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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기획칼럼] 미당 서정주 논란 제2부 2장,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은 과연 별개인가
김상천 문예비평가 | 승인 2017.10.24 16:07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시인 김수영...

한국시단의 거칠 것 없는 야생사자 같았던 그... 그는 과연 사자였다. 그는 한 마리 토끼라도 최선을 다해 질주할 줄 아는 시의 바람이었다. 일상과 시는 그에게로 와서 한 ‘몸’이 되었다. 그는 또한 양심의 사제였다. 그리하여 여기,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보자. 그러면 우리는 예의 그 청교도적인 자세로 자신을 심하게 채찍질하고 있는 그를 본다. 자신이 점점 소시민이, 프티 부르주아가 되어가고 있다고 자학하고... 자신이 점점 옹졸하게 소심해지고 있다고 반성하고...또 자신이 좀스런 이기심에 젖어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고 자신을 극단으로 내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자신을 치열하게 반성하고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지만 기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채찍에 더 가깝다. 그러니 이건 참 아이러니 아닌가. 그리하여 여기,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

하는 대목은 통쾌한 자유 펀치에 다름 아니다. 비록 저 왕궁 대신에, 저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마는 소시민이 되었지만, 그리하여 한번 정정당당하게 부당하고 비민주적인 환경에 저항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소시민적인 태도로 분개하고, 증오하고, 반항할 뿐이지만, 또한 그러한 태도가 부당하고 비민주적인 권력을, 저 왕궁을, 저 왕궁의 음탕을 유지시켜주는 분위기에 알게 모르게 일조하는 줄을 알지만...다시 말해 그 역시 소극적인 성찰에 그치고 자기연민이나 탄식, 불평에 머물고 말지만...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지만...

탁류가 하수도처럼 역류하던 60년대,

그는 이렇게 소시민 의식을 지닌 시인이었다. 그러나 비록 소시민의식을 지닌 미소한 시인이었지만, 거리의 투사는 아니었지만 그는 시적 정의poetic justice로서의 양심을 지닌 시인이었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해 시를 쓴다는 것은 언어의 윤리 이전에 가치와의 일대 격투를 벌이는 일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줬다는데 큰 가치가 있다. 나는 그렇게 본다. 

김수영을 보라, 시를 쓴다는 것은 가치와의 일대 격투를 벌이는 일이다

자, 보라. 그러니 어찌 생애와 작품을 뚝 떼어서 볼 수 있단 말인가. 작품은 정신의 분비물인 것을, 생애와 작품을 뚝 떼어서 보기 시작하는, 다시 말해 작품에서 작가가 떨어져나가고 도덕의 궤도를 일탈하는 노트럴neutral한 순간, 거기 잔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오해 마라, 여기 작가가 만들어낸 창작의 고유성을 무시하자는 게 아니다- 삶을 떠난 언어의 희롱이 거기서 시작되고, 본능적으로 권력과의 유착이 거기서 새끼를 치고, 그 새끼가 죽던 말던 내 알바 아니라는 무서운 냉소가 거기서 또아리를 튼다. 

과연 그럴까. 자,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그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고 있는 ‘별개’의 논리적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문학의 자율성'이론이다. 문학은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아니하고 문학 고유의 상상력이라는 재료에 의해 창조되는 예술의 세계라는 거다. 그러니까 자율성, 고유성을 내세우는 이 문학의 논리는 '미적 근대'라 일컫는 근대 부르주아의 문학적 인식의 하나다. 

What matters, 

중요한 것은 예술가와 작품이 서로 다르다는 이러한 사고와 논리가 왜 저들에게 그렇게 금과옥조maxim 같은 명제가 되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사고와 논리가 그들의 현실적 이익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예술가와 작품이 '별개'라면 작품이 문제가 될 경우 그 문제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고, '결부'되어 있다고 보면 그 문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가. 매우 영리한 논리이지 않은가.

예술가와 작품이 별개라는 논리는 교묘한 호신책에 불과하다

좀 어려운 얘기이니,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을 통해서 보자.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저 참을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바람둥이 의사 토마스를 만나게 된다. 자, 여기 바람둥이 의사 토마스(예술가)가 그동안 수십 명의 여자들과 바람(작품)을 피우먼서 스스로 도덕의 하등 구애를 받지 않고 떳떳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별거 아니다. 그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사랑과 섹스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다. 루비나 또한 마찬가지다.

“토마스는 사랑과 성 행위는 별개의 두 세계라는 생각을 그녀에게 이해시키려고 무척 애썼다.”(165쪽) 

이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모두 말의 포로가 되기 십상이다. 여기, 사랑과 섹스에서 무한정 자유롭고 싶어하는 우리들은, 이 가벼움의 논리가 물에 불은 콩처럼 잔뜩 근대 의식이 주입된 우리들로서는 너무 그럴듯하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던지는바 그대로 가벼움lightness은 사비나처럼 끝없는 배신과 미국적 공허감만 체험하게 할 뿐이다. 토마스는 다행히 테레사를 만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즉 '시적 기억'을 지닌 그녀와의 섹스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행복의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행위임을 알게 되면서 가벼움에서 구원되기 시작한다. 즉 토마스의 구원은 사랑과 섹스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도둑씹, 번개씹에도 정이 든다”(조정래, [태백산맥])는 것처럼, 사랑과 연애는 결코 100% 분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둘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기본적으로 사실과 가치가 분리되어 있는 듯이 생각하기 쉽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정서의 밑바닥에는 기본적으로 사실과 가치는 '형태소morpheme'처럼 고정되어 있어서 인식 가능한 하나의 실체substance로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고정되어 있다고 보는 사고는 끝내 변화를, 역사를 부정하는 성채에 닿고 만다는 사실을 염두 해 보면, 변화와 발전을 두려워하는 그들의 사고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는 예측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사고는 도덕불감증을 양산하는데 기여한다. 그리하여 사랑과 섹스가 서로 다르고, 사실과 가치 또한 서로 다르다는 논리는 예술가와 작품은 서로 다르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사랑과 섹스가 서로 다르다는 논리가 비도덕적이고 사실과 가치가 서로 다르다는 논리가 비윤리적인 것처럼, 예술가와 작품은 서로 다르다는 논리 또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다.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서정주를 비롯, 김동리 등 이른바 권력의 사타구니에 붙어먹던 이들이 매우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허튼수작들을 저지르고도 아무려면 어때 하고 자신의 행위를 뭉개고 그들의 맹목적인 도제들이 이들을 추종하고 있는 바의 근거는 이렇게 비도덕적이라는 모럴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도대체가 개념이, 죄의식이 없으니 개차반이 되는 거다.

그러나 '문체는 사람Style is the man'이라는 말이 있거니와 작품과 예술가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하나의 문학 작품이 있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도구가 있어야 한다. 이 언어는 작가의식의 대체물substitution이다. 즉 언어가 하나의 대체물로서 작가 자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가를 떠나 제 홀로 있는 것은 아니다. 문체가 작가마다 제각각인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 문체 속에 깃든 사상이 또한 제각각인 소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헤겔의 말대로 철학이 시대의 딸인 것처럼, 작품은 작가가 낳은 딸인 것이다. 다시 말해 부모가 자식에 대해 부양책임을 지듯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작가적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다.

진실이 이러하거늘, 아무런 개념도 없이 ‘가벼운’ 시로써 무지몽매한 대중들을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음의 전선으로 내 몬 것은 누구요, 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라는 스트롱 맨들에게 정조를 내다 바치고 얻은 해우채로 높은 의자를 타고 앉아 호의호식하먼서, 그 돈으로 잡지를 만들고 후학들에게 술을 사먹이면서 이 땅의 예술을 흐리게 하고 문학의 강물을 오염시킨 이는 대체 그 누구란 말인가.

이 걸레 보다 못한, 아니 그의 시어로 말하자면 “떠돌이 창녀시인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 같은(‘격포우중’)” 시인에게 눈 먼 대중은 그렇다 치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문학예술계의 두 눈이 멀쩡한 지식인들이 그를 시인부락의 촌장으로 받드는 것도 모자라 그를 신전에 세우려고 하고 있으니 이들이 곧 괴물 엘리트들이 아니면 그 무엇이고 신화 공모자들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란 말인가. 

‘미당 없는 문학사 상상하기 어렵다’고...

어두운 시대라고 시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밤하늘에 별이 더 밝게 빛나듯 어두운 시대에 오히려 시인은 더 빛났다. 아니, 어두울수록 시의 은하계는 더욱 찬란했다. 백석은 무론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오장환, 임화, 이용악도 있다. 오롯하게 우리의 풍속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 시인이 있었고, 북쪽 툰드라 찬 새벽 속에서도 눈 속 깊이 꽃맹아리 옴작거려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며 시대의 어둠에 저항한 시인이 있었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참으로 고결했던 시인이 있었는가 하면,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외친 시대의 의인도 있었다.

뿐인가. 서정주와 같은 ‘시인부락’ 동인이지만 강도 일제에 굴하지 않고 병든 시대를 노래한 탁류의 시인이 있었고, 골방을 뛰쳐나와 순이를 호명한 감상적이지만 혁명적이었던 ‘네거리’의 시인이 또한 있었고, 서정적 이야기로 빚어낸 슬픈 조선의 시인도 있었다.

뭐 좋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인들이라고 치자. 그러나 어두운 시대에 어두우면 어두운대로 그것을 노래하면 될 것을... 저 동료시인 오장환 같은 탁류의 시는 왜 본받지 못하는 건지, 아니 그보다도 당신이 그렇게도 추종했다던 보들레르 발끝이라도 좀 따라잡던지, 상징주의는 어쨌거나 좌절의 산물이 아닌가. 시는 보들레르처럼 망가져야 시꽃을 피울 수 있다는데, 시는 패이승敗而勝하는 거라는데, 이런 정신이라도 좀 제대로 배워 물고 늘어졌더라면 달라졌을 것을...뱀이 꽃처럼 아름답다니, ‘화사花蛇’라니...이건 뭐 극도의 유미주의, 탐미주의 아닌가. 아니, 사실 이건 뭐 파시즘의, 죽음의 노래 아닌가. ‘원통히 물어뜯으라니’, 잔인한 시절, 대중은 너나없이 굶주리고 국경을 넘는 판에 뱀이 어찌 꽃처럼 아름다워야 했더란 말인가. 이게 어디 ‘인생파’의 작품인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무서운 시인 아닌가.

그러나 어쩌랴.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하는 생물인 것을...그러니 어찌 달콤한 권력에 불나방처럼 투신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여기, 권력이 저 누아르의 세계처럼 자신의 보전을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세계이고, 문학이 진실을 위해서는 때로 목숨조차 버려야 하는 세계이거늘...그러나 저쪽 건달의 세계에서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의리가 있고 양아치 세계에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금기가 있다하거늘...그는 시의 진실도 알기 전에 권력의 계단에 올라 선 도구 시인이 되고 말았으니 자신의 보전을 위해 무슨 짓인들 못하랴. 하물며 걸레만도 못한 진실이랴. 

무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고리끼 같은 혁명적인 작품들에 점수를 주자는 건 아니다 그들의 작품은 너무 청교도적이고 교조적이다. 난 차라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악의 꽃]처럼, 거기 부정하기 힘든 비근한 일상의 나를 볼 수 있는 작품들이 더 호감이 간다. 거기에는 무거운 일상에서 가벼운 연애로 살고 싶은 대중들의 달콤한 로망이 있고, 그러나 그런 달콤한 로망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진실이 은칼, 금칼처럼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악의 꽃]은 또 어떤가. 우리가 이 시집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은 혁명의 좌절이라는 악의 현실에서 상징의 꽃을 피워 올린 이 세기적 시집을 통해 '검은 담즙'과도 같이 어두운 저 깊은 곳에서 다시 나를 길어 올리는 창조적 우물을 발견하는 기쁨 때문이 아닌가. 

‘자연’은 하나의 신전, 거기 살아있는 기둥들에서
이따금씩 어렴풋한 말소리 새어나오고;
인간이 그곳 상징의 숲을 지나가면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

- 보들레르, ‘교감’

그리고 작품에서 발견하는 것은 비단 이것들만은 아니다.

"'미'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일정한 내용이 필요하다."(안토니오 그람시, [대중문학론], 책세상). 여기 그람시의 말대로, 우리는 이런 명작들에서 하나의 미이자 하나의 계몽이자 하나의 모럴이 뒤범벅이 된 깨달음의 쇠망치를 뚜드려 맞으면서 인생의 그 어떤 북극성과도 같은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 

과연 그렇지 않을까...

이와는 다르게 예술가와 작품은 별개라는 논리에 도덕이 결여되어 있다는 거, 즉 모럴 부재로서의 근대 문학, 이게 바로 저 [마담 보바리]처럼 '야비한' 문학을 낳은 정신적 배경이 아닌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이 과연 별개인가.

靜菴 趙光祖가 갓 젊은 나그넷길에서 어느 집에 한동안 묵으려 했을 때, 그 집 시악씨가 한눈에 반해 홰를 치고 바짝거려 오고 있었던 걸로 보면 趙光祖는 생김새도 아주 잘생긴 美男子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光祖는 그 여인의 秋波를 받아들이질 않고, 냉큼 딴 집을 찾아 옮겨 가려고만 하고 있었다.
여자가 마지막 작정으로 그 머리에 꽂은 비녀를 빼 光祖에게 주었을때,  光祖는 그걸 위선 받아 가지고 가긴 했지만, 이내 되돌아와서 그 비녀를 그 여자의 집 한쪽 벽 틈에다 꽂아 놓고 물러가 버렸다.
어땠을까?
光祖가 그 때 그 여자의 秋波를 받아들여 한때 히히덕거리며 즐길 수도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그의 서른 여덟 살 때의 그 飮毒死刑 같은 건 면할 수도 있지 안 했을까? 적당히 그때그때를 끌끌끌끌 히히덕거리면서 父母妻子 안 울리고 살아남아 있었을 것이다.

- 서정주, ‘靜菴 趙光祖論’

여기, 정암 조광조는 참 어리석은 숙맥이라면서 자신의 기회주의적 인생론(“적당히 그때그때를 끌끌끌끌 히히덕거리면서”)을 후안무치하게 늘어놓고 있는 이 작품을 우리는 서정주의 작품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보는 시각은 노예의 수사학이자 종놈의 신화다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이 별개라는 논리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결국 현실 부정의 모럴이다. 즉 현실과 매개되어 있지 않은, 그리하여 역설적으로 현실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논리는 비역사적이고 비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이다. 즉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세계를 즐기는 ‘말의 사기사님네’(신동엽, [꽃같이 그대 쓰러진], 실천문학사])의 시에는 구체적인 삶으로서의 서사적narrative 요소가 차단되어 있다. 삶이, 이야기가, 서사가 결여된 시는 부르주아가 노동에서 멀어져 있듯이, 현실에서 한 발 비켜서 있다. 

여기서, 서정주 등 재래의 서정시인들과 다르게 당대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던 많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이 서사라는 것은 큰 암시를 준다. 임화의 단편서사시, 백석의 리얼리즘시, 김수영의 생활시, 신동엽의 서사시, 오장환의 탁류의 시, 한용운의 산문시, 김남주의 민족시, 박노해의 노동시 등의 공통 특징은 이들이 고통스런 삶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고,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외화外化시키고, 즉 대상에 대한 일정한 '미적 거리두기aesthetic distancing'라는 서사전략을 통해 얻어 낸 대자적 현실인식으로 동화同化에 대한 유혹을 견딜 수 있었다는 점, 이런 점들이 하나의 단서가 되어 자신이 처한 현실을 다시 재형성해remaking나갈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 변곡점the point of historical curve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한 발 비켜서 있는 예술가의 태생적 조건이 예술작품을 삶과 격리시키는 조건이 되게 만들고-중세시대 궁정시인들의 봉급은 귀족에게서 나왔다-바로 여기에 지식인을 비롯한 예술 일반의 기생적寄生的 요소가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우리들에게 신전, 성당, 학교, 미디어가 각각 고대와 중세, 근대, 그리고 현대의 강자의 신화를 대변해온 국가이데올로기장치였음을 적시하고 있다. 역사는 또한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대부분의 시인, 사제, 교사, 기자들이 이런 강자의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해 온 이데올로그로 기능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라는 기본 신념이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던 식민제국주의사회에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국가독재사회에서, 그리하여 개인적인 삶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은 별개라며 현실을 떠난 시를 시의 본령이라 여기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교묘한 호신책이라 아니할 수 없고, 또 그런 태도가 일시적으로 대중의 눈을 멀게 하고 정신을 흐리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근본적으로 영혼 없는 ‘몽롱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나는 단언컨대, 전체주의와 국가독재를 옹호하는데 기여하고 마는 기회주의 시인과 괴물엘리트들의 위와 같은 그악한 논리는 노예의 수사학이자 종놈의 신화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늘샘 김상천 

작가,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소명출판) 저자

 

 

김상천 문예비평가  info@news-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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