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김상천의 고전문예강의, 숙독에 길이 있다 - 1장 : 나관중의 '삼국지' 1편 -
[연중기획] 김상천의 고전문예강의, 숙독에 길이 있다 - 1장 : 나관중의 '삼국지' 1편 -
  • 김상천 문예비평가
  • 승인 2018.03.0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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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삼국지]
- 조조를 위한 변명

1, 개관

그는 누구일까... 

[뉴스페이퍼 = 김상천 문예비평가] 그는 16세가 되기까지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을 모한 채 보리밭에 인분을 주며 억센 농사일에 매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틈틈이 [삼국지] 등 고전을 읽으먼서 자신의 장래에 대한 한 줄기 빛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은 하지 않고 책만 보는 그가 마땅치 않아 책을 태우고 찢어버리지만 똥지게를 지고 가는 그의 손에는 어김없이 [삼국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아버지의 반대 또한 거셀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갈등이 심화되던 어느 날,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해 본 적이 없는 그는 깊은 우물가 난간에 걸터앉아 아버지에게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거역하는 아들로 살 수도 없지만 [삼국지]를 읽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똥지게를 지는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삼국지]를 읽게 해 주세요. 아버님의 허락이 없으면 저는 이 자리에서 물에 빠져 죽어 버리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확답을 주십시오.” 

잘못하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을 판이었습니다. 그의 성질로 보아 충분히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것이었습니다. 결국 고집 센 아버지도 마지못해 아들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세채([삼국지와 역사사기극], 모색)가 그에 관련된 책을 바탕으로 가공한 얘깁니다. 가공, 리라이팅도 잘 하면 이렇게 멋진 이야기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두루 알다시피, 이 사람이 바로 후일 중국을 통일한 지도자이자 [실천론], [모순론] 등을 쓴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모택동’입니다. 그는 왜 이렇게 [삼국지]에 열광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삼분계三分計’에 있습니다. 촉蜀, 그러니까 오늘의 사천성을 중심으로 천하를 세 조각내겠다는 제갈량의 웅대한 지략이 담긴 이 ‘근거지根據地’ 이론 또는 ‘거점據點’ 전략이 후일 모택동이 ‘정강산’과 ‘연안’이라는 근거지를 활용하여 중국을 통일하는데 깊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이는 소설이 허황된 야그가 아니라 현실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

자, 그럼 이제부터 [삼국지] 강의에 대한 시동을 걸어 보것습니다. 

언어기호는 다양한 해석의 층을 이루고 있는 ‘고고학적’ 문화광산입니다. 

6.25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6.25지만 북한은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전쟁의 발발시점에 집착하고 있다면 북한은 이를 역사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조선전쟁’이라고 봅니다. 우리를 깔보는 심리가 역력합니다. 미국은 ‘한국전쟁The Korean war’이라고 부릅니다. 자기들이 유도해 놓고 국지전으로 애써 축소시키려는 저의가 보입니다. 중국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 합니다. 미국에 대한 제국주의전쟁으로 보면서 북한에 대한 형제적 우애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을 놓고 해석이 제각각인 것은 [삼국지]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모두가 [삼국지]를 좋아하지만 해석은 천인천색, 만인만언입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접근 방식은 [삼국지]를 보는 스펙트럼을 넓혀주면서 우리의 시야를 확대시키는데 기여합니다. 

우리는 웅혼한 중국의 대하역사소설 [삼국지]를 우선 소설로 본 정치사로 읽을 수 있습니다. 통일과 분열, 분열과 재통일, 일치일란一治一亂은 동양적 순환 역사관의 본질입니다. 후한後漢 말의 난세에서 위진魏晉시대를 거쳐-후일 당唐이라는 치세로-분열과 재통일을 다룬 이 소설도 이렇게 보면 거시적 안목으로 볼 수 있는 눈이 트입니다. 문화사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삼국지]가 역사에 나타난 것은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입니다. 몽고족의 지배 하에서 짓밟힌 한족漢族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려는 기호로, 중화민족주의를 발양시키려고 쓴 문화적 코드로 볼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접근도 가능합니다. 즉 후한 말 지방호족의 대두와 겸병兼倂 등, 이들의 수탈에 따른 농민들의 반란(황건적의 난)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삼국지는 당시 사정의 경제적 반영인 셈입니다. 또한 화북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치무대가 철기농구의 대량보급과 인구의 증가에 따라 강남과 사천 지방으로 넓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경작지의 확대가 넓어졌다는 것과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철학사, 사상사로도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합니다. 유교儒敎가 안정된 지배철학으로서 그 이념적 역할을 다하고 부정부패로 얼룩진 변혁의 시기, 유교적 이념의 허상을 깨달은 민중들이 도교道敎라는 상상력에 이끌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 그렇다먼 [삼국지]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한강물을 한 입에 넣을 수 없듯이, [삼국지]라는 거대한 소설을 하나의 이야기로 간단하게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너무 거시적으로 보면 미시적인 시선을 놓치기 쉽고, 그렇다고 너무 작은 것에 이끌리면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이에 나는 장강대하와도 같은 거대한 [삼국지] 지도 전체를 개괄하면서 ‘조조曹操’라는 인물을 통해 정밀하게minutely 들여다보려 합니다. 즉 이 [삼국지] 강의는 어떤 면에서 볼 때 ‘조조삼국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삼국지]를 ‘조조’ 중심으로 읽는다는 것은 분명 아쉽고 서운한 일입니다. 특히 꽃도 있었고 열매도 있었다([무에서 유를 낳다]-제갈공명평전, 하야시다 신노스케, 강)고 평가되는 ‘제갈량諸葛亮’이 가장 서운해 할 테지요. 우리는 그의 웅혼한 삼분계의 지략을 잘 알거니와 유비가 제갈량을 방문하였을 때 그의 모옥茅屋에는 다음과 같은 대련對聯이 붙어 있었다 합니다.

담박이명지淡泊以明志  마음을 담박하게 하는 것은 밝게 하자는 것이요.
영정이치원寧靜以致遠  평안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멀리 이르고자 함이다

참으로 많은 제제다사-명사를 일컬는 말로 요즘말로 ‘셀럽’이라고도 합니다-가 있지만 과연 제갈량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명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멀리 보는long-sighted 지혜와 주군에 대한 성심을 지닌 제갈공명을 보먼서 삼분계와 출사표를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갈량을 중심에 넣고 보먼 재미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북극성과 뭇별들의 역할이 그러하듯이, [삼국지]가 분명 한漢 제국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제갈량의 지략과 유비에 대한 충심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촉상蜀相’으로서 난세에 그가 보여준 이미지는 거칠게 말해서 충신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때 강남 어디를 가다가‘ 조조사철탕’이라는 식당 간판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던 개인적인 경험이 있었거니와, 조조! 하면 우리는 대번에 간웅奸雄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배신과 음모에 능한 마키아벨리스트 같은 간악한 그를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앞으로 더 야그하것지만 이런 사실은 그가 매우 신화화되어 있고 사실 이상으로 덧칠해져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역사가 사실이라는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용의주도한 해석을 담고 있듯이, 소설 또한 용의주도한 역사적 해석의 산물입니다. 이점 조조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강의가 ‘고전문예’강의이니만큼 나는 인문적人文的 접근을 통해 [삼국지]를 보려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먼저 ‘인문liberal arts’이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인문의 기본은 어떻게 살[生] 것인가 라는 인생론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는 다시 잘 보면 아는 일이지만 어떻게 볼[見] 것인가 라는 인식론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인식의 문제는 어떻게 쓸[作] 것인가 라는 방법의, 형식의 문제와도 다르지 않은 표현론의 문제입니다. 인생론, 인식론, 표현론 이 셋은 서로 다르지도 않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또 같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본 강의를 크게 다음과 같이 진행하려고 합니다.

1, 어떻게 살[生] 것인가
2, 어떻게 볼[見] 것인지
3, 어떻게 쓸[作] 것인가

본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하나의 ‘의혹’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의혹이라니...[삼국지]를 비롯 소설 일반에 대한 의혹은 대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 공자를 들 수 있습니다. 공자, 그는 소설을 적대시하는 것을 넘어 공포감을 드러낸 사상가입니다. [논어論語]는 [시경詩經]에 대한 예찬서로 볼 수 있거니와, 한대의 반고가 쓴 [漢書藝文志]에는,
小說家者流, 蓋出于稗官, 街談巷語, 道聽塗說者之所造也, 孔子曰, “雖小道, 必有可觀者焉, 致遠恐泥.”

소설가의 부류는 대개 패관(*정식 史官이 아닌 小吏)에서 나왔으며, 항간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한담이나 아무렇게나 길거리에서 주워들은 자료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小說이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거기엔 반드시 볼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국가·정치 등 원대한 일에 인용한다면 아마도 혼란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위의 자료는 그대로 공자의 소설小說 적대관을 잘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공자는 소설을 국가에 혼란을 일으키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소설을 공포의 대상으로 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부 이어서

김상천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 “명시단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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