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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기획칼럼] 제1부 1장 미당 서정주 그는 을마나 진실한 시인이었나제 1부, 병든 시인과 괴물 엘리트들의 세계현실
김상천 문예비평가 | 승인 2017.10.06 17:42


[뉴스페이퍼 = 김상천 문예비평가] 노예도덕을 비판하고 주인도덕을 세우려 했던 도덕의 혁명가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연암서가)에서 말했다 "예술가들은 어느 시대든 도덕이나 철학 또는 종교의 시종侍從이었다." 시종은 노예다.

나는 오늘, 이런 니체의 인식은 극복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즉 그는 지나치게 래디칼한 데가 있지만 역으로 그만큼 현실을 정확하게 읽어 낸 사상가도 없으리라고 본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전체주의의 유령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오늘,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을 진실하게 읽어내는데 매우 유용한 개념의 막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2017년 9월 16일) 중앙일보 '책 속으로' 난을 보고 나는 내 눈을 다시 씻어야 했다. 거기, 이미 문학사적으로 평가가 내려진 시인 서정주를 찬양하는 시종의 기사(이영광, '미당 없는 문학사 상상하기 어려워...미학적 성취, 삶의 흠결 함께 봐야)가 전면을 도배하다시피 내 눈을 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배려는 우선, 최근 그의 전집의 완간에 따른 소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기는 하다. 미당이 누구인가. 가히 시인부락의 족장이라 일컫던 시 마당의 어른이 아닌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배치는 권력이라는 푸코의 말도 있거니와, 같은 날 유홍준의 '답사기' 신간은 접은 손수건만 하게 배치한 거와 비교해 보먼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서정주, 그는 이미 친일시인으로 반민특위와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역사적’ 단죄가 내려진 시인이다. 하나의 적폐積幣, 그러니까 쓰레기더미처럼 쌓이고 쌓인 사회역사적 폐단으로서 이런 시인을 단죄하고 청산해야 할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바치는 과분한 수사와 배려는 단순한 복권 의지를 넘어 공모conspiracy 혐의를 느끼게 한다. 더구나 이런 시인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한 문학상까지 내걸고 있으니...

나는 여기서 문예비평가로서 미당이 ‘과잉결정된over-determined’ 신화임을 지적하고 이에 대한 탈신화화작업을 해야 함을 느낀다. 무엇보다 그가 시인부락의 ‘족장’이라기에 하는 말이다. 시인부락은 머 그렇다 치자. 그가 시인이었음에는 틀림이 없고, 또 실제로 [시인부락]이라는 문예지를 창간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부락’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기호로, 한국시단을 대표한다는 상징을 지니고 있다. 그가 이승만 정부수립과 동시에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지냈고, 박정희 시절 한국문인협회장에, 전두환 시절에는 범세계한국예술인회 이사장 등 시단뿐만 아니라 한국 문단의 요직을 두루 맡았으니 그에게는 잘 어울리는 워딩이다. 그러니 그에게 ‘족장’이라는 말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what matters,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그가 과연, 아니 그는 진정으로 시인부락의 족장이 될 만한 퀄리티를 갖추고 있었느냐 라는 것이다. 한 인간의, 그것도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사람의 자질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첫째, 인간적 자질과 둘째, 도구적 자질을 톺아보아야 한다. 

인간적 자질부터 보자. 인간적 자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격적’ 요소다. 인격의 핵심은 사회적 신뢰이고, 이런 신뢰에 기반한 행위의 정당성이 평가의 핵심이다. 즉 도덕성은 인간적 자질의 본질이다. 다시 말해, 도덕성이란 그 새끼를 믿을 수 있느냐를 말한다. 시인의 사회적 행위는 시작이니, 시를 통해 보자. 미당 서정주(1915~2000), 그는 약관의 나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덜컥 당선되었다. 익히 알다시피, 동아일보는 전라도 고창의 대지주 김성수가 창간(1920)한 신문이다. 이 김성수의 마름으로 소작인들을 못 살게 군 사람이 서정주의 아버지, 서광한 씨다. 즉 그는 정실로, 한국적 인간관계로 문단에 데뷔한 것이니 이건 벌써 정당한 게임이라고 볼 수 없다. 어쨌거나 그의 등단작, ‘벽壁(동아일보, 1936년)’을 보자.         

덧없이 바래보든 벽에 지치어
불과 시계를 나란이 죽이고

어제도 내일도 오늘도 아닌
여기도 저기도 거기도 아닌

꺼져드는 어둠 속 반딧불처럼 까물거려
정지한 '나'의
'나'의 서름은 벙어리처럼........

이제 진달래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
벽 차고 나가 목메어 울리라! 벙어리처럼,
오- 벽아,

여기, ‘벽’이라는 시적 이미지는 벙어리인 시적 화자가 차고 나가 울어야 할 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를 시대상으로 본다면 일제 강도가 곧 벽일 것이요, 당시의 사회상으로 본다면 주종관계가 온전하게 유지되고 있던 봉건 유습이 곧 벽일 것이다. 요즘말로 치자면 ‘갑을’ 관계다. 이 시를 사회역사적 상상력으로 읽는다면 이건 분명 민족문제, 계급문제에 대한 암시에 다름 아니다. 어떤가. 과연 대단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어떤 전조를 본다. 전조라니...‘전조前兆’는 어떤 것이 미리 보인다는 말이다. 니체식으로 말해서 나는 여기서 ‘노예도덕’을 본다. 잘 보아야 한다. 시는 미인처럼 매끄러운 수사로 되어 있는가 하면, 시는 또한 가면처럼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으니. 여기, 벽은 깨트려야 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이로 인해 화자는 지치고 정지해 있는 상태다. 화자가 벽을 차고 나가 목메어 우는 행동의 시점은 ‘진달래꽃 벼랑 햇볕에 붉게 타오르는 봄날이 오면’이라고 시적 화자는 분명 ‘오면’이라고 했다. 이건, 하나의 가정이자 조건이다. 다시 말해 ‘봄날’이라는 좋은 시절이 오면 그때 가서야 민족문제, 계급문제에 뛰어든다는 거지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참 이건, 너무나 어이없는 시적 가정이 아닐 수 없다. 막말로 해서 좋은 시절이 오면 무슨 민족문제, 계급문제가 필요하겠는가. 이미 다 해결되어진 것을...이건 그야말로 기회주의자의 전형적인 멘탈리티가 아닐 수 없다. 

서정주(일본식 이름; 다츠시로 시즈오)가 기회주의자였다니...과연 그랬을까.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 천 길의 바다런가.

아아 레이테만은
여기서 몇 만 리련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 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들이
그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띄우고
“ 갔다가 오겠습니다 ”
웃으며 가더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더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 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 공격 대원.
귀국 대원.

귀국 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어 벌이는 고운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 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이 어데런가.
몇 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여기서도, 역력히 들려오는
아득한 파도소리……
레이테만의 파도소리……                          

                             -서정주, ‘마쓰이 오장 송가’, 매일신보 1944. 12. 9.

그 유명한 ‘마쓰이 오장 송가’다. 송가는 곧 찬가 아닌가. 즉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카미카제와 그 피해자인 조선인을 대놓고 미화하고 있다. 친일을 넘어서 반인권 범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가 하나의 시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이런 시적 행위가 갖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다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전쟁범죄로서의 전체주의 선전에 동원된 불행한 시인의 운명은 약소국의 시인으로서 불가피했다 치더라도 시인의 이런 행위가 범죄보다 더 위험한 것은 교화에 개의치 않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은근한 간접 위협’(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한길사)이라는 사실이다. 즉 문학이 하나의 사회적 공기이자 꿈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이렇게 권력의 시종으로, 노예로, 선전도구로 전락하였을 때 우리가 현실에서 맛보게 되는 것은 결국 “너는 왜 저 오장 마쓰이처럼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지 않느냐” 라고 하는 위협이 일상의 공기가 되어 자유를 위협한다는 점이다. 더 더욱 우리를 아연 놀라게 하고 잔인하게 만들고 마는 것은 마치 여신과도 같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지닌 시를 통해 ‘아우야’하고 동포애적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국민대중들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2장 이어서 

 

김상천 작가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소명출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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