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성문 밖에서 만난 사람들이승하마차 타고 가는 길에 허리 굽은 노인을 보았네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절뚝거리며 걷는 노인을마부야 저 사람은 왜 머리카락이 저렇게 하얗느냐죽을 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인’이라 부릅니다마차 타고 가는 길에 다 죽어가는 병자를 보았네혼자 걷지 못해 남의 등에 업혀 가는 병자를 마부야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굴신을 못하느냐병이 들어 몸이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자’라 부릅니다마차 타고 가는 길에 시커멓게 썩어가는 망자를 보았네장작더미 위에 누워 있는 한 구의 시체를마부야 저 사람은 왜 옷

황혼 무렵이태수 어둠이 내리는 황혼 무렵느릿느릿 걷고 있는 나를 가로지르며두어 마리 새가 쏜살같이 날아간다앞산 마루엔 한가로이 떠 있는 노을이내 스러질 텐데 저리도 느릿한 건나와 보조를 맞추려 하기 때문일까어느새 젊은이 몇이 앞지르기로 가고뒷모습마저 보이지 않는다홍단풍 잎들이 가지를 붙들고 있지만언제까지 버틸는지는 가름할 수 없다황혼 무렵에는 왜 자꾸만 걸음걸이가 느려지는지 생각해본다 앞만 보고 가던 시절도 있었으나 이젠 서둘러 가고 싶은 곳도 없다가야 할 곳도 거기가 거기만 같다하늘엔 별들이 서둘러 돌아온다마을 불빛이 환하게 켜지

독종이시경 벽이나 손목에 붙어 살았다1초마다 한 번씩 우는 벌레였다원래 밥을 며칠 굶으면 말을 잘 들었다지금은 과학자들의 실험실에서 탈출하여스스로 진화하고 복제되어 통제 불능이다폭증하는 인터넷 휴대폰 공해로 변종들이 늘면서침실, 가정집 식탁까지 점령하였다시간을 먹고 사는 독종 불가사리 시퍼렇게 날선 가위로 재깍재깍 잘라먹는다홍수처럼 밀려드는 일거리들 속에서밤새 뒤척이는 밤이면 밤마다점점 커지는 살점을 뜯는 소리묵직한 가위 소리에 눌려 혼미해지거나어쩌다 늦잠 자다 버스를 놓칠라치면윙윙거리며 달려들어 온몸을 쑤셔댄다이제는 내가 가는 곳

사막거북정끝별 사막에서 물을 잃는 건 치명적인 일이다가물에 콩 나듯 사막에서 만나는 풀이나 선인장에게 병아리 눈물만큼의 물을 얻어 몸속에 모았다가 위험에 빠지면 그마저도 다 버린다살기 위해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나도 슬픔에 빠지면 몸속에 모았던 물을 다 비워낸다 쏟아내고서야 살아남았던 진화의 습관이다어떤 것은 버렸을 때만 가질 수 있고어떤 것은 비워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쏟아내고서야 단단해지는 것들의 다른 이름은?돌처럼 단단해진 두 발을 본 적이 있다피딱지가 엉겨 있었다어느 거리였을까어느 밥벌이 전쟁터였을까ㅡ『모래는 뭐래』(창비, 2

포성 밑에도 꿈은 맺나니 장호강 이슬 반짝이는풀밭을 사뿐히 밟고관측호(OP)에 오르노라면언덕을 스치는 바람이검은 포연을 밀어가고안개가 개는 골짜구니엔청솔밭이 그림처럼 물결 친다여기낮이면 병사들의 단잠이 한창인중동부전선ㅡ동백꽃 피는 마을ㅡ어여쁜 처녀의 미소ㅡ갈매기 춤추는 바닷가포성 밑에도 꿈은 맺나니 옛 추억을 더듬는 이 순간일랑아예 그들로부터 뺏지 말라.뫼 아래를 굽어보라아담했던 마을 간 곳 없고불탄 감나무 그루들만이하늘을 이고 포연 속에 서 있다샛별인 양 어린 병사들의푸른 행복을 누가 앗아갔는가젊은 희망을 누가 꺾으려는가이를 악물

자가용 버스강수성아빠 따라 할머니 뵙고 오는 밤이었다,그 기회에 택시 한 번 탔으면 싶었는데버스를 기다리는 아빨 야속하게 여겼다. 한참 있어 도착한 버스 올라타고 둘러보니다른 승객은 없고 단 둘뿐, 아빠와 나늦은 밤 에어컨으로 버스 안도 시원했다.버스는 정류장마다 서는 둥 마는 둥드디어 종점에서 내릴 때까지승객은 역시 아빠와 나,……자가용 버스였다!ㅡ『우주의 한쪽 풍경』(아동문예, 2020)에서 아이는 몹시 피곤했을 것이다. 버스는 자주 오지도 않는다. 버스 종점 근처에 집이 있다면 도시 외곽, 즉 변두리일 것이다. 아이는

후네끼고 엉기난다이종문불쑥불쑥 돋는 니가 무슨 독초인 줄 알고봄마다 새순 날 때 돋는 족족 꺾어낸 뒤큰 돌로 내리눌러도 돌 비집고 올라왔제내 아무리 꺾어내도 니 우지끈 다시 솟아정말로 도분이 났다, 후네낐다, 엉기났다그런데 내 알고 보니 니가 땅두릅이었네땅두릅아, 땅두릅아, 니 그동안 억울했제서러웠제, 분노했제, 땅을 치며, 통곡했제참말로 도분이 났제, 후네낐제, 엉기났제알아주니 고맙다만 니카 상종 안 할란다기를 쓰고 올라가면 꺾어 먹고 꺾어 먹고정말로 도분이 난다, 후네끼고, 엉기난다ㅡ『내 마음 좀 알아도고』(시인동네, 2023)

철학의 계보 이승하 소크라테스―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너 자신은 몰라도 되지만 욕심을 제발 좀 버려라.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상국가를 만들려면 법을 우습게 여기는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플라톤의 제자 에우독소스―별과 달을 보라. 1년은 365일과 1일의 1/4로 이루어져 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시는 사물을 모방하는 제2의 창조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더―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칼이 할 수 있다.암루 벤 알 아스―나는 누구의 제자도 아니고 알라의 메신저 마호메트의

로제타석 강기원 나는 입술이 없습니다고막이 없습니다눈동자도 없습니다가진 거라곤벌거벗은 가슴뿐입니다희지도 않습니다부드럽지도 않습니다구멍 숭숭 뚫린, 검은번뇌의 가슴, 이래도 좋으시다면제 위에당신의 비밀을 적으십시오불에 달군 칼끝으로한 자 한 자 새기십시오해면 같은 가슴 속에서피는 흐르지 않고점점이 고입니다어둠 속에 하나 둘 별이 돋듯돋을새김의 상형문자끝없는 당신의 긴 문장이 끝난 후함부로 버려주십시오쓸쓸한 돌밭이나 강어귀, 절벽 아래, 눅눅한 시장통, 공동묘지……어디든 상관없습니다상처가 깊을수록 간곡히 새겨지는비문(祕文), 비문(非文

방음벽정하선 천 개의 귀가 있어도 입이 없는 저 사람 소형차의 아양 떠는 목소리도 고급 승용차의 거드름 피우는 헛기침도 낡은 트럭의 고달픈 하소연도 대형 트레일러의 우락부락한 굉음도 귀 세워 듣기만 하고 입 다물고 있다 불평은 물론 맞장구칠 줄도 모른다 격려의 말도 칭찬의 말도 할 줄 모른다 인색하다고 할 정도로 무표정하다 얼굴 표정이 없는 친구가 든 화투패처럼 속을 읽을 수 없다 매연 같은 말들 다 가슴에 담아두고 감추어두고 근질근질한 입을 허공으로 틀어막고 있다사람의 귀는 두 개밖에 없어도 화의 뿌리가 입으로 뻗어 자라나 톱이나

# 환승역 허정애세렝게티 초원으로 가는 집결지마라강을 건너는 수천수만의 누 떼들강안(江岸)에서 뒤섞인다, 요동친다.거센 물살에 붙들려, 굶주린 악어에 휩쓸려죽어가는 것들과벼랑을 오르려 사투를 벌이는, 진창에서 짓밟고 짓밟히는살아남은 것들이고통을 축으로 영원회귀하는ㅡ『포레의 비가를 듣는 밤』(예술가, 2023)에서허정애 시인 덕분에 수많은 누(gnu)가 아프리카 케냐에 있는 마라강을 건너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강을 건너기 위해 강언덕에서 누 떼가 뒤섞이고 요통친다. 거센 물살에 붙들려 죽어가는 누가 있고 굶주린 악어에게 휩쓸려

희망 김규동일정 때두만강변 회령경찰서 취조실에서 흘러나오던그 사나이 비명은어째서 아직도 내 가슴에못처럼 박혀 있는지6·25 때한강을 헤엄쳐 건너온백골부대의 한 병사가담배 한 대를 멋있게 피우던 일은어째서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있는지지난날38선을 넘을 때안내꾼에게 준 할아버지의 회중시계는아직도 시간을 가리키고 있는지해체된 풍경 속에잃어버린 것은스승과 눈물과 후회뿐인 줄 알았더니추락하여 가는 내면의 눈에번개같이 스치는 것은깨끗한 한 개의 희망이다스산한 나뭇가지에빛의 다른 한쪽이 머무는 것을 보고무서운 경이를 느낀다그것은 내일을 향한

중랑천 모래톱양재홍큰물 지기 전중랑천 모래톱을싸악 싹 긁어내는 굴삭기저 멀리서 바라보는청둥오리 원앙 민물가마우지 왜가리 황새…….볕에 날개 말리던 자린데달콤하게 낮잠 자던 자린데이러쿵저러쿵 깔깔대던 자린데캄캄 하늘에 별을 찾던 자린데혼자 또옥 떨어져 외로워하던 자린데아, 멀리 간 친구들 떠올리던 자린데…….저마다 생각에 빠진 중랑천 식구들.수학 영어만 빼곡한학원 시간표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ㅡ『학산문학』(2023년 여름호)에서 동시의 세계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생태환경의 파괴 현장을 다루었기에 눈길을 끌어당겼다. 중랑천

흰발농게 프러포즈김남미그대 나 좋아하니? 큰 집게발 흔들어봐스피드와 세미돔은 결혼 조건 일순위지구애의 춤을 추어봐, 매의 눈으로 봐줄게자유의 영혼들은 짝짓기를 안 한다지DNA 변형시대 이기적인 종족번식결혼은 선택이라지, 필수는 아니라고한 집 건너 한 집은 핵가족 인구 쇼크개발과 보존 사이 갈등 또한 충돌하고비상등 멸종위기에 깜박깜박 숨 가쁘다ㅡ『정형시학』(2023년 봄호)에서 흰발농게는 절지동물로 수컷의 하얗고 큰 집게발이 특징적이다. '흰발농게'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연유했다. 생김새는 농게와 비슷하나 몸 너비

그대의 무릎 아래이승하노량진 수산시장 다리 없는 행상은비 오나 눈 내리나 어김없이 출근하여두 팔로 기어다닌다 진흙길을 눈길을노래는 구성지다 반복되는 트로트하반신 까만 비닐 상반신 면티 하나그대의 무릎 아래는 아무것도 없지만자국을 남긴다 중력 없이 자국을흔적을 남긴다 통증 없이 흔적을몸으로 살아왔구나 온몸으로 기면서ㅡ『생애를 낭송하다』(천년의시작, 2019)에서 손님 대접을 하러 회를 뜨러 간 그 시장에서 하반신이 없는 장애를 갖고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분을 간혹 뵙곤 하였다. 걸을 수 없는 몸, 수산시장에 온 수많은 사람의 발

신의 정원에서 4ㅡ꽃 바칠래박용재꽃 바칠래 꽃 바칠래오월 봄날 그대에게 꽃 바칠래지화자 지화자 꽃 바칠래불어오는 산들바람이우리 님을 위해진달래 가지마다 꽃 달아 놓았네꽃 바칠래 꽃 바칠래봄마다 그 꽃 따서 바칠래이쁘다 이쁘다 꽃 바칠래님을 맞이하는 일은 신의 정원에서꽃전 부치고 꽃술 걸러지화자 지화자 꽃 바치는 일꽃 바칠래 꽃 바칠래오월 봄날 그대에게 꽃 바칠래이쁘다 이쁘다 참꽃 따서 바칠래 ㅡ『신의 정원에서』(서정시학, 2023) 흡사 신라의 향가 「헌화가」를 연상시킨다. 신라 성덕왕 때 김순정이란 사람이 강릉 태수로 부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이주송바위 속에서나뭇잎의 잎맥인 듯 빗살무늬인 듯오래된 뼈가 걷고 있었다참빗을 닮은 한 벌의 뼈초식이었던 뿔공룡은 일억 일천만 년 동안바위 속으로 스며든 빗물이나 몇 번의 지각이 이동하는 소리로 연명했다살점과 내장과 표피를 버리고 온전한 바위가 되어마지막을 증언하고 싶었을 거다천적이 없는 단 하나의 계절 속에서 그 오랜 진화의 시간단단한 근육과 푸른 이끼의 털을 갖고 싶었을 거다그러다 광물의 구(球)속에서도 부화의 시간은 다가와화석에게도 통점이 도졌을 거다갯벌의 어패류들이 조금씩 달을 뜯어 먹는 동안공룡은 주

글루코사민 류성훈취미가 등산밖에 없던 아버지가 무릎이 아프네 무릎이 아파, 하며 읽기 어려운 이름의 연고를 무릎에 문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연고 같은 게 무슨 소용이냐고 용인에 사는 선생에게 침 맞으러 가시는 게 어떠냐고 했고 아버지는 그런 침 같은 게 무슨 소용이냐고 연고만 발랐다 대화한다는 것은 점점 더 공감에서 멀어진다는 뜻이었고 공감하기 위해선 말을 끝내야 할 때가 있었고 그런 끝은 점점 늘어만 갔다 아버지보다 먼저 반월상연골을 해먹었던 아들의 말이 미덥지 않겠지만 평생 남의 말 들은 적 없이 모든 걸 지키려다 눈도 귀도

언어, 그 배신이봉래아침마다몇 개 안 되는 넥타이를골라 매듯오늘은무슨 말을 골라한 편의 시를 쓸까손끝의 습진처럼견딜 수 없는가려움으로너는나의 속에 연신 퍼지건만나는너의 끈질긴 미끄러움으로너를골라 잡을 수가 없다너의 끈질긴 미끄러움이나를 노상네 앞에서넘어지게 한다살갗에서축축한 소금기를 끌어내듯네 안에서 올을 뽑아한 편의 시를짜내어도너는 역시연기처럼 풀어진다나는 온종일 너의 뒤에서모래처럼 무너진다밤마다 옷을 벗고잠자리에 들어가듯오늘은 진정너를 벗고훨훨 너를 벗고깊은 잠에 빠질 거다ㅡ『역광의 神』(서문당, 1982)에서 이봉래(1

미역국서관호미역국!누구 생일?선물도 못 샀는데엄마가 나를 낳고행복했던 그 미역국이따금 먹고 싶단다그날이고 싶어서.ㅡ『될성부른 나무들』(어린이시조나라, 2023)에서 외국에서는 산모가 아기를 낳은 뒤에 미역국을 먹는 풍습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아기를 갓 출산한 산모에게는 미역국을 따뜻하게 끓여 먹게 해 기운을 차리게 하였다. 미역만 끓이는 것이 아니라 영양보충이 되게 쇠고기를 함께 넣었다. 전복이나 황태를 넣고 끓여도 맛있다. 이 작품은 동시조인데 동시조 쓰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서관호 시인의 여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