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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기획칼럼] 친일문인기념상논란 제3부 1장, 순수의 정체
김상천 문예비평가 | 승인 2017.11.28 18:42

‘순수’는 불순한 국뽕 신화다.

1부(클릭)에 이어 2부(클릭)에서 나는 작가와 작품이 별개라는, 이른바 ‘미적 근대’로서의 문학 자율성론이 하나의 공모로서 조작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이런 사고가 결과적으로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무책임한 행동의 근거가 되고 있음을 여러 사례 특히, 김수영과의 대위법적 비교를 통해 보여주면서 이는 매우 노예적이고 종속적임을 천명하였다.

자, 그렇다면 이번에는 앞의 논의에 이어 저들이 ‘별개’의 논리와 더불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순수’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음의 망치를 내리쳐 보자. 

미리 말해 두거니와 작가와 작품이 별개라는 논리가 좀 개인적인 문제라면, 작품과 현실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순수의 논리는 사회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매우 이데올로기적임을 전제하고 출발하고자 한다.

2015년 11월 9일 아침, 이날 치열한 지상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안심하시라. 그것은 칼의 대전이 아니라 펜의 대결이었으니...

1. 다음 달부터 내년 초까지 서울의 중 고교 도서관에 <친일인명사전>이 비치될 것으로 보인다(경향신문)

2. 늦어도 내년 새 학기까지 서울시내 모든 중 고교 도서관에 <친일인명사전>이 보급된다(한겨레)

3. 서울시교육청이 다음 달부터 서울 시내 모든 중 고교 도서관에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비치할 계획이어서 논란이 되고 있다(조선일보)

자, 독자들이여! 이제 드디어 지상전이 느껴지는가. 여기, 1은 사전 비치를 조심스레 낙관하고 있고, 2는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며, 3은 이를 쟁점화하려고 한다. 이처럼 신문은 ‘리드’부터 으르렁거리고 있다.

논의를 좀 더 진행시켜보자. 우리는 대개 신문이 사실을 보도하는 언론기관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신문도 이윤을 추구하는 엄연한 사적 기업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 없고, 따라서 기사는 자연 중립을 지킬 수도 없고, 또 실제로 중립을 지키지도 않는다. 머 사실 중립이 없기 때문이다. 신문기사가 가치중립적이고 노트럴한 매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렇게 매우 가치 지향적이고 주관적인, 아니 정치적인 매체라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지 않은가.

이런 충격은 사실 우리가 언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사회정치적 갈등의 장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곧잘 언어의 실체적 함정에 빠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나는 지금 순수의 정체를 얘기하고 있는 것을 염두해 두고 보시라) 언어는 단순하게 무엇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그 무엇에 대한 취향taste, 태도를 나타낸다. 가령, ‘짜장면’ 보다 ‘자장면’을 선호하는 부르주아들의 언어취향에는 현실을 회피하고자 하는 현실 부정의 태도가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짜장면’의 ‘쯔아zha’음이 현실을 환기시킨다면, ‘ㅎh'음이 소거된 ‘자장면’은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를 경계하고자 의도적으로 조절되고 선택된, 매우 자의적이고 이상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곧 언어는 가치중립적인 도구를 넘어서 가치지향적인 태도를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기호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언어기호가 정치, 경제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은 언어가 결코 순수할 수 없으며, 정치, 경제라는 현실의 영향으로 과잉-결정되거나 신화화되어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 할 수 있음을 예고한다.  

자, 사정이 그러하고 이론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계에서는 아직도 ‘순수’라는 망령이 우리를 미망-‘미망迷妄’은 사리에 어두워 실제로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에 빠뜨리고 있다. 대체 순수는 무엇이며, 이 순수라는 망령이 언제 생겨났고, 이 순수가 대중들을 어떻게 헤매게 하는지 그 계보학적genealogical 접근을 시도해 보자.

먼저, 

여기 이 땅의 보수언론을 대변하는 조선일보의 슬로건 중에 ‘불편부당不偏不黨’을 보자. 이 말은 말뜻으로만 보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가장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기사를 쓰겠다는 언론사의 보도지침을 보여주는 말이다. 뭐 좋다. 불편부당,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 말이 멋지게 느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가치중립을 표방하기 때문이다. 가치중립이라니, 믿음직하지 않은가. 어떤 것이 가치중립이라는 것은 사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또 그대로 객관적이라는 뜻이다. 다시, 어떤 것이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것은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것처럼 순수하다는 말과 가깝다. 순수하다는 것은 이렇게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니 관념적이라는 말과도 흡사하다. 물질계를 떠나 관념을 주무르는 학문, 이게 바로 형이상학meta-physics이다. 형이상학은 곧 현실을 떠나 존재의 본질을 다루는 학문이다. 본질을, 근본을, 영원을, 하늘을, 이理를, 절대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a fundamentalist라고 할 때, 우리는 역사적으로 귀족, 양반, 부르주아지가 바로 이런 근본주의자 대열에 합류한 계층들이었음을 본다. 이런 근본주의자들의 정서의 밑바닥에는 이 세계에는 움직일 수 없는 어떤 실체substance가 있다는 ‘미적 망탈리테’가 졸졸졸 흐르고 있다.

그 중에 순수!

현실적으로 이 ‘순수’라는 말만큼 우리를 매혹시키고 곤혹스럽게 하는 말도 없다. 순수라니...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말인가. 마치 그림 동화에 나오는 요정nymph 같은 공주나 크리넥스티슈 광고에 나오는 모델 같이 깨끗한 느낌을 연상하게 하는 이 말에서 우리는 절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영원에 대한 강한 향수와 동경을 느끼게 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저 미의 여신 같이 아름다운 엠마 보바리가 여러번 미끄러져 끝내 음독사하고 만 것도 바로 이 순수한 연애의 감정 아니었던가 말이다. 아니, 저 영원한 기사, 돈키호테의 둘씨네아 공주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저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순수한 사랑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현실에 순수한 사랑은 없다. 가령, 순수문학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황순원의 [소나기]만 해도 그렇다. 여간 잔망스럽지-‘잔망스럽다’는 것은 작고 여리지만 하는 짓이 얄밉도록 맹랑하다는 뜻이다-않은 서울에서 온 소녀와의 ‘잠깐’ 동안의 수채화 같은 소년 시절의 사랑을 그린 ‘성장’ 동화라고는 하나, 그리하여 우리를 다시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게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여기에도 문학적 아름다움을 넘어선 삶의 진실이 은칼처럼 빛을 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소년은 무명 저고리와 잠방이를 입었고, 얼굴이 검게 탔다.

2. 소녀는 분홍스웨터와 남색스커트를 입었고, 팔과 목덜미가 희다.

여기, 인물묘사로 제시해 놓은 이 표현은 그냥 넣어놓은 게 아니다. 소년이 무명 저고리와 잠방이를 입었고, 얼굴이 검게 탔다는 것은 소년의 가정이 신분이 낮은 집안임을 말함과 동시에 그가 그런 가운데서도 매우 건강하게 자라난 아이임을 암시하고 있다. 반면 소녀가 분홍스웨터와 남색스커트를 입었고, 팔과 다리가 희다는 것은 소녀의 집안이 신분이 높은 가계임을 알림과 동시에, 그녀의 체질이 매우 허약함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런 사실은 부르디외([구별짓기], 새물결) 식으로 말해, “사회적 정체성은 ‘차이distinction'를 통해 규정되고 확인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거니와, 소설 속에서 이는 그대로 두 등장인물이 사랑으로 결합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말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소나기’가 사건의 매개 역할을 하면서 둘의 이별(죽음)을 예고한다. 즉 여기서 ‘소나기’는 순수한 사랑을 말한다기보다 소나기처럼 강렬했지만 일과적으로 끝나고 말 한때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요소로 제시되었다. 이렇게 [소나기]는 자연과학적 사실(소나기-감기-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계급적 진실(평민-양반) 또한 충실하게 반영했기에 성공한 것이지-이 작품은 1959년 영국의 권위 있는 문예지, ‘엔카운터’가 실시하는 국제단편소설 콘테스트에 입선되었다-문학적 아름다음에 편승한 풋내기 작품이 아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우리 문학예술계에는 아직도 ‘문학은 순수하다’는 매우 유치하고 몽롱한 사고가 지배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정말 한심하다 아니할 수 없다. 사실, '문학literary'이라고 해 보아야 19세기에 출현한 최근의 발명품에 불과하다(푸코, [문학의 고고학], 인간사랑)지 않은가.

자, 그렇다면 왜 최근의 발명품에 불과한 문학에 ‘순수’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을까 생각해 보자. 문학적 순수라는 고고의 미를 잘 보여줬다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보자. 이 소설이 많은 이의 흥미를 유발하고 죽고 못 사는 재미에 빠지게 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통속적인 연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간통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물적 권력을 획득하고 정치권력까지 거머쥔 부르주아들, 특히 유한부인들에게 이 통속적인 연애사건만큼 흥미를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엠마는 기가 막힌 미인이다. 이런 통속물이 ‘장편’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한가한 부르주아에게는 딱! 맞는 맞춤한 소일거리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르주아의 입맛에 맞게 써진 소설들이 사르트르([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의 말대로, 그들은 툭하면 ‘고독’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 그대로 인쇄, 출판업에 종사하는 부르주아들의 상업적 이익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가 공간의, 묘사의 형식이고 현재형의 언어라면 소설이 시간의, 서사의 형식이고 과거형을 쓰게 된 이유도 한가해진 그들을 위한 배려라 아니할 수 없다. 즉 이제 고된 노동과 골치 아픈 현실에서 벗어나 부르주아적 안도감(*플로베르, 그는 빅톨 위고와 달리 민중계급을 극도로 혐오한 작가였다)을 즐기고 싶은 그들에게 현재는 아무래도 부담이고 미래 또한 불안한 것이다. 즉 권력을 움켜 쥔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정전canon이 되고 만 근대소설-소설은 근대 부르주아의 백과사전이다-의 장편 형식은 하나의 오락물이자 하나의 ‘현실도피적’ 소일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소설도 사실은 근대 이전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시학’이 있었지만, 그 안에 소설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도덕이 역사의 산물이듯, 하나의 형식이라는 것도 역사의 산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모든 것이 역사의 산물이라는 전제에 따라 우리에게 순수라는 개념은 언제 생성되기 시작하였는가 보자.

우리에게 ‘순수’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형성되고, 이것이 하나의 담론으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기이다.

물론 이전 시기, 다시 말해 정조 년간에도 문체반정 과정에 다산茶山이 쓴 ‘문체책文體策’에 연암 중심의 패관소품체稗官小品體 소설 등이 [시경詩經]에 비해 전아典雅하고 순정純正하지 못하다느니 하여 연암燕巖의 [허생전] 등 소설에 대한 적의敵意를 드러냈음을 볼 수 있다-여기서 우리는 다산 또한 매우 신화화된 존재가 아닌가 예측해 볼 수 있다. 이런 다산의 신화적 한계를 용기있게 지적한 학자가 부산대 강명관 교수다. 그는 한겨레, 2012. 6. 20자 ‘다시 보는 다산’에서 다산을 근대를 부정하고 주자학에 철저한 사람이었다고 논한 바 있다.

자, 그렇다면 여기, ‘영원한 제국’을 세우려 했던 정조와 다산이 [시경]을 그렇게 두둔하고 소설에 적의를 드러낸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정조와 다산이 공자가 산정했다는 [시경]을 하나의 정치교과서로, 모본으로 본데는 매우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다. 역사를 보건대, 한대漢代 유학은 기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 소실된 유가 전적들을 복원한 데서 온 문제였다. 유가 전적들의 복원과정에서 시詩, 서書, 춘추春秋 등 서책들에 대한 대대적인 경전화canonization가 진행되었다. 경전화라는 것은 마치 죽은 자를 성인으로 공식 선언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미 시의를 상실한 서책에 새롭게 신성divinity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詩는 [시경詩經]이 되고, 서書는 [서경書經]이 되고, 춘추春秋는 [춘추경春秋經]이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서책의 신격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한술 더 떠서 동중서董仲舒라는 유학자가 나서서 “하늘은 변치 않는다. 도 또한 변치 않는다天不變 道亦不變”라고 유학에 도금을 입혀 놓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비교적으로 볼 때, 로마에서 한때 탄압을 받던 원시기독교가 니케아 종교회의를 계기로 국교가 되고 신약이 하나의 경전으로, [성서聖書]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유사하다. 이후, 유교는 종교적 신비주의에 들씌워진 무시무시한 국가종교가 되었음은 물론 선진고경先秦古經들의 한 마디, 한 구절이 절대적 권위를 갖게 되고 그 신비성을 더해가면서 경전들은 다만 그악한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재물과 관직을 얻는 치부와 등용의 수단으로, 백성들의 일상을 옭아매는 도덕의 올가미로 작용하면서 모든 통치, 사상, 문화의 전거典據가 되었다. 그러니 입만 열었다하면 공자말씀이요, 글만 썼다하면 가장 전아하고 순정하다는 [시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하나의 재현으로서, 그러나 이는 욕망의 억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연암은 달랐다. 그는 이런 관념의 허구성을 여지없이 질타한 현실주의자realist였다.

[시경]삼백 편이라는 것은 당시 여항 사이에서 불렸던 노래에 불과할 것입니다. 기쁘고 즐거우며, 화가 나고 아프며, 희로애락하는 사이에 부득불 이런 노랫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니, 마치 시절에 맞게 우는 벌레나 새들처럼 절로 울고 절로 읊조렸을 겁니다. 각 지방의 풍속을 살피는 자가 민요를 채집하여 문자로 정리하고 시의 구절로 만들어서 이를 학교에서 책으로 만들고 악기에 올려 연주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열국들의 노래인 국풍國風이니, 시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생겨난 것이지요. 그러니 어디에서 그 시를 지은 사람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소서’에서는 시를 설명하면서 반드시 시를 지은 사람이 모두 있다고 말하며, ‘이 시는 누구누구가 지은 것이다’라고 말해서, 마치 후세에 [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시의 저자를 말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는 견강부회해서 억지로 말하는 것입니다. 

                                             - 박지원, [열하일기], 김혈조 번역/돌베개

시를 하나의 경전canon처럼 절대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도 사실 별것 아니라는 식의 이러한 평론은 당시의 위정자들에게 매우 불편한 심기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자, 이렇게 우리는 이 ‘순수’라는 담론이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정치적이라는 것을 보았거니와 다음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또한 순수 담론이 얼마나 치열한 정치적 투쟁의 산물로 등장하고 있는지 그 실체를 볼 수 있다. 

순수는 교묘한 호신책이다

개괄해 보건대, 

순수논쟁은 1930년대 말기 한국 문단에서 문학의 순수성에 대한 견해 차이로 발단한 문학적 논쟁으로, 이 논쟁은 1939년 6월 유진오가 <문장>지에 ‘순수에의 지향’이라는 평론을 발표하자, 이를 반박하는 김동리의 ‘순수 이의’ 및 김동리의 논조에 동조하는 김환태의 ‘순수 시비’ 등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비롯하였다. 이러한 문학상의 ‘순수’ 논의는 1945년 광복을 맞아 본격적으로 재연되고, 그 후로도 지속되어 왔다. 즉, 1947년 민족문학 측의 김동리와 리얼리즘 측의 김동석 간의 치열한 대결을 비롯하여, 1959년 김동리, 이어령, 김우종, 원형갑 등이 얽힌 공방, 그리고 60년대 이어령과 김수영의 '불온시 논쟁' 등을 거쳐 참여 문학론을 내세운 바 있는 염무웅, 임헌영 등 소장 비평가들에 의한 순수 문학 비판론으로 이어지면서 그 백가쟁명을 이루었다.

자, 그렇다면 여기 유진오가 말하고 있는 순수의 정의부터 보자. 

2장 이어서

늘샘 김상천 

작가,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소명출판) 저자

 

김상천 문예비평가  info@news-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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