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나의 힘기형도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ㅡ『입 속의 검은 잎』

싫어의 무게 홍재현 아빠가 “회사 가기 싫다”하거나엄마가 “밥하기 싫다”할 때는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형이 “학교 가기 싫어”한마디만 하면집안이 발칵 뒤집힌다.엄마는 선생님, 친구들, 상담소분주히 여기저기 전화를 걸고아빠는 수많은 질문을 삼킨 채끊었던 담배를 다시 찾는다.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찬집이 된다.나는 방문도 못 열겠다. ㅡ『시와 소금』(2023년 여름호)에서 회사원이 회사에 가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귀찮거나 짜증스럽거나 뭐 그런 날이 있는 것이다. 주부라도 일손을 놓

사람이 나무 되어 이서연숨 쉬는 간격만큼 떨어진 자리에서가슴이 가슴으로 꽃 되고 푸름 되어하늘향 나눠 주는 나무가 사람이면 좋겠어요​말 없는 거리만큼 침묵의 여백에서마음이 마음으로 향기론 바람 되어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이 나무라면 좋겠어요눈 맞춤 허물어진 흔들린 일상에서서로가 서로에게 푸르른 벗이 되어세상사 풀어가는 우리가 나무 되면 좋겠어요 ㅡ『시조가 그린 풍경』(국제PEN 한국본부, 2023)에서 우리가 산에 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좋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걷는 동안 운동이 되고 누구랑 같이 간다면 인간적인 정도 느낄

자연이승하1. 한산자가 습득에게우리 이 땅에 떨어진 한 개 돌멩이니구르지 못하면 땅에 박혀 있으면 그뿐강가의 빛나는 돌 부러워하며 살아본들예쁜 돌 탐하는 사람에게 잡혀갈 뿐이로다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던 우리가인간 속에서 인간의 삶 살지 않게 되었으니습득이, 절 부엌에서 부지깽이 잡고 있는 그대가부처상 앞에서 목탁 두드리는 저 중보다 낫도다.2. 습득이 한산자에게우리 이 땅에 떨어진 한 개 풀씨이니뿌리내리지 못하면 세상 알 수 없지요아름드리나무 부러워하며 쳐다본다고 한들그 밑에서야 제대로 하늘 보며 살 수 있나요만물이 제각기 만상

새벽 여자김생수푸석한 여자 하나 안개 속에 서 있다가방을 둘러메고 버스 승강장에 서 있다목구녕의 자본을 위해 어디를 가려는지얼굴에 바른 분조차 새벽 안개 같다가장은 어디로 갔을까, 앓아 누웠을까아이들은 몇이나 뒀을까새벽 여자 땅 보고 하늘 보고 표정 하나 없다이혼했을까 사별했을까시도때도 없이 사라지는 예측불허의 목숨들,잘나지 못해서 못 사는 건지잘살지 못해서 못나 보이는 건지안 이쁘면 사랑받지 못하는 세상얼굴은 이쁘고 봐야 한다고 이리 째고 저리 꼬매는 세상마음씨 따위 성형엔 절대 관심 없는 세상이쁘지는 안해도 열심히 살아라 건강이

산불김영미불꽃이푸른 숲을 삼켜버리려마을 앞까지 내려왔을 때별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밤하늘과 바람이한 덩이가 될 때까지새들은 오지 않았다.검은 나비들이 먹빛 고요를 깨뜨리고빈집을 날아다닐 때나무는조용히 땅속에 박힌 뿌리에 힘을 주고 있다.바람이 친구가 될 때까지ㅡ『내 몸에는 별이 산다』(현대시학, 2023)에서 몇 년 전에 호주에 산불이 나서 몇 달 동안 계속되었다. 올해는 캐나다에서 큰불이 나서 엄청난 숲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해마다 크고 작은 산불이 일어난다. 호주에 갔을 때, 산불이 났던 현장에 가보고

어머니의 범종소리최동호어린 시절 새벽마다 콩나물시루에서 물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이웃집에 셋방살이하던 아주머니가 외아들 공부시키려 콩나물키우던 물방울 소리가 얇은 벽 너머에서 기도소리처럼 들려왔다.새벽마다 어린 우리들 잠 깨울까 봐 조심스럽게 연탄불 가는소리도 들었다. 불을 꺼뜨리지 않고 단잠을 자게 지켜주시던,일어나기 싫어 모르는 척하고 듣고 있던 어머니의 소리였다.콩나물 장수 홀어머니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어머니 가시고 콩나물 물 내리는 새벽소리가 지나가면불덩어리에서 연탄재 떼어내던 그 정성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단 하나의 소원 조병화사람이 육십대에 들어서면사형선고를 받을 사람들 대열에 끼고칠십 줄에 들어서면사형집행을 받을 사람들 대열에 낀다고들 하는데지금 나는 날로 그 날짜가 궁금해진다아, 칠십 평생을 달음박질로 살아온 것 같은 인생,무엇 때문에 나는 그렇게칠십 평생을 공연히 그리 바쁘게 살아왔을까떠남을 거듭하며 살아온 생애,실로 나의 인생은 오해, 와 포기, 와 도피, 와 이별, 과 고독.그 순수 고독을 살아오며, 그 순수 허무를같이 살아온 거다지금 이 자리 아무런 후회는 없으나칠십을 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날로 궁금해지는 것은사형집행

먹통 문봄주인님 주머니에서 떨어짐시로한 바쿠 휭 돌아부렀당께액정이 깨져부러서 앞이 컴컴해야이래 봬도 나가 최신 폰인디귀가 멍멍해븡께 암것도 안 들려야입이 얼얼해븡께 말문이 맥혀븐다야오메, 어째야 쓰까이!바닥에 눠 있을랑께 뒷덜미 욱신욱신해부러써비스 센터로 언능 가봐야제아따, 주인님은 어디로 갔으까이?해 떨어지기 전에 날 찾을란가ㅡ『폰드로메다 별에서 오는 텔레파시』(출판그룹 상상, 2023)에서 지난해에 제14회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을 받은 문봄 동시인은 동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가고 있는 혁명가라고 할 수 있다. 위트가

연애 좀 혀 박화남 밥 잘 먹는 아들 보면 억장이 무너져서고모는 긴 한숨을 꿀꺽 삼키고 만다내세울 직장 아니면결혼은 별 따기 낼모레 오십인데 통 큰 농사 짓는다는걱정 없는 아들이 걱정되어 입맛이 없다수박이 익어갈수록 커가는 붉은 감정우리도 국제화에 발맞춰 가보자고별빛 모서리라도 줄을 좀 서보라도대화가 부쩍 늘었다늦된 농사 짓느라고ㅡ『맨발에게』(작가, 2023)에서 화자는 고모와 고모의 아들인 고종사촌이 안쓰럽다. 시골에서 수박 농사를 짓는 고종사촌이 낼모레면 오십인데 미혼이다. 본인은 걱정도 하지 않는다. 고모는 수박 농사만

처용과 붉은 악마ㅡ광대를 찾아서 3 이승하때는 신라 49대 헌강왕 때였지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던 그대안방에 다리가 넷인데도 춤추던 그대분노가 춤이 되는 세계우리 모두 그 세계의 자식들이거늘풍악이 울리면 함께 춤추고흥이 오르면 노래 자청하고우리 모두 처용 광대의 후예인 것을녹색 잔디에 불이 일어난서기 2002년 6월이었지대～한민국! 함성을 지르는도깨비들이 있었어 그놈들은“오～ 필승 코리아”란 글자가 적힌요상한 방망이를 들고 있었지예선전, 16강, 8강, 4강……그놈들은 그예 스탠드에서 내려와손에 손 잡고 춤추기 시작했어벽을 넘

너울 동생정홍순형은 내게 물려주었다엄마의 젖꼭지와 잠자는 방식, 칭얼거림을 돌려 안아 세우면꿈꾸다 우는 것도 물려주었다나는 물려줄 수 없는 끝물로 태어났다내가 물려받은 것은사람이 될 수 있는 기본 동작들어쩌다 까마득한 기억 더듬으며세상이 가당치도 않을 때부르르 떨게 한 것이다사람의 젖 물고 사람 받았고우는 것이 솔직한 고루한 방식을 받았다우리는 밀물에 잠기다 썰물에 뜨는 섬 새끼둥그렇게 성영(星影) 읊으며 사는너울 형제가 되었다지금도 진보된 것은 없다나는 천륜의 진화를 꿈꾸지 않는 아우다ㅡ『국화는 뜨겁다』(시인동네, 2023)에서

사람의 말로 주정을 이중도소봉도의 유일한 소인 황소 일우가꽃 피는 봄에진달래 머리에 꽂고 더운 김 내뿜으며산기슭 다랑논들과 밭들을 다 갈고남해 바다 푸른 물에 시원하게 목욕을 하고 나면사람들은 산낙지 한 바케쓰와 탁주 한 다라이로 주안상을 차려 줍니다일우가 술을 마실 때에는굴레뿐만 아니라 코뚜레도 벗겨주는데술에 만취되면일우는 사람의 말로 주정을 하고코를 골고 자면서 사람의 말로 잠꼬대를 합니다다음 날 저녁까지 푹 자고 술이 다 깨면다시 코뚜레를 끼우고 굴레를 씌우는데코뚜레가 코중격을 통과하는 순간일우는 전생의 말을 다 잊어버리고 다

빵집 이준관햇살에 알맞게 익은 밀을 빻아화덕에 갈색으로 구운빵을 파는 빵집을 내고 싶네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헴은‘빵 만드는 집’아이가 받아든 빵점짜리 시험지아이 손에 들려 있는풀이 죽은 풀빵 말고아들이 받아든 빵점짜리 인생아들 손에 들려 있는속이 텅텅 빈 공갈빵 말고잔고가 빵이라고 찍혀 있는은행 통장 말고차들이 비켜달라고 빵빵거리는막다른 골목길 말고냄새만 맡아도 행복으로마음이 빵빵해지는아름다운 시집 같은빵집을 내고 싶네ㅡ『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밥북, 2023)에서 동시를 주로 쓰지만 이번에 제4시집을 낸 중견시인이기도 한

첫날 밤 오상순어어 밤은 깊어화촉동방의 촉(燭)불은 꺼졌다허영의 의상은 그림자마저 사라지고……그 청춘의 알몸이깊은 어둠 바다 속에서어족인 양 노니는데홀연 그윽히 들리는 소리 있어아야…… 야!태초 생명의 비밀 터지는 소리한 생명 무궁한 생명으로 통하는 소리열반의 문 열리는 소리오오 구원의 성모 현빈(玄牝)이여!머언 하늘의 뭇 성좌는이 밤을 위하여 새로 빛날진저!밤은 새벽을 배(孕胎)고침침히 깊어 간다.ㅡ『공초 오상순 시선』(자유문학사, 1963) 오상순(1894〜1963) 시인이 작고한 지도 60년이 되었다. 한평생 어디에도

정현이 아재 서정홍달동네 사는 정현이 아재덜꺼덕거리는 낡은 기계에 치어왼쪽 발목이 잘린 날엄마 아빠와 함께 산재 병원을 찾아갔어요.하얀 붕대를 감고말없이 누워 계신정현이 아재에게아빠는 죽을 용기로굳세게 살라 하고엄마는 서로 돕고 살면하늘도 도울 거라 했지만정현이 아재굵은 눈물만 흘릴 뿐아무런 말이 없어요.아무런 말이 없어요.ㅡ『윗몸 일으키기』(현암사, 1995)에서 동시는 진, 선, 미를 추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서정홍의 동시는 대체로 인생의 희로애락과 인간의 생로병사를 다룬다. 특히 사물의 동시가 아니라 사건의 동시다. 인

복순 씨의 아카이브 이소영한 남자한테 시집왔는데 여자가 여섯인 거야홀시어머니에 시누이가 줄줄이 사탕이라 도시락 몇 개 싸고 빨래에 치이다 보면 하숙집 주인이 따로 없더라니까 게다가 마늘 못 먹는 네 할미 덕에 들어간 놈 안 들어간 놈 구별하다 보면 반찬 가짓수로는 수라상 저리 가라였지 남편이 효자면 며느리가 생고생한다더니 한술 더 떠 며느리 저녁 하느라 동동거리는데 시어미 분단장하고 아들 마중 나간단 말이지 마누라 보듬지 못한 숙맥 같은 네 아빠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곰탱이 같은 나나 둘 다 헛똑똑이라 긴 세월 살았나보다 그대로

주법酒法ㅡ중앙대학 앞 왕개미집에서이승하일백 년 후에 이 술집이어떻게 되어 있을지 내 짐작할 수 없지만 오늘 이 자리를 잊지 않으려술을 마시자 얼마 동안이라도 도취하도록결코 비틀거리지는 않도록일백 년 후의 내 머리카락과 뼈어떻게 되어 있을지 내 짐작할 수 있지만오늘 우리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으니자 마셔라 탁한 세상 탁한 술을 마시자구정이 넘쳐 눈물이 고이고 얘기가 끊기면 미소만 짓고빛나는 기억보다빛나지 않는 기억들이더욱 빛나리라 지금부터 일백 년 후오늘 이 자리의 기억으로식은 가슴이 따뜻이 차오르면술 없이도 취할 수 있도록.ㅡ『사랑

악몽일까? 임봉주 살려주세요!찢겨 나뒹구는 팔, 다리, 머리통피투성이 된 어린이들거꾸러진 채 숨 헐떡거리는 노인들불타오르는 집과 검은 연기도살된 짐승처럼 널브러진 시체 더미자욱한 포연 속에 달리는 군용차량성조기 꽂힌 채 지프차가 스쳐 간다일장기 앞세운 장갑차가 지나간다태극기 찢어져 너풀거린다하늘 휘젓고 다니는 수백 대 전투기거대한 폭격기가 지나가자 귀를 찢는 폭발음뒷산이 우르르 무너져 내린다한강 물, 대동강 물이 거꾸로 뒤집힌다동해, 서해 해일과 쓰나미가 덮친다아수라장, 난장판, 생지옥, 불지옥탱크가 내달린다중국 오성기가 스쳐 간다

어처구니신정옥환절기 불청객, 독감에 잡히면어쩌다 사용하던 마스크이제는 보석보다 더 귀한 몸이 되었다어처구니가 없다2차까지 접종하면 안심이라던 백신 3차를 맞고도 확진자 발생지금은 4차를 맞고도 감염이 된단다정말 어처구니가 없다우주 관광이 현실이 되고방탄소년단이 부른 ‘다이너마이트’가 달나라에 실려 가서 콘서트 중인 21세기온 세계가 바이러스에 끙끙 앓는다진짜 어처구니가 없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어처구니의 어원‘맷돌 손잡이’ 혹은 ‘궁궐의 잡상’이 설도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네그럼 어처구니는 어디에 있을까?어처구니가 어처구니없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