빤스는 입고 다니자 - 악스트 그리고 듀나
빤스는 입고 다니자 - 악스트 그리고 듀나
  • DCDC 소설가
  • 승인 2016.02.06 20:22
  • 댓글 0
  • 조회수 5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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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배트맨: 리턴즈>에는 가면무도회가 나온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도시의 유명인사들이 한데 모여 무도회를 즐기는 고상한 순간에 연주되는 음악은 릭 제임스의 Super Freak 편곡 버전이다. 정말이지 팀 버튼다운 선곡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단 두 명, 가면을 쓰지 않은 사람이 나온다. 한 명은 배트맨이라는 정체를 숨긴 대부호 브루스 웨인이고 다른 한 명은 캣우먼이라는 정체를 숨긴 셀리나 카일이다.

이 아름다운 장면에 가상의 상황을 추가해보면 어떨까. 갑자기 주정뱅이가 나타나 무도회를 즐기는 사람들의 가면을 쥐어뜯으면서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 정체를 숨긴 거짓말쟁이에 위선자라면서 비난하다 열이 올라 바지를 내리고 빤쓰를 벗는 모습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비슷한 일이 있어서 그렇다. 잡지 악스트에 실린 듀나와의 인터뷰다. 여기서 주정뱅이 역을 맡은 사람은 인터뷰어 백가흠이다. 백가흠은 인터뷰 내내 악스트 지면을 통해 듀나가 정체를 밝히기를 요구했다. 숨어서 글을 쓰는게 외롭지 않느냐, 나를 알지 않느냐, 전략을 바꿀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 익명으로 활동하는 일은 식상해진 것도 사실이지 않느냐 따위의 질문 뿐이었다. 도대체 빤쓰를 몇 장이나 입고 다니는지 벗고 벗고 또 벗고 숫제 꽁트 같은 인터뷰였다.

가면무도회에는 간단한 룰이 있다.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는 것이다. 굳이 긴 문장으로 풀어쓰기도 민망한 이 룰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무엇도 아니다. 단지 이 무도회라는 놀이를 즐기기 위해 더해진 약간의 조미료일 뿐이다. 그리고 그 가면 너머를 엿보려 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위선자나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구태여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이 촌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백가흠은 계속해서 듀나가 익명성의 가면을 벗기를 요구한다. '포장되지 않은 진실한 이유'를 찾고 싶다는 핑계도 있다. 하지만 진실을, 본질을 추구한다는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흔히 접하는 당혹감을 이 인터뷰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내면 속에 숨겨진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데 그 본인의 내면이 너무나 얕고 애써 찾아낸 무언가도 참으로 보잘 것 없을 때 받는 그런 당혹감 말이다.

백가흠이 듀나에게 기대하는 '포장되지 않은 진실함'은 고작 "너(혹은 너희들) 결혼은 했냐?"나 "너 어디서 나 본 적이 있지 않냐?"다. 누군가의 삶과 철학에 대해 깊이 있는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질문자의 삶과 철학의 깊이가 빗물 고인 웅덩이쯤 되리라는 짐작말고는 얻을 것이 없다.

여기에 인터뷰이에 대한 존중없는 태도마저 더해지면 이 인터뷰를 시작한 목적조차 의심이 든다. 인터뷰이의 소설에 대해 '시대감이 읽히질 않는다'거나 '작가에게는 사회적 철학적 책무와 당위가 존재하는데 당신이 소설만으로 이를 확보 못하면 실패한 작가 아니냐'고 따지질 않나 '소설보다 익명인 점이 유명하다'거나 '20년 전 당신을 읽는 독자는 이미 다 떠나지 않았겠느냐'라며 시비조로 사실관계를 떠나 단정짓기를 반복한다.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이상한 전제를 서로 공유하고 있지 않느냐며 따져 묻는 그 태도는 제법 친숙한 풍경이다. 택시를 잘못 잡아서 끊임없이 손님에게 질척거리는 택시기사를 만나거나 혹은 지하철에서 인사불성의 취객에게 걸려 꼰대질을 당할 때 보던 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판사 노릇을 하려는 사람들의 속내에는 언제나 '네가 어딜 감히 이 자리에 앉아 있느냐'라는 질시가 있었다.

가면무도회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진실과 거짓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오는 아찔한 긴장감은 매혹적이기 그지없는 일이다. 무언가에 가치가 생기는 것은 그 무언가를 가리는 장막이 쳐지는 순간이다. 바로 그 순간 비밀이 생겨나고 매력이 차오른다.

오해하지는 말자. 듀나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듀나 본인의 말대로 익명으로 활동하는 것은 대단한 일도 신선한 일도 아니다. 듀나는 "듀나의 정체는 무엇인가?"같은 지루한 질문이 필요할 정도로 따분한 사람도 아니다.

문제는 백가흠의 태도다. 익명성이라는 테마에 대해 저차원적인 이해만 갖고 저 가면을 벗겨버려야만 진실한 무엇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간절한 기도가 낯부끄럽다. 가면무도회의 기본적인 룰도 이해하지 못하고, 가면무도회의 본질은 가면 뒤가 아닌 가면 자체에 있음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저 가면만 벗기면 어떤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는 그 절실함이 쪽팔린 것이다.

솔직한 사람은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솔직하겠다며 빤쓰를 벗고 고추를 덜렁거리는 사람은 솔직한 사람도 용기가 있는 사람도 아니라 그냥 이상한 사람이다. 더욱이 이 상황을 즐기는 눈치까지 보이면 보는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뿐이다. 물론 빤쓰를 벗고 다니는 것이 성적 취향이라면 이는 개인의 자유이지만 이래야만 진솔한 것이라 주창하면서 다른 사람 빤쓰마저 벗기려고 들면 주변에서 말릴 필요가 있겠다.

<배트맨 리턴즈>로 돌아가보자. 이걸 진짜 내 입으로 직접 말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민망한 해설을 덧붙이기 위해서다. 가면무도회에서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사람이 브루스 웨인과 셀리나 카일, 단 둘이라는 것은 분명 상징적인 일이다. 이 둘의 본질은 가면을 벗은 실제의 그들이 아닌 가면을 쓰고 밤하늘을 누비는 그 순간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면을 쓰지 않고서도 가면무도회의 주빈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이런 고리타분한 해석을 되풀이 하는 이유는 하나다. 이는 가면만이 아닌 빤쓰에도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당신이 빤쓰를 벗고 다녀도 우리는 그 모습에서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찾지 못한다. 그저 전라의 중년남만 보일 뿐이다. 어지간히 매니악한 취향이 아니고서는 반갑기 어려운 풍경이다. 새해에는 밝고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기를 빈다.

 

DCDC

영화배우 김꽃비의 팬. SF 소설가. 장편 <무안만용 가르바니온>, 단편집 <대통령 항문에 사보타지> 출간. 제 2회 SF어워드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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