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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기획칼럼] 친일문인기념상논란 제3부 2장, 순수의 정체
김상천 문예비평가 | 승인 2017.11.28 18:41

3부 1장 보기

“순수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모든 비문학적인 야심과 정치와 책모를 떠나 오로지 빛나는 문학정신만을 옹호하려는 의연한 태도를 두고 말함이다.”

그 또한 친일 부역자의 한 사람으로 발언하고 있는 이 말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미 순수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순수란’ 기지정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순수는 모든 비문학적인 야심과 정치와 책모를 떠난 매우 ‘문학적’ 성격을 띤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을 역으로 보면 순수라는 개념은 당시 식자들의 머리를 어지럽게 할 만한 매우 정치적인 현실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으로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둔 미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순수가 당시 식자들의 머리를 어지럽게 할 만한 정치적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로 나온 개념이라면, 그런 정치적 현실은 대체 무엇일까?

익히 알다시피, 1939년은 일제가 대륙침략을 노골화하고 전체주의가 그 최후의 단말마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무렵이다. 다시 말해, 이때는 민족 모순과 계급모순이 점점 첨예화되고 민족구성원의 삶이 도탄에 빠지고 양심적인 문화인, 지식인들의 활동이 급격하게 위축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신간회가 해체되고(1931), 카프 해산(1925~1934)으로 민족주의 운동, 사회주의 활동이 원천 봉쇄되던 시점에 문학사에서 주목되고 있는 것은 <시문학詩文學1931>, <구인회九人會1933>, <시원詩苑1935>, <시인부락詩人部落1936>등의 이른바 모더니즘 계열의 순수문학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순수문학단체들의 등장 배경에는 어떤 정치역학이 자리하고 있을까. 당시 <시인부락>을 이끌었던 서정주는 그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31년으로부터 1942년 일정에 의한 우리 어문 말살의 때까지에 있었던 ‘순수문학’이나 ‘순수시’의 뜻은 다분히 반사회주의적인 열성에서 생겨 나온 것이다.”

                                                       -서정주, [한국의 현대시](일지사)

 

이런 사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과연 순수문학이라는 게 결코 순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즉 순수문학 또한 자기방어적이고 나아가 공격적이라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순수문학도 사실은 매우 정치적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what matters,

중요한 것은 순수문학 진영의 논리가 상대를 전제로 해서 나온 부차적이고 대응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실은 곧 순수문학 진영의 논리가 삶의 본질을 비켜갈 수 있다는 점이고, 따라서 민족모순, 계급모순 등 사회적 갈등과 이 갈등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당대의 비극적 현실에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브레히트),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는 것은 현실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세계의 모순적 현실보다는 시인들이 자아의 번데기칩에 갇히거나, 과거로 망명하거나, 또는 정당하지 못한 권력에 빌붙어 그들에게 순응하고 마는 노예적 삶에 만족하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더욱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는 것은 이들이 단순히 순수문학을 한다는 구실로 소극적인 작품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권력에 빌붙어 기생하면서 그들을 위해 할 짓 못 할 짓 다해가면서 국민의 삶을 더욱 도탄에 빠지게 하는데 일조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이는 이미 ‘마쓰이 오장 송가’나, [이승만 박사전], ‘베트남 파병시’, 그리고 ‘전두환 찬양시’ 등을 통해서 본 바 있다-더 나아가 사회적 언론 매체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망령된 주장을 늘어놓고, 이런 담론들을 끊임없이 재생산, 유포, 확산시키면서 수많은 대중들로 하여금 이런 것들이 사실이고 실체인양 오인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자신들이 마치 '선의 축axis of the good' 인양 인식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미당, 그는 뛰어난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제적problematic’ 논객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정주가 4,19 이후에 발표(1963. ‘세대’지 10월호)한 놀라운 주장을 마주한다.

“한국의 현대문학사에 정통한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회참여와 순수라는 두 개의 개념은 한국 현대문학사에 있어서는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 하에서 맨처음 성립한 것이다.
사회참여라는 생각이 우리 현대문학 사상에서 맨처음으로 주장되고 논의된 것은 1920년대 전반기에 사회주의 경향파라는 것이 우리 문학에 대두되면서부터였고, 순수문학이란 한 문학적 수세가 생긴 것은 사회주의 문학 10여년의 번잡과 무가치에 대한 반발로부터였던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중략......

이와 같은 ‘문학주의’ ‘예술주의’를 거부하는 사회주의적 사회참여정신은 또 그 필연적으로 민족주의까지를 적으로 삼았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노예정책에서 약소한 우리 민족이 해방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긴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 민족의 계급혁명정신과 일치하는 한도에서만 그렇게 주장해야지 계급혁명을 거부하는 민족주의는 안 될 일이라 하여, 순민족주의적인 모든 운동과는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서정주, ‘사회참여와 순수개념’ 중에서

자, 여기서 우리는 과연 문제적 논객으로서의 서정주를 본다. 보다시피, 그가 이념적으로 서 있는 지점은 매우 분명하거니와 중요한 것은 그가 펼쳐 보이고 있는 논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이다. 대중 독자들은 그가 펼치고 있는 ‘민족’ 우선의 논리에 동화되기 쉽다. 그만큼 계급보다 민족을 더 우선해야 한다는 그의 논리를 일반적인 대중의 감정으로 볼 때 부정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매우 모순이지 않을 수 없다. 즉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시피 서정주가 하나의 시인이자 지식인으로서, 그가 정말 양심을 지닌 식민지 치하의 식자층이었다면 어떻게 ‘마쓰이 오장 송가’ 등 그렇게나 많은 친일작품(11편)을 쓸 수 있었으며, 이것이 과연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일이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주장해대는 민족주의는 다만 사회주의자들을 부정하기 위한 말짱 허구에 불과한 명분이 아니었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민족주의 타령은-김동리 또한 마찬가지다. 그 또한 김동석과의 뜨거운 논쟁에서 순수문학은 민족문학이라 말하고 있다-자기 스스로 조작해낸 허튼 수작이자 거짓말이며, 이는 그대로 그가 얼마나 부실한 논리의 모래기둥에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지, 그 스스로가 양심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엉터리 시인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가 후안무치하게 친일작품을 마구 써 대고, 요구하지도 않은 [이승만 박사전]을 써서 퇴짜 맞고, 5.16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선덕여왕 말씀’을 서두로 하는 [신라초]를 갖다 바치고, 전두환을 마치 헤시오도스가 제우스신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듯이 찬송을 갖다 바친 위인이라니,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그의 시의 독자는 독재자였을 뿐이지 결코 일반 대중들이 아니었다. 이런 그가 순수시니, 순수문학이니, 민족문학이니 듣기 좋은 말로 떠들고 있는 것을 통해 우리는 언어에 대한 회의가 듦과 동시에 이게 모두 다 그 예전부터 전해오던 노예수사학의 현재적 모습이려니 생각하면 그 슬픔은 다 이기지 못할 정도로 크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건 분명 하나의 내력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쓰고 있는 시를 무당 넋두리([한국의 현대시], 일지사)에 비유하고 있거니와, 이를 보면 분명 그는 타고난 노예적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김동리와 서정주, 그들의 순수문학, 민족문학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사실 기껏해야 고대의 노예사제, 무녀들이 춤추는 전근대적 시공간이자 예속의 정신세계이지 않던가.

이 글을 마치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이 무거운 주제를 마치게 되면서 분명하게 느끼게 된 점을 말하려니와, 민족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있는 문학적 순수주의는 하나의 ‘국뽕신화’에 불과한 매우 순응적인 성격을 지닌 불순한 이데올로기임을 천명하고자 한다. 여기, 국뽕이 무엇인가. 국뽕은 ‘국가’와 ‘히로뽕’ 의 준말로, 이는 과도한 애국주의를 비틀어 댈 때 쓰는 이 시대의 건강한 은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국뽕 신화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우리의 시인 서정주라는 거, 그러나 그가 반민족적인 시인이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가 진정으로 원하고자 했던 것은 과연 민족의 이익이 아니라 민족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려는 데에 급급했던 가장 야비한 기회주의자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순수’는 어려웠던 시기, 자신만이 살고자 했던 교묘한 호신책이자 건강한 민족 정신을 흐리게 하는 데 일조한 불순한 국뽕 신화였다는 진실 말이다

......
이런 인사를 기리는 상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고 문학적 위광을 드러내고 있다니...아, 대한민국은 참으로 술푸게도 영광스러운(?)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다시 그의 대표작, ‘자화상’을 감상하면서 그가 과연 얼마나 일찍부터 노예근성에 찌들어 있고, 야비했으며 기회주의적인 인사였는지 좀 꼬나보먼서 마치기로 하자.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나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를 닮었다 한다.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此一篇昭和十二年丁丑歲仲秋作. 作者時年二十三也.

 

■부록; reproduction, 재생산은 왜 위험한가

대체 교과서는 누구에 의해서 왜,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 읽기여
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 김명수, ‘하급반 교과서’, 1983

 

한 아이가 어떤 것을, 그것도 국가에서 만든state-penned 교과서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큰 소리로’ 읽는다는 것에서부터 이 시는 매우 씁쓸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정경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절망적 태도에서 왜 화자가 아이러니하게 비꼬는(‘하급반’, ‘쓸쓸한’) 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지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여기,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따라서’ 읽는 현실은 우리가 어떤 교육 현실에 처해 있는지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눈 먼' 독서 교육의 현실이다. 마치 맹인이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상대가 시키는 일을 그대로 따라 해야 하는 기막힌 현실 앞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중요한 것은 ‘과연’ 자신의 의견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주체적으로 재구하면서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형성해 나가는 ‘자기 결정적 삶’으로서의 자기의 공간이 없다는 거, 이거야말로 박제 된 아이들을 양산하는 노예적 기제가, 반인간적 매커니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사람이나 일이 공정한지 아닌지, 시비를 가리고, 미추를 따지는 주의 깊은 심미적, 비판적 태도는 인간 형성의 기본 요소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보다시피 현실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그리하여 여기, 공정과 시비와 미추를 따지는 투명한 활동이 철벽처럼 가로막힌 사회를 우리는 ‘닫힌 사회'라 부르고자 한다. 닫힌 사회는 무엇보다 진실이 은폐된 사회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진실이 은폐된 사회에서는 ‘거짓 신화’가 판을 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잘 살게 해 주겠다’는 거짓신화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동물농장]의 복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거짓 신화에 속아 결국 비극적 삶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기만적인 거짓 신화에 속아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끝없는 고통과 말 못할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독재자)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

는 ‘이중 사고a double thought’에 길들여지게 된다. 거짓 신화를 조장하는 근대의 경전, 교과서는 이렇게 자신들의 이익을 지배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 누군가는 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나폴레옹과 그 일당, 돼지들과 그들의 나팔수, 스퀼러들이다.

늘샘 김상천 

작가,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소명출판) 저자

 

김상천 문예비평가  info@news-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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