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노래장석나는 술집에서 자랐어술꾼과 담배 연기 사이에서 잔뼈가 굵었지 끓는 쇳물을 들이켜고 강철 조각을 씹었지늙은이는 알아듣지 못할 우리의 노래를 불렀지그것은 헛된 일이야나는 술집에서 늙었어오래된 슬픈 노래와 추억 사이에서먹물 같고 잿물 같은 술을 홀짝이고말린 시간을 씹었지그것은 헛된 일이야나는 술집에서 죽지 못했어술집이 나보다 먼저 죽었고알아듣지 못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술집은 나를 받지 않았지세월이 내 잔에 남긴 폐수를 들여다보고광속으로 시간이 빠져나가 버린 전선 껍질을 깨물어 본다그것은 헛되거나 헛되지 않는 일이지술의 일은모

참사 이후이승하저는 환경미화원, 이태원이 제 담당 구역입니다빗자루를 들고 있습니다이 거리에 와서는 절대로 침 뱉지 마십시오이 거리 지날 때는 절대로 큰소리로 웃지 마십시오길에서 사람에게 짓눌렸고길에 서 있다 엎어진 채로 죽었습니다.아이들의 신발을 제가 치웠습니다 쓰레기라고어른들의 스카프를 제가 버렸습니다 쓰레기라고미국의 군인들이 오래 주둔했던 땅서양 귀신을 위한 축제가 벌어진 날참사 다음 날 아침 이태원 거리에서 저는이건 꿈이라고, 아니 악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저는 환경미화원, 오늘도 이태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빗자루를 들고 있습니다ㅡ

살아있는 그림책박해림 우리 시장 동네에 책 떨이판매 아저씨가 왔어요봄 햇살을 바닥에알록달록 펼쳐놓아요―자, 그림책이 왔슴다, 그림책이 왔어어요오!쪼르르, 쌀가게 미주가 달려오고후다닥, 반찬가게 효준이가 뛰어오고떡볶이 가게 유리문에연둣빛 햇살이 출렁출렁 넘치고그림책을 보는 아이들이 움찔움찔 들어앉는데요손뼉 치는 책 떨이 아저씨가 쿵짝쿵짝나물 다듬는 좌판 할머니는 흘깃흘깃유모차 아기도 반짝반짝 색칠되었어요고양이도 맨드라미 채송화도나풀나풀 나비도 슬쩍 끼어들면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책이 완성되는데요지나가는 사람들이 흐뭇이 책장을넘길 때마다

시월최은지 건널목 신호등을 같이 따라 못 건너고낯선 사람 틈새에서 허리 꼿꼿 세워본다추운 밤 견디기 위해 햇살들을 모은다콕 집은 경력들을 또박 박은 이력서윤나는 새 구두로 힘 잔뜩 땅을 찬다상달아, 기울기 전에 이름표를 달아다오ㅡ『시간을 정산하다』(책만드는집, 2023) 이맘때가 되면 4학년 학생들에게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지 물어보곤 한다. 절반 정도는 이력서를 써보고 있다고 하고 절반 정도는 일단 등단 준비를 하다가 생각해 보겠단다. 그래도 한두 해 지나면 다들 취직해 있으니 대견하다. 학생이 취업 소식을 알려오면 등단

라면을 끓이며김남호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단톡방에 부고 문자가 떴다아직 2분을 더 끓여야 하는데그새 누군가는 생을 버렸다삼가 조의를 표해야 하는데 고인의 얼굴도 상주의 얼굴도기억이 나지 않는데그래도 조의를 표해야 하는데 라면은 좀 더 끓여야 하는데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전하긴 해야 할지전할 마음이 있기나 한지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카톡카톡카톡……삼가 카톡은 쉼없이 끓고 있는데계란은 언제쯤 넣어야 할지ㅡ『말하자면 길지만』(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2023) 스마트폰 단톡방에 회원 중 누군가가 부고를

십 대전영미속을 맛보고 싶어 빛을 쪼갠다잔가지를 드럼통에 던져 넣고 바짝 다가앉으면잠깐 환해지고옆에는 막자란 아이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그을음이 올라오고분질러진 가지가 재로 변하는 동안밤을 함께 보내도 제 몫은 줄지 않고아무도 돌보지 않은 아이들이 여전히 졸고 있다검댕을 문지르면 옆에도 더 번지고때 타는 데는 연습이 필요 없다얼굴과 머리카락에 어둠을 펴 바르며얼굴에 대해 생각한다검정 비닐에 담아 냉동실에 처박아둔잊힌 아이들풀어보지도 않으면서 버리지도 않는다아무도 모르게 혼자 상해간다ㅡ『아직 시작되지 않은 오래된 이야기』(시인동네,

자살 명소박수서사는 일이 절벽에 서 있을 때절벽으로 기어올라 스스로 삶을 내려놓는 사람은얼마나 세상의 절벽이 높았을까아름다운 풍경에 눈이 멀어 잠시 죽을 생각조차잊어버릴 것 같은 비경에서도깃털처럼 떨어져 내리는 사람은 아직 있겠지제 목숨 귀한 줄 다 알 터인데오죽하면 스스로 삶을 내려놓을까측은하기도 하지만그럴 힘으로 한번 죽을 듯이 살아보지 그랬나 싶기도 하지만어쩌면 세상 자체가 무덤인지도 모르는 일결국 세상을 끝내려 세상을 사는 것인데한 해 팔백만 마리의 새가 유리 벽 앞에서 죽는다는데하루에 몇 마리씩 머리를 박고 떨어져 죽는 공

진안 간다 김두례지나간다.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장의차가천식 앓던 외할머니 기침 소리 지나간다도수 높은 돋보기 끼고 노인회관 드나들던 큰아버지 지나간다‘소리 지르지 마라’ 입 모양 찬찬히 보던 큰어머니 주름진 얼굴 지나간다육이오 때 경찰이었던 외삼촌 낙동강 지나간다씨앗 품은 봉선화 같은 숙모 지나간다객사 직전 고모를 찾았다는 외사촌 오빠 다급한 목소리 지나간다이발사였던 둘째 큰아버지 가위 소리 지나간다급체로 돌아가신 둘째 큰어머니 창백한 얼굴 지나간다손님처럼 하룻밤 주무시고 순천으로 떠난 아득한 할머니 흰 무명치마 지나간다마루에 앉아

한강수 타령 김관식 서울이 하도 무섭다기에과천서부터 기어와 보니한강수라 인도교가열두 난간도 넘더구나.오대산에서 내리는 물이서해 바다로 흘러를 가데.인심은 매양 물이로소니순리로 순리로 살아야지.황소가 힘세어 왕 노릇 하랴법을 어기곤 못 사니라.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고금이 없이 같은 것을분수야 한때 솟구친댔자폭포수 기세를 꺾을소냐.아침에 조수潮水가 써 들어왔다저녁에 석수汐水가 빠져나가듯나아갈 줄을 알아야지만물러설 줄도 알아냐느니.메기 아가리 아무리 커도세상을 모두 삼키더냐.발버둥 치고 올라서 보라하늘은 그냥 높으니라. ㅡ『다시 광야에

맛있는 가을정원혁파아란 하늘을두 눈으로 먹었다.분홍빛 코스모스 향기를코로 먹었다.알록달록 단풍이나풀나풀 떨어지는 소리를귀로 먹었다.맛있는 가을로 배가 부르니행복한 미소가 피어난다.ㅡ『계간 시마』(2023년 가을호) 대구에 있는 장동초등학교 4학년 정원혁 어린이가 쓴 동시다. 원혁이뿐만 아니라 먹는 거 싫어하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파란 하늘을 두 눈으로 먹었다고 표현한 것 자체가 놀라운 상상력이다. 한 술 더 떠 분홍빛 코스모스 향기를 코로 먹었다고 한다. 어른들의 고착된 인식, 고지식한 시각과는 차원이 다르다. “알록달록

빈대떡 에피그램윤금초#1어라, 청진동 해장국집 빈대떡이 사라졌네.모둠전에 술국 끓일 야간 일손 빌 수 없어주인장 손수 홀 서빙… 빈대떡을 못 부친다.#2‘너무 많은 영세 통닭집, 한국 경제 위협한다.’*골목 간판 불 꺼진 그날 후유 소리 담을 넘고얕은꾀 스텝이 꼬여 어라, 숨찬 목줄 조여 온다.#3소득 주도 알량한 바람 턱밑까지 휘몰아친다.보이지 않는 손아귀에 덜미 잡힌 골골샅샅허풍 센 일자리 창출에 어라, 억장 다 무너진다.* 2013년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이 한국 경제를 예고한 기사.ㅡ『독의 계보』(시인동네, 2023)

바나나 할머니 박만진한서요양원 한승혜 원장님이봉숭아꽃 앞에서 꽃잎을 따며요양원 할머니들 손톱에봉숭아물을 들여 주면더할 나위 없이 좋아한다고 웃으시네요양사 교육생들이 현장 실습 가면 손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유,아무도 안 오니 어쩐대유, 라고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씨 고운 할머니,바나나 할머니가 계시기도 하지만지긋하신 요양원 어르신들이가장 좋아하는 선물은그 많고 많은 먹거리 중에서도청과물상회나 마트에서손쉽게 살 수 있는 바나나라네ㅡ『먹물』(시로여는세상, 2023) 소녀, 아가씨, 중년 부인, 요양원 할머니……. 소년, 젊

모월모일ㅡ환경호르몬김경수세계 각국의 연안이 소란스럽다생식기가 축소되고암수의 생식기가 바뀌어 생기거나난소와 정소가 함께 있는잉어가 발견됐다는 얘기는벌써 오래전 이야기다다이옥신 이외에도 비스페놀A 등대략 300여 종의 화학물질이환경호르몬 주범으로 의심받고 있다 하니우리는 1992년 덴마크 연구결과*를되짚어 봐야 한다*인간의 정자가 반으로 줄었다는 소름 끼쳤던 연구결과. ㅡ『황금달팽이의 모월모일』(도서출판 현자, 2023) 문명의 발전 속도는 가속도라고 해야 할까 가속화라고 해야 할까, 정말 눈부시고 놀랍다. 스마트폰 한 가지만

이사하기김수지참 이상하지밖에서 보면 건물들은 그저 구멍 숭숭 뚫린벌집 같아 보이고안에서 밖을 보면조망권이 생긴 뷰가 좋다고입을 모아 환호하지길거리, 허공, 하늘까지도무차별 재단해내는현대문명의 불편한 진실역세권, 학세권, 숲세권, 조망권, 무슨무슨……수평을 무시하고 척추를 곧추세워 1자 목이 된 건물들은물구나무서서 거꾸로 세상을 본다3층 내 집, 19층 앞 건물이 떡 버티고 서서진종일 들어오는 빛을 내치는 바람에이사를 결심한다13층콘크리트 우거진 숲으로 올라온 지도세 해,땅값이 비싸서 지상으로 내려가긴 다 틀렸다ㅡ『그 이상의 오브제』

슬픔의 돌김율희‘내가 보이면 울어라’독일 엘베강에서 모습을 드러낸 헝거스톤*1947, 1959, 2003, 2018,그리고 2022년가뭄 속에서 드러난 돌의 얼굴,너무 직설적이라 아픈, 슬픈.人間이라서 人間이기에 탐욕과 거짓 사이에서 절제하지 않고 내달렸다. 더 많이,더 높이, 욕망의 검은 거울을 치켜들고 앞을 향해 내달렸다. 전쟁과 살육과 약탈식량과 에너지와 땅을 빼앗았다.그리고 우리들의 정신과 인격까지도.人間이라서 人間이기에 오롯이 품어야 했던 그 사랑까지도지독한 이 가뭄 속에서 다 살육당했다. 지구의 가뭄人間의 가뭄 人間 정신

시로 쓴 김대건 신부김남조형리들이 달려들어들것에서 내린 다음옷 벗기고 두 귀에 화살을 꽂아얼굴엔 물과 회를 뿌리고겨드랑이엔 긴 막대기를 끼워세 바퀴 구경시킨 다음아침부터 만취한 회자수들이 희롱하며 칼춤을 추는데북소리 연신 울리고햇빛에 번득이는 칼날의 푸른 광채이윽고 내려진 칼날이무지한 장난으로 조금만 목을 베니다음 번 회자수가 또 그 짓이고세 번, 네 번, 다섯 번여덟 번째 칼날에야목이 떨어지니하늘로 솟구치는 선혈,빛깔은 진홍이나이슬보다 눈물보다더 맑고 깨끗하다ㅡ『시로 쓴 김대건 신부』(고요아침, 2017)에서 김남조 마리아

떡윤동재떡도 떡도쑥쑥 자란 쑥을 쑥쑥 넣은 쑥떡오순도순 나눠 먹는 떡떡도 떡도많고 많아 넘쳐 나도 그림의 떡누구도 못 먹는 떡떡도 떡도네 편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닌 송편 절편누구나 맛있게 먹는 떡떡도 떡도엄청 배를 쫄쫄 곯아도 끄떡끄떡 헐레벌떡아무도 단 한 입도 못 먹는 떡떡도 떡도가래 없는 가래떡 빈대 없는 빈대떡너도나도 맘 놓고 즐겨 먹는 떡떡도 떡도신라의 백결 선생 거문고로 떡방아 찧어 만든 떡먹어도 먹어도 더욱더욱 배고픈 떡ㅡ『동시발전소』(2023년 가을호)6개 연으로 이뤄진 이 동시는 “떡도 떡도”가 각연의 첫째 행

송현이*의 말한분옥검붉은 순장부에 이름 오른 그날이더냐다만 청대 같은 머릿결을 감아 빗고열일곱 그 나이 그대로대낮 낯빛 그대로즈믄 밤 걷어차고 깨어난 어느 아침내 뺨을 할퀴어라 금붙이가 웬말이냐흙 속에 잃어버린 것뼈 하나로 남은 것내 죽어 묻힌 땅의 이름으로 걷고 싶다볕 드는 봄 언덕이 비단처럼 곱던 날에찔레꽃 환한 길 따라비화가야 옛길 따라* 경남 창녕군 송현동 15호 고분에서 순장 유골로 발굴된 가야 소녀. ㅡ『시조시학』(고요아침, 2023년 가을호)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9월 10일에 개막해 17일 오후 사우디아라비

마니산 자락에서이성률시험에 떨어지고 온 너녹차 한잔 하려무나.경쟁에 몰리고 기대에 차이고젊음은 을일 때가 흔한 유리잔마음에 새싹 입혀 가려무나.직장을 구하고 보금자리 마련해도내일은 잔 근심 백 리들러리 설 일 무성한 안개 길.짐 내려놓고 사뿐사뿐 가거라.생은 기다림이 많아 까칠한 선물아홉 번 덖어야 향 가득해지는 삶이니끝까지 널 응원하는 사람 네가 되어라. ㅡ『긴 꼬리 연애』(천년의시학, 2023)어떤 시험에 떨어지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직장을 구하고 보금자리 마련해도”란 구절로 미뤄보아 기업체 입사 시험이나 공무원 시

더부살이김원식 자취방 보증금을 장만하러엄마는 날품을 팔고자식은 자퇴서를 승차권 삼아서울행 버스를 탔다검정고시 학원비 앞에서고3의 객기는 무릎을 꿇었고엄마는가산을 탕진한 남편을안으로만 텅, 텅, 텅, 울었다엄마 등으로 흐르던 눈물이만경강 수위를 높이던 삼례역책가방에 염치를 숨기고찾아간 친구 우덕이 단칸방솜이불 속에 한 발을 넣고유난히 긴 겨울의 몸을 녹였다엄마는 인삼밭 나래를 엮어손이 튼 보증금을 불리고어떻게든 대학을 꿈꾸던 가난의 외풍에 벌벌 떨던 해였다ㅡ『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사람』(마음시회, 2023) 한 가난한 문학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