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실크로드구중서쾅 펑 쾅 펑산자락 우거진 숲에 울리는 소리흰 거품 띠 말아기어오르고 물러나고무어라 할 말 많은 동해 푸른 물 옆에 두고등성이 녹슨 철망 끊고들어서는 남과 북의 병사들서로의 사이에 지뢰를 묻고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 같던못난 마음들이 어느 가을 하늘 아래스스로 지뢰를 캐어 터뜨리며다가선 날 있었다여기에 길을 내고 철로를 이어시베리아, 알타이산 아래까지내달리는 열차에우리 함께 타고 싶구나먼 지난날 스탈린이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에서백의의 고려인 무리 불러내어어디론가 보내던 날광막한 벌판과 바이칼호 지나며추운 열차에

리모컨임영조저격을 꿈꾼다가장 편한 자세로앉거나 서서 또는 누워서증오의 화상을 처치하는 꿈귀신도 곡할 범죄를 꿈꾼다잠시 숨을 멈추고긴장을 풀고일격필살을 노리는복수의 버튼만 살짝 누르면세상은 전혀 딴판으로 바뀌고놈은 쥐도 새도 모르게눈앞에서 썩 사라지겠지외마디 비명은커녕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행적은 묘연한 채별의별 소문만 분분하겠지물증은 없고 심증만 가는이 시대의 테러리스트언제나 깨어 있는 눈으로완전무결한 단죄를 꿈꾼다ㅡ『갈대는 배후가 없다』(세계사, 1992) 장례식장에 가서 유족을 위로해드린 것이 얼마 전 일인 것 같은데 임

아빠의 거짓말가춘경 생일 선물 사 온다는출근길 아빠 말씀귓가에 맴돌아서수업시간 둥둥둥아직도밝은 낮이야빨리 가라 시간아어둑한 저녁시간누나랑 아빠 마중“누나 누나, 아빠 와?”“아니, 아직 안 오셔.”아빠는 술에 취하여곤죽으로오셨다.ㅡ『인생 소풍』(도서출판 고요아침, 시와 길 Vol.2, 2023) 해설이 필요없는 동시다.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이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이야기다. 자식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무책임한 아빠가 어찌 이 동시 속의 아빠일 뿐이겠는가. 애당초 약속을 하지나 말지. 온종일 기다리게 해놓고 본인은 그 약

귀가 홍성란 만취하면 웃으시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버스에 올라 기사에게 건네던아버지 허름한 헛말이 비닐봉지 홍시 같아몇 정거장 먼저 탄 갈래머리 막내딸은마주칠까 슬슬 뒤편으로 숨었지그날을 환히 돌이켜 부축하고 돌아왔네ㅡ『정형시학』(2023년 봄호) 이 시조 속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만취한 아버지와 그의 막내딸과 두 사람이 탄 버스의 운전기사가. 만취한 아버지가 버스에 올라타서 기사에게 건네는 말이란 것이 막내딸이 듣기에 다 “허름한 헛말”이다. 창피해 죽겠다. 그래도 아버지는 시장에서 식구들에게 주려고 홍시를 몇 개

다슬기 먹는 저녁이해존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의 다슬기를 비우고가지런한 틀니를 띄워 놓았다어머니가 다 닳은 칫솔로 양치하신다시린 물속바가지의 줄무늬 긁는 소리드드득 이를 부딪친다제 운동화 못 보셨어요?움푹 팬 웃음으로 돌아보실 때내가 들켜버린 것 같아개가 물어갔나, 얼른 마루 밑을 쳐다봤다마루 밑에 운동화는 없고바람 빠진 축구공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아버지와 큰형은 장화를 신은 채마루 끝에 걸터앉는다나와 동생도 마루 위에둥그렇게 모여앉아 다슬기를 파먹는다다슬기엔 탱자나무 가시가 제격이지,시퍼런 가시가 신침을 돋우긴 한다난 탱자나무

실크로드 오아시스 사람들 -부하라*최도선 낙타, 노새, 양, 말, 모직물 같은 것이 난다. 옷은 가죽 외투와 모직을 입는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천여 년 전 혜초가 걷던 길에 왔네I LOVE YOU 적힌 티셔츠 입은 아이들 축구하네 높은 흙벽 그늘에선 카라쿨 모자 쓴 노인들 차를 마시네 미루나무 쭉쭉 하늘 향해 뻗어 있는 동네 낙타에 짐 싣고 서역을 오가다 묵었다던 라비하우스에서 나도 신발 끈을 푸네 포도 넝쿨에 포도알이 탱탱 물오르는 한나절메추라기 여러 쌍이 여행자를 맞네유대인들 광야에서 먹었다는 저 새 꾸룩꾸룩 말 걸어오

과천 구술사口述史최종고 과천문화원에서 근자에 펴낸 44인 과천 노인들의 이야기 재미있다관악산엔 나물이 적어청계산에서 다래순 뜯어 남대문 갖다 팔았시유여기가 생견말 막계 백미 제일 많이 나무장사를 했지지게에 지고 흑석동 가서 팔면 20환, 좁쌀 몇 되 샀지남태령 심방뜰 주막거리서 술 한 순배 내어야 서울에 갔지한 달에 세 번 서는 수원 장날이면 어머니 지갑이 두툭해졌지과천저수지와 청계산 개울이 맞닿는 자리에 깻묵을 이겨 넣은 어항을 드리우고 20분만 있으면 송사리가 가득 찼지과천의 신혼여행은 택시 타고 서울 남산 돌고 오는 것이 최고

어느 편집자의 마지막 페이지이호석 반성하는 마음으로 삼십 대를 편집자로 살아냈으나나의 인생은 수정되지 않았고, 자꾸만 오탈자가 목에 걸렸다읽히는 삶을 궁극으로 두었으나 나는 읽는 사람에 가까웠고쓰는 일은 사치가 아니면 노역과도 같아국어사전에 악착같이 매달리던 시절나의 언어 습관은 나랏말쌈과 달라낫 놓고 기역 자를 찾는 것처럼 OK 교정은다음 날이 다음날이 되도록 멀어졌으며정신을 띄어쓰기에는 이제 눈이 침침해지고머리칼 속에는 띄엄띄엄 흰서리가 내렸다강산도 바뀐다는 세월 동안다섯 수레가 넘치도록 책을 만들어 왔지만정작 내가 읽은 것은

전사戰死강인섭가장 명백하게살아 있을 때그는 총에 맞았다.따가운 햇살이그의 얼굴에서고향에 두고 온 아들의볼을 어루만지듯넘실댈 때그는 쓰러졌다.월남 땅눈에 담긴 고향의 하늘과진흙 속에 빠진발.그 가운데서그는 명백히 살아 있다고생각할 때.어디선가세계의 어느 구멍이그의 타는 가슴을 쏘았다.ㅡ『녹슨 京義線』(범우사, 1969) 한국군이 월남전(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은 1965년이었다. 1972년까지 8년에 걸쳐 총 56만 3,387건의 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강인섭 시인(1936〜2016)이 시집을 낸 시점은 그 어떤 국내 뉴스보다

은방울꽃차윤옥길섶에 핀 야생화색깔도 모양도 너무 고운데이름을 알지 못해고개 갸웃거리는데지나가던 할머니 하시는 말씀“얘야, 은방울꽃이 너와 닮았구나.”내 궁금증을 할머니는 어떻게 알았을까내 마음 은방울꽃은방울꽃 내 마음ㅡ『상상탐구』(계간문예작가회, 제9호) 이 세상에는 수많은 꽃이 있지만 은방울꽃은 이름 그대로, 예쁘고 사랑스럽다. 할머니의 눈에 들어온 소녀는 은방울꽃만큼이나 예쁘고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젊음’이란 그 자체가 자랑거리이고 큰 축복이다. 노인은 아이를 보면 그저 장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은

비 오는 날최재영신발 장수 스프레이를 신발에 흩뿌리면비 올 때 거짓처럼 신발 젖지 않는대요오늘은 우산 쓰시고 이걸 가득 뿌리세요아니다 비 성가시니 우산이야 쓰겠지만빗소리 듣기만 해도 마음이 젖어들 듯비 오면 창밖은 젖고 그 속도 젖는 거지빗물에 발은 붓고 어이없이 미끄럽겠지비 오는데 안 젖겠다고 혼자서 깔끔 떨면어쩐지 하늘 보기가 미안하지 않겠니ㅡ『심지(心誌)』(한국미소문학시인선, 2023) 올해는 정말 비가 많이 왔다. 비 때문에 이렇게 많은 인명피해가 난 해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종종 하였다. 해병대 군인의 죽음은 수많은

꽃과 피―경기도 양평 중미산천문대에서, 아들에게 누가 밤하늘에다 생명체를 뿌렸구나 전갈좌의 별들이 자오선을 막 통과하고 있어오리온은 전갈에게 끔찍하게 쏘여지평선 아래로 몸을 감추고 있네 지금은 6월 중순, 밤 11시가 막 지나고 있어 내가 입 맞춘 별들이 지금은 피 흘리고……지구는 자꾸자꾸 더 많이 아프단다제자 하나가 스님 설봉*에게 물었지“스님, 우주의 크기는 얼마나 됩니까?”설봉이 대답 대신 되묻기를, “좁쌀의 크기를 아느냐?”제자가 얼른 “예”라고 대답했지 그러자 설봉이 이렇게 말했다지“좁쌀의 크기를 아는 놈이 어떻게 우주의

그곳은 惡김영승그곳은 惡으악으악惡惡惡惡인육으로 집을 짓고살인의 밤을성모의 눈물처럼 뜨겁게인육의 육즙을 짜고 있는정액과 음수의 폭우가 쏟아지는그래도 잠들지 않고 있는그곳은 惡더는 침범할 수 없는신의 인내가방향처럼 드리워진십자가처럼 서 있는마천루 그늘 아랜공룡보다도 더 거대한개미보다도 더 작게 꿈틀거리고 있는 한 사나이성냥개비에 못 박혀 바둥거리고 있는히히히히그곳은 착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잠자리 날개같이 고운참 어처구니없는惡.ㅡ『아름다운 폐인』(미학사, 1991) 한때 김영승 시인은 이 세상을 마음껏 조롱하면서 살았다. 요즘 우

택배기사 박기을세상에 못 오를 나무는 없다주소 하나 동아줄로 빼어삼백 고지 아파트를 타고수천 평 단지를 날아다닌다엘리베이터 탈 때마다 절은 땀내눈을 마주치지 못한다얼마나 더 땀을 흘려야저 산에 문패 하나 걸어보나 세탁기에 작업복을 넣으면이빨 가는 소리가 난다뼈 타 들어가는 냄새가 난다바닥에 누워 수렁으로 빠져들면꾸러미 안고 오는 할아버지썰매보다 큰 컨테이너에몇십 배 꾸러미 싣고열두 달 산타가 된다땀들이 세제에 녹아내리면빨랫줄에 걸리는 분봉 밀랍방울방울 흘린 땀밀랍 칸 채우는 꿀 아니지만걷다가 뛰다가 보면 나는 단내지나는 계단마다 꽃

날개김광균눈물겹다황폐한 고국, 낡은 철로와 끊어진 다리서른여섯 해 비바람이 스쳐간 자리애처롭다혼곤한 산과 들에 시냇물 소리나의 부모 동생과 뭇 겨레가 살고 있는 곳이 슬픔 위에이 기쁨 위에혁명이여, 아름답구나피묻은 네 날개 위에찬란한 보람 동터 오누나잃어진 내 것을 찾아거리로 가자 항구로 가자혁명이여나에게 장대한 꿈을 주렴아날아가야 할 하늘 저 멀리 가로놓이니연약한 나래를 모아 노래 부르자우리 두 팔을 걷고 바위를 밀자가없는 곳에 큰 길을 닦자ㅡ『해방기념시집』(중앙문화협회, 1945)에서 1945년(단기 4278년) 12월

세모한용운산 밑 작은 집에두어 나무의 매화가 있고주인은 참선 중이다.그들을 둘러싼 첫 겹은 흰 눈, 찬 바람, 혹은 따스한 빛이다.그다음의 겹과 겹은생활고ㆍ전쟁ㆍ주의ㆍ혁명 등가장 힘있게 진전되는 것은강자와 채권자의 권리행사다.해는 저물었다.모든 것을 자취로 남겨두고올해는 저물었다. ㅡ『한국현대시문학대계 2/한용운』(지식산업사, 1981) 우리는 한용운 하면 시집 『님의 침묵』을 떠올리지만 이 시집에 수록된 시 외에도 시 21편, 시조 21편, 한시 139수를 남겼다. 동시도 3편 썼다. 『박명』 『철혈미인』 『죽음』 같은 장

어제 저녁부터이상교어제 저녁부터나는노란 단무지를 좋아하게 되었다.어제 저녁부터나는실로폰 소리를좋아하게 되었다.어제 저녁부터나는나무 밑으로 걸어다니길좋아하게 되었다.내가 좋아하는 그 애가좋아한다고 말한그런 것들 모두.―『나와 꼭 닮은 아이』(현암사, 1996) 세상이 너무 살벌하다. ‘묻지 마 살인’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밥 먹으러 가다가, 물건 사러 갔다가 죽게 되니 사람 목숨이 이렇게 하찮게 취급되는 현실이 무섭다. 초등학교 교사의 자살로 교권이 위협받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 비로소 알려졌다. 교사가 초등학생 제자에게,

뻥튀기 카페김민정쉬었다 가시라고 식당 앞에 차려놓은커피도 매실차도 말 그대로 공짜인 곳덤으로 수북이 쌓인 쌀뻥튀기 일품이다삼삼오오 둘러앉아 뒷담화하는 대신눈 맞추며 사각사각 씹으라는 말씀인가말이란 뻥, 튀겨놓으면 감당하기 곤란하니ㅡ『펄펄펄, 꽃잎』(월간문학 출판부, 2023) 이 시조는 첫째 수와 둘째 수의 내용이 좀 다르다. 전반부는 어느 인심 좋은 식당 주인의 배려가 독자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준다. 커피와 매실차 중 골라 마시게 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가능한 서비스이지만 덤으로 수북이 쌓아놓은 쌀뻥튀기는 손님을 기분 좋게

파종최지인억세게 내린 비뿌리가 드러났다밭 가장자리구덩이 파고사람들 일렬로세운 뒤죽인 흔적*(사건 발생 및 유해 매장 관련 지번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산39)위 장소는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납치된 반공 인사 및 민간인 집단 학살 유해 매장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감히 삶에 대하여묻습니다죽음을 모르는데어찌 삶을 알겠습니까*당신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고얼마 후 전쟁터에 나갔다.왼손에 총상을 입었으나생존에는 문제가 없었다.내가 복무했던 청룡부대소속 군인들은 베트남전쟁에서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을 마

랑서정춘 랑은 이음새가 좋은 말너랑 나랑 또랑물 소리로 만나서사랑하기 좋은 말―『시와 산문』(2023년 여름호)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이 짧은 시는 참 명랑해서 좋다. 낭랑, 청랑 등 다른 말도 랑으로 끝나니까 좋지 않은가. 신랑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유랑이나 방랑도 좋아한다. 긴 시가 양산되고 있다. 시집 서너 페이지에 걸쳐 진행되는 시가 정말 많다. 시집과 문예지에 산문시도 넘쳐난다. 글자가 십수 행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이들 시는 대체로 난해하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시를 보면 한편으로는 경외감이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