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시드 폴, 「나의 하류를 지나」
(1) 루시드 폴, 「나의 하류를 지나」
  • 김병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1.27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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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배처럼 흔들리며

노랗게 곪아 흐르는 시간

어떻게 세월을 거슬러

어떻게 산으로 돌아갈까

너는 너의 고향으로 가네.....

나의 하류를 지나

-루시드 폴 『나의 하류를 지나』 2절

 

‘곪는다’는 말을 입으로 되뇌본다. 시나브로 곪아가는 화농을 생각한다. 마음속에 생긴 상처에는 소독약을 바를 수 없다. 세균이 들어가지 않지만, 그래서 더 아프다. 그렇기에 아픔을 참고 노래하는 자세는 모두 아름답다. '곪는다'는 말을 이토록 아름답게 골라쓴 모국어 가사를 나는 알지 못한다. 

루시드 폴의 노래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 밑에서 감정들이 지느러미를 바르르 떨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분명 그 사람들은 저 가사와 같은 상처를 겪어본 사람들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 가사는 그런 이들에게 더 깊게 스며든다. 단순히 상처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처가 번지는 시간을 빌려서 자신의 상처를 남의 가슴에 번지게 만든다. 자신의 상처를 깊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 곡은 섬세하도록 가슴 아프다.

삶의 시간이 앞으로 앞으로 향하는 동안, 상처의 시간은 거슬러 거슬러 올라갈 수 밖에 없다. ‘뒤로’ 가는 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상처는 우리에게 어떤 근원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엄마든, 고향이든 그 무엇이든.

하나의 상처는 하나의 죽음에 대한 간결한 징표이기에,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린아이가 된다. 상처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없다. 흔들리지 않는 척하거나, 흔들릴수록 내가 더 흔들린다는 마음가짐이 그런 자세를 속일 뿐이다. 상처를 입은 사슴이 숲으로 달아날 때 마지막으로 숲 저쪽을 바라보던 눈동자. 그 눈동자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때때로 그런 역설 앞에서 말을 잇지 못하곤 한다.

루시드 폴의 1집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안에 같이 녹음된 공기를 듣는다는 기분으로 들을 때가 많다. 그 공기가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머릿 속을 채우면, 나는 가끔 문학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단지 글자들의 조합,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에서 어쩜 그리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지! 나는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읽는 기분으로 이 앨범의 ‘공기’를 듣곤 한다. 지금 이 순간은 아르페지오니, 나일론 기타 같은 표현들, 스위스 박사니 하는 표현은 너저분한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평론가인 신형철의 말마따나, “이미지가 울리기 전에, 이야기가 설득되기 전에, 메시지가 가르치기 전에, 이미 그들의 발성 자체가 독자적인 힘을 갖게 되곤 하는 것이다.”(『몰락의 에티카』에서)

때때로 나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서로의 목소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처구니없는 가정이라도 쉽사리 지울 수 없는 생각이다. 그 목소리로 인해 자신의 삶이 송두리채 바뀌길 기대한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너는 너의 고향으로’ 간다. 그것도 하필 ‘나의 하류를 지나’서 말이다. 왜 하필 거기고 왜 하필 나란 말인가. 부드럽게만 보이던 이 곡의 가시는 끝끝내 그렇게 드러나고야 만다. 기타와 목소리와 공기만이 가능한 고백의 목소리다. 아무런 치장도 수사도 없는 그 고백.  

당신을 더 듣기 위하여, 내가 점점 사라져야한다는 역설 앞에서 나는 꼬리 만 강아지처럼 끙끙거리곤 한다. 겨울바다는 아직 시리도록 차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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