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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비평의 위기, 정말 비평가들의 게으름 때문일까?
김상훈 기자 | 승인 2017.10.05 16:25
제작= 한송희 에디터

[뉴스페이퍼 = 김상훈 기자] 지난 9월 22일 사단법인 문학실험실이 주최한 '제3회 문학실험실 포럼'의 주제는 "문학 비평의 반성"이었다. 포럼에서 홍정선 문학평론가는 비평의 위기가 출판 제도와 관행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들의 안일한 작품 읽기에서 왔다고 진단하고, 특히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할 때 싣는 작품론이 비평의 위기를 자초하는 주범이라고 이야기했다.

홍정선 평론가는 “작가나 출판사의 청탁에 따라 썼기 때문에, 혹은 그야말로 작가와의 ‘인간적’ 관계 때문에 작품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없었다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그 같은 변명이 상쇄할 수 없는 수많은 문제가 현재의 작품론 속에는 들어 있다.”며 작품론 속 잘못된 비평을 열거했다.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나 의미 부여도 하지 않는 비평, 해외 석학의 글 인용을 지나치게 남용한 비평,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작품에 과도하게 덮어씌우는 비평 등등. 구체적인 예시를 보여준 홍정선 평론가는 “최근의 비평은 작품 읽기를 소홀히 하고 있다.”며 비평가들이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고 평론을 써댄 탓에 비평의 위기가 왔다고 일침을 가한다.

구체적인 비평문을 예시로 들며 ‘잘못된 비평’이라고 지적하는 홍정선 평론가의 말은 작품론을 읽으며 느꼈던, 어떤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는 듯 하지만 이내 의문이 생겨난다. 정말 비평가들이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고 평론을 써댔단 말인가?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비평문이 평론가의 게으름의 결과물이라면 평론가의 게으름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평론가의 게으름’이라는 것이 어떤 ‘상냥함’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상냥함’을 홍정선 평론가의 발표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홍정선 평론가의 발표문에는 세 개의 비평문이 수록됐는데 각각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나 의미 부여도 하지 않은 비평, 해외 석학의 글을 지나치게 인용, 남용한 비평,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작품에 과도하게 덮어씌우는 비평이라고 지적받았다. 그러나 이 ‘잘못된 비평문’은 모두 비평가의 이름과 출전을 알 수가 없다.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는 비평가들의 글에서 뽑아야 이 글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비평문을 인용하면서도 정작 그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는 비평가’가 누구이며 어떤 작품을 대상으로 평론을 썼고 어디에 발표했는지 나와 있지 않다. 

홍정선 평론가는 이에 대해 “의도적으로 고른 것이 아니라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았다는 미안함 때문에 출전은 밝히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이 사소해 보이는 ‘미안함’이 발표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말았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누군가’를 부르지 않는다면, 지적은 향상심을 갖고 있는 후발주자들에게는 아주 좋은 사례들이 되겠지만, 현장에서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부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 ‘상당한 수준을 자랑하는 비평가’는 똑같은 잘못을 반복할 것이고, ‘제대로 읽으라’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 이름 없는 지적은 허공에 휘두를 뿐인 회초리 같다. 후발주자는 이러한 지적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저렇게 쓰지 않겠다? 혹은 저렇게 써도 아무 문제없겠구나?
잘못된 비평을 지적하는 당연한 일에서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일어서는 그 미안함은 일종의 상냥함이다. 그리고 그 상냥함은 문학계에 만연해 있기도 하다. 나는 문학권력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데, ‘권력’은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비밀 의회 같은 곳에서 한국의 문학 시스템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결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실제로 ‘문학권력’의 형성은 아주 사소한 인간적인 관계에서 왔다. 조금 더 친한 문인에게 청탁을 하고, 조금 더 친한 문인의 책을 출판하고, 친한 문인의 글에 상냥한 비평을 하고, 친한 문인에게 문학상을 주고.

나는 비평가들을 생산하는 시스템이 호락호락한 것이라고 보지 않고, 그들이 태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게으른 비평을 썼다면, 그들을 게으르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술자리에서 만들어낸 끈끈한 유대가 청탁, 출판, 수상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간적 관계’와 공적 영역의 혼동 아닌가?

앞서 홍정선 평론가는 “작가나 출판사의 청탁에 따라 썼기 때문에, 혹은 그야말로 작가와의 ‘인간적’ 관계 때문에 작품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올바른 평가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변명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글에 ‘인간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미안함’이 관여됐고 이로 인해 발표의 의미가 퇴색됐다는 것은, 각 개별 평론가의 노력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비평의 위기를 초래한) 이유를 일부 젊은 비평가들은 새로운 목소리를 수용하는 공적인 장의 부재와 젊은 비평가들을 착취하는 출판 제도와 관행에서 찾고 있다. 일견 타당성을 지닌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책임의 소재를 외부로 돌리는 비겁한 이야기이다.”

나에게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혼동하여 생기는 문학계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아무 이유 없이 게을러질 수는 없는 법이다.

김상훈 기자  ksh@news-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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