부르다 쓰러지는 미친 여자그 모습 아직 나를 발광하게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