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 박기을세상에 못 오를 나무는 없다주소 하나 동아줄로 빼어삼백 고지 아파트를 타고수천 평 단지를 날아다닌다엘리베이터 탈 때마다 절은 땀내눈을 마주치지 못한다얼마나 더 땀을 흘려야저 산에 문패 하나 걸어보나 세탁기에 작업복을 넣으면이빨 가는 소리가 난다뼈 타 들어가는 냄새가 난다바닥에 누워 수렁으로 빠져들면꾸러미 안고 오는 할아버지썰매보다 큰 컨테이너에몇십 배 꾸러미 싣고열두 달 산타가 된다땀들이 세제에 녹아내리면빨랫줄에 걸리는 분봉 밀랍방울방울 흘린 땀밀랍 칸 채우는 꿀 아니지만걷다가 뛰다가 보면 나는 단내지나는 계단마다 꽃

날개김광균눈물겹다황폐한 고국, 낡은 철로와 끊어진 다리서른여섯 해 비바람이 스쳐간 자리애처롭다혼곤한 산과 들에 시냇물 소리나의 부모 동생과 뭇 겨레가 살고 있는 곳이 슬픔 위에이 기쁨 위에혁명이여, 아름답구나피묻은 네 날개 위에찬란한 보람 동터 오누나잃어진 내 것을 찾아거리로 가자 항구로 가자혁명이여나에게 장대한 꿈을 주렴아날아가야 할 하늘 저 멀리 가로놓이니연약한 나래를 모아 노래 부르자우리 두 팔을 걷고 바위를 밀자가없는 곳에 큰 길을 닦자ㅡ『해방기념시집』(중앙문화협회, 1945)에서 1945년(단기 4278년) 12월

세모한용운산 밑 작은 집에두어 나무의 매화가 있고주인은 참선 중이다.그들을 둘러싼 첫 겹은 흰 눈, 찬 바람, 혹은 따스한 빛이다.그다음의 겹과 겹은생활고ㆍ전쟁ㆍ주의ㆍ혁명 등가장 힘있게 진전되는 것은강자와 채권자의 권리행사다.해는 저물었다.모든 것을 자취로 남겨두고올해는 저물었다. ㅡ『한국현대시문학대계 2/한용운』(지식산업사, 1981) 우리는 한용운 하면 시집 『님의 침묵』을 떠올리지만 이 시집에 수록된 시 외에도 시 21편, 시조 21편, 한시 139수를 남겼다. 동시도 3편 썼다. 『박명』 『철혈미인』 『죽음』 같은 장

어제 저녁부터이상교어제 저녁부터나는노란 단무지를 좋아하게 되었다.어제 저녁부터나는실로폰 소리를좋아하게 되었다.어제 저녁부터나는나무 밑으로 걸어다니길좋아하게 되었다.내가 좋아하는 그 애가좋아한다고 말한그런 것들 모두.―『나와 꼭 닮은 아이』(현암사, 1996) 세상이 너무 살벌하다. ‘묻지 마 살인’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밥 먹으러 가다가, 물건 사러 갔다가 죽게 되니 사람 목숨이 이렇게 하찮게 취급되는 현실이 무섭다. 초등학교 교사의 자살로 교권이 위협받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 비로소 알려졌다. 교사가 초등학생 제자에게,

뻥튀기 카페김민정쉬었다 가시라고 식당 앞에 차려놓은커피도 매실차도 말 그대로 공짜인 곳덤으로 수북이 쌓인 쌀뻥튀기 일품이다삼삼오오 둘러앉아 뒷담화하는 대신눈 맞추며 사각사각 씹으라는 말씀인가말이란 뻥, 튀겨놓으면 감당하기 곤란하니ㅡ『펄펄펄, 꽃잎』(월간문학 출판부, 2023) 이 시조는 첫째 수와 둘째 수의 내용이 좀 다르다. 전반부는 어느 인심 좋은 식당 주인의 배려가 독자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준다. 커피와 매실차 중 골라 마시게 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가능한 서비스이지만 덤으로 수북이 쌓아놓은 쌀뻥튀기는 손님을 기분 좋게

파종최지인억세게 내린 비뿌리가 드러났다밭 가장자리구덩이 파고사람들 일렬로세운 뒤죽인 흔적*(사건 발생 및 유해 매장 관련 지번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두포리 산39)위 장소는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 납치된 반공 인사 및 민간인 집단 학살 유해 매장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감히 삶에 대하여묻습니다죽음을 모르는데어찌 삶을 알겠습니까*당신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을 맞고얼마 후 전쟁터에 나갔다.왼손에 총상을 입었으나생존에는 문제가 없었다.내가 복무했던 청룡부대소속 군인들은 베트남전쟁에서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을 마

랑서정춘 랑은 이음새가 좋은 말너랑 나랑 또랑물 소리로 만나서사랑하기 좋은 말―『시와 산문』(2023년 여름호)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이 짧은 시는 참 명랑해서 좋다. 낭랑, 청랑 등 다른 말도 랑으로 끝나니까 좋지 않은가. 신랑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유랑이나 방랑도 좋아한다. 긴 시가 양산되고 있다. 시집 서너 페이지에 걸쳐 진행되는 시가 정말 많다. 시집과 문예지에 산문시도 넘쳐난다. 글자가 십수 행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이들 시는 대체로 난해하다.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시를 보면 한편으로는 경외감이 들

꽃다발은 침묵시위 중 김금용하트 모양의 꽃다발을 풀어보면 철삿줄로 팔다리 묶인 꽃들이전족한 여인처럼 뒤뚱거리며 안긴다가지마다 상처가 처연하다위안부 할머니들의 청춘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수십 번 지나가도 뿌리 없는 허화로 멈춰 있다오물투성이 묻힌 삶 씻어버리게 해달라고비 내리는 오늘 아침에도꿈의 뿌리를 잘라낸 이웃 나라 대사관 앞에서침묵시위 중이다―『물의 시간이 온다』(현대시학사, 2023)에서 7월 26일에도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부근에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가 열렸다. 1606차 모임이다. 이 문

엄마 향기권숙월엄마~ 봄 햇살 같은 말, 여섯 살까지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뒤로는 아니다 남편 잃고 두 아이만 보고 살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였을까 어린 자식 남겨두고 남의 아내가 된 엄마, 속으로 미워하며 원망을 키웠다 어느 날 밤, 기별 없이 찾아왔을 때도 싫다며 달아났다 청년이 되어서야 엄마 마음 알았지만 표현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새로 이룬 가정에서 네 아이 시집 장가 다 보내고 남편까지 하늘나라 보낸 뒤 누나에게 얹혀 말년을 산 엄마, 오십 년 가까이 홀로 띠를 덮고 누운 전 남편 생각에 얼마나 아팠을까 마을 앞산으로 두

부생박제천아침에 돋았다가 저녁에 스러지는 버섯은 한 달이 얼마나 긴지를 모르고 여름에 나타났다가 가을에 사라지는 매미는 일 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합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금방이라도 머리 위의 하늘이 무너져내릴 것 같고 땅을 내려다보면 당장이라도 발밑이 꺼질 것 같아 조바심치던 사람도 있었다 합니다 코는 크게 하고 눈은 작게 만드는 것이 나무인형을 새기는 법이고 사람보다는 도깨비를 그리는 것이 손쉽다고도 합니다 곧은 것은 곧은 그대로 뻗어가게 놓아두고 굽은 것은 굽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은 오직 천명(天命)의 일이라고도 합

엄마는 결혼을 싫어해성환희“너만 있으면 돼.”엄마는 말해요나에겐 아빠가 필요하다는 걸도무지 몰라요같이 손잡고 걸어도마음은 번번이엄마를 놓쳐요“저 남자 어때요?저 남자는 어때요?”대문 밖내가 갖고 싶은 너무 멋진 아빠들의 숲에서엄마의 대답은 나무늘보처럼 느려요―『동시발전소』(2023년 여름호)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감동을 받은 동시다. 아빠 없이 엄마 밑에서 커 가고 있는 아이의 마음이 너무나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혼을 한 것일까? 아이는 그럼 친아빠가 보고 싶을 것이다. 사별을 한 것일까? 아이는 그럼 예쁘고 젊

‘1’이 사라지지 않는 카톡이행숙엄마, 집으로 포도 시켰는데 왔어?아직...... 너도 먹지 왜 엄마한테만 보내?걱정 마, 나도 잘 먹고 있어. 울엄마 사랑해용.10월 29일 마지막 카톡 문자차가운 납골당에 너만 두고 집에 오니문 앞에 포도 상자 와 있어 끌어안고 울었지1 이번 주말에도 엄마한테 올 거지?1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엄마가 다 해 줄게1 우리 딸 보고 싶구나. 사랑한다, 내 새끼1 함박눈이 펑펑 오네. 거기도 눈이 올까?1 밥 잘 챙겨 먹고 감기도 조심하구1 오늘은 꿈에서라도 엄마한테 와 줄래? ㅡ『정형시학』(20

위로의 자리이제야위로의 방법에는 표정이 있다는데어떤 계절에도 녹슬지 않는 다정함이었다아침이 되면 더 뭉툭해진 슬픔이기를 기다렸지만아무도 가져올 수 없는 울음의 자리가 있었다어떤 표정이 위로가 될 수 있을까슬픔에게벽에 기댄 그림에 꽃을 말려둔다말라가는 시간을 지켜주는 것이 위로일 수 없지만곁이라는 자리에서 표정을 짓고 싶었던 날들위로는 안아줄 수가 없어서 녹슬지 않는다는모든 포옹을 빌려도 손이 모자란 흰 눈의 마음 같았다빈 하늘에 액자들을 걸어두자 바래지도록숨길 수 없는 슬픔들이 날아다닐 수 있는 정원이 될게어떤 계절에도 늘 뭉툭한

미스터리조항록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줄을 섰다풍경이 여러 번 달라졌고종종 두통에 시달렸다줄을 벗어나면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이탈은 꿈도 꾸지 않았다발목이 붓고 목이 말랐다다 그런 것이라며 나를 달랬다거기에 뭐가 있나요?글쎄요, 누군들 뭘 알고 줄을 섰겠어요?슬쩍 뒤돌아보면다른 사람들이 새까맣게 줄을 이었다아무것도 모르니까그런대로 견딜 만했다ㅡ『나는 참 어려운 나』(달아실, 2023)에서 이 시는 아주 날카로운 현실풍자시다. 우리 인간의 속성 중 하나인 ‘부화뇌동’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우

주막ㅡ박달재에서이기철주막은 주막이 아니라 酒幕이라 써야 제격이다그래야 장돌뱅이 선무당 미투리장수가 다 모인다그래야 등짐장수 소금쟁이 도붓장수가 그냥은 못 지나가고방갓 패랭이 짚신감발로 노둣돌에 앉아 탁주 사발을 비우고 간다그래야 요술쟁이 곡마단 전기수들이 주모와 수작 한번 걸고 간다酒幕은 으슬으슬 해가 기울어야 제격이다번지수가 없어 읍에서 오던 하가키가 대추나무 돌담에 소지처럼 끼어 있어야 제격이다잘 익은 옥수수가 수염을 바람에 휘날려야 제격이다돌무지 너머 참나무골에 여우가 캥캥 짖고누구 비손하고 남은 시루떡 조각이 당산나무 아래

헛헛한 아픔조창환안성천주교회 봉안당 한자리에, 어머니오래 쉬실 곳 마련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국밥집 문 연 데 없어 불고기집 들어갔다미국에서 온 큰누나 숟가락 들지 않고밥 생각 없다면서 숭늉만 훌쩍거렸다피곤한가 보다, 입맛 없나 보다형제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었다큰누나 미국에서 짧은 편지 보내왔다어머니 유골 봉안당에 모시던 날불고기 먹던 너희들 제정신이냐부끄럽고 민망하고 무안해진 형제들다음날 하루 단식하며 속죄했다큰누나 먼 곳에서 세상 떠났다는 소식 듣자나무라는 사람 없는 헛헛한 집안으로두텁고 텅 빈 아픔이 밀려왔다불타버려 우그러

혹서일기 박재삼잎 하나 까딱 않는삼십 몇 도의 날씨 속그늘에 앉았어도소나기가 그리운데막혔던 소식을 뚫듯매미 울음 한창이다.계곡에 발 담그고한가로운 부채질로성화같은 더위를달래는 것이 전부다.예닐곱 적 아이처럼물장구를 못 치네.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리인데이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그 바쁜 조바심 속에절벽만을 두드린다.ㅡ『내 사랑은』(영언문화사, 1985)에서 박재삼(1933～1997)의 시조집에 실려 있는 시조작품이다. 시의 끄트머리에 쓴 연도가 적혀 있다. 1981년, 시인이 40대 말에 쓴 것이다. 혹서(酷暑)는

어린이 마음 약방신준수500원 넣고 병명을 뽑으면 처방전이 나온다내가 원하는 ‘학원 스트레스 말기’ 처방전은 이미 품절이다‘외톨이 바이러스’도 품절‘질투 과다증’도 품절‘예민성 소화불량’도 품절와,나랑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애들이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ㅡ『동시 발전소』(2023년 여름호)에서 아이들이 불쌍하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뽑기 놀이를 소재로 동시를 썼는데 인형을 뽑거나 장난감을 뽑는 놀이가 아니다. 500원을 넣고 병명을 뽑으면 처방전이 나오는 상상 속의 뽑기 놀이다. 문제는 이런 병이 아이들이 잘 걸리는 병이라는 것이

무기수―코비드-19 이후정평림깜냥 없는 떠돌이별구치소가 되다니 원!위리안치 일 년쯤에기댈 곳은 지팡이뿐죄의 씨새 나갈까 봐입마저 틀어막네어느 천년 풀려날지재난 경보 귀잠 깨고알 수 없는 두려움에‘주먹 악수’ 힘을 준들너와 난우리 속 빠삐용하늘 문만 빼꼼하네ㅡ『그네 타는 뻐꾸기』(도서출판 돌길, 2023)에서 2020년과 2021년 두 해는 온 세계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코비드-19 상황이 몇 년 동안 계속 갈 줄 알았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만 총 사망자 수가 3만 5,000명을 넘어 4만 명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생일 축하한다 ―무용하는 제자 김정훈에게 이승하 자네 태어난 게 정말 기뻐이 멋진 계절에 아름다운 날에태어나 바로 울었겠지만 얼마나 화통하게 자주 웃는지사람들에게 밝은 웃음 선사하는지세상의 꽃들도 웃음 터뜨리고새들이 떼 지어 창공을 수놓는생명 약동하는 오늘이 생일이라고? 꽃으로 피어나 새처럼 나는구나 무대는 그대의 집 춤은 그대 인생이 세상이 무대요 다 관객뛰어라 굴러라 솟구쳐라 날아라이 멋진 계절에 아름다운 날에자네 태어난 게 정말 좋다ㅡ『생애를 낭송하다』(천년의시작, 2019)에서 중앙대 대학원 무용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