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김상천의 고전문예강의, 숙독에 길이 있다 - 1장 : 나관중의 '삼국지' 2편 -
[연중기획] 김상천의 고전문예강의, 숙독에 길이 있다 - 1장 : 나관중의 '삼국지' 2편 -
  • 김상천 문예비평가
  • 승인 2018.03.0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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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중의 [삼국지]
- 조조를 위한 변명

 

1장 1편 보기

[뉴스페이퍼 = 김상천 문예비평가] 서양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서양 고전문예론의 창시자인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시학詩學](문학과지성사)에서 이야기를 적대시하였습니다. 즉 그는 [시학] 6장에서 “비극은 심각하고 완전하며 일정한 크기가 있는 하나의 행동의 모방으로서 그 여러 부분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아름답게 꾸민 언어로 되어 있고 이야기가 아닌 극적 연기의 방식을 취하며 연민과 두려움을 일으켜서 그런 감정들의 ‘카타르시스’를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리타니 고진([근대문학의 종언], 도서출판 b)의 말대로라면,

근대 이전에도 ‘문학’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소설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제국’을 꿈꾸었던 조선의 군주 정조, 그에게 충심을 다했던 다산 또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당시 조선 최고의 시인으로 불렸거니와 그가 애써 지어다 바친 [문체책文體策]에서 말하기를,

稗官雜書 是人災之大者也

패관잡서는 인재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망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연암 박지원 등을 겨냥하먼서 패관잡서, 오늘의 소설을 취급하는 자들을 중벌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 여기 양의 동서를 떠나 당대 최고의 지배담론a dominant discourse을 주무르고 있는 엘리트들이 왜 한결같이 시를 예찬하고 소설의 세계에 대해 ‘적의hostility’를 드러내고 있을까, 이는 매우 재미있는 문예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해 인류 최초의 이데올로기 담당자들이 시를 옹호하고 소설을 적대시한 것은 시와 소설이라는 형식이 루카치([영혼과 형식], 심설당)의 말대로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이 세계에 대한 태도를 표명하는 중대한 양식이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로 세계적인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말을 참고해 보것습니다. 그는 자신의 소설관을 밝힌 [소설의 기술](민음사)에서,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소설, 이야기, 서사의 핵심은 지식에 있다는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지식은 세계를 귀납적으로 관찰해서 얻은 보편적 인식의 체계입니다. 이 지식은 사물을 합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인식하는데 중요한 양식입니다. 이런 지식은 과연 소설이라는 경험의 세계를 객화시켜 개념적으로 노트럴하게 재구, ‘서술’한데서 얻어 낸 것으로 이것은 시처럼 객관적 사실의 세계를 ‘묘사’, 복사해낸 모방의, 재현의 형식과는 너무도 다른 멘탈리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즉 시가 순종의, 동일성의, 전체의 사회를 유지하는데 매우 유효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고대적 형식이라면, 소설은 독립의, 차이의, 개인의 사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근대적 형식인 것입니다. 즉 시가 전체주의적이라면, 소설은 개인주의적인 것이고, 달리말해 시가 고대 부족의 백과사전(에릭 A. 해블록, [플라톤 서설], 글항아리)이라먼 소설은 근대 부르주아의 계몽 백과사전인 셈입니다. 

이를 좀 부연해 보것습니다. 

시가 묘사를 중심으로 하는 전체주의적인 특징이 있다는 것은 ‘나’보다는 상대, 사회를 더 중시하는 사고를 낳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필연적으로 순종적이고 맹목적인 사회구성원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대는 노예제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본질로 하는 소설의, 서사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귀납적 지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경험해 보니 세상은 이렇더라, 그러니 이야기라는 소설의, 서사의 세계에서 세계의 진실은 탈은폐 될 수밖에 없고, 권력자들은 바로 이런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서사의 본질은 설명이고 인과입니다. 세계의 본질을 밝히고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인 계기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아, 저 새끼(사회, 조직, 국가)가 저래서 망하고, 흥한 것이구나’ 라는 객관적 인식을 갖게 되고 세계의 진실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배자들이 보기에 소설은 전체사회에 ‘철학적 균열philosophycal rift’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한 형식인 것입니다. 나중에 야그하것지만, 최초의 철학자이자 소설가라고 볼 수 있을 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소크라테스의 변명])가 시인 밀레토스에게 고발당해 죽게 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사에 시시콜콜 알려고 따지고 덤벼드는 소크라테스는 지배자들이 보기에 너무도 위험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흔히 말하길,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자와는 말을 섞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삼국지]라는 소설을, 그것도 야망과 사랑, 배신 등을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은 사람 앞에서는 인간사의 모든 것이 이미 노출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소설의 세계는 앎을 이야기 하고 있는 양식으로 지배자들이 이런 소설을 즐기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나아가 적의敵意를 드러냈던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좀 구체적인 사례를 보것습니다. 

조선후기, 정조의 사랑을 받은 규장각의 각신으로 이름이 있었던 문신으로 이덕무-흔히 책만 보는 바보라는 ‘간서치看書痴’ 신화의 주인공입니다-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영처잡고])에서 이르기를,
“소설에는 세 가지 의혹된 바가 있다. 헛것을 내세우고 빈 것을 천착하며 귀신을 논하고 꿈을 말하였으니 지은 사람이 한 가지 의혹이요, 허황된 것을 감싸고 비루한 것을 고취시켰으니 논평한 사람이 두 가지 의혹이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경전을 등한시했으니 탐독하는 사람이 세 가지 의혹이다. 소설을 지은 것도 모자란데 무슨 심정으로 평론까지 붙여 놓았단 말인가? 평론한 것도 옳지 못한 일인데 [삼국지], [수호전]을 속집까지 만든 자가 있었으니, 그 비루함을 논할 나위가 없다. 슬프다!”

이 글을 대하는 순간, 나는 참으로 슬픈 맴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명색이 조선 최고의 석학이 이 정도인가 해서입니다. "이야기가 세상에 대해 가르쳐주고 이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알려준다stories teaching us about the world, showing us how it works"(조너선 컬러, [문학이론])는 것은 지극히 상식인데 말입니다. 무론 그는 소설을 적대시했던 군주(정조)의 총애를 받던 각신閣臣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영향력을 지닌 위치에 있는 자가 이렇게 균형을 잃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견임을 전제한다면야 모르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옛것만을 존중하고 지금 변화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한 것이며, 경학과 덕행만을 종주宗主로 삼고 문장을 말단末端으로 간주하던 유가들의 말라비틀어진, 그 고목 같이 낡아빠진 영감의, 꼰대의 사고방식mentality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고, 배우고, 깨우치기 위해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인간의 삶이 생생하게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는 [삼국지]를 통해 수많은 역사의 풍운아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갔으며, 가령, 유비는 ‘세상이 비록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세상을 버리지 않을 것’(명분우선주의)이라고 했던 반면에, 조조는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실리우선주의)이라는 대립적 관점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여기 나에게도 해당되는 하나의 생존의 화두일진대, 소설이 의혹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naive 생각이 아닌지...

이뿐이 아닙니다. 소설 [삼국지]에는 인생의 교과서가 될 만한 무수한 모델들과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가히 인생 백과사전이 될 만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인간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지 등등...우리는 [삼국지]를 읽으먼서 인간사 백과사전을 간접체험하면서 ‘두터운’ 경험지를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터운’ 경험지를 쌓은 자만이 이 세계의 주인이 되고,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거, 그런데 이렇게 인생의 보감이 될 만한 이야기를 의혹된 책이라 하니...백보를 양보해서 설사 그의 말대로 소설이 무슨 저 유명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처럼 허황된 것이라 친다 하더라도 그는 너무 현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이 제아무리 꾸며낸 허구라 할지라도 소설도 현실에서 자료를 취하고 있느니만큼 소설은 저 모택동처럼 현실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설 쓰고 있네’가 아니라 지나고 보면 소설 같은 게 인생입니다. 상품이 하나의 물질적 창조물이라면 소설은 하나의 정신적 창조물입니다. 그것도 매우 훌륭한 지적, 문화적 창조물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기, 우리는 지금 인류의 뛰어난 지적, 문화적 창조물에 해당하는 [삼국지]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모쪼록 즐거운 인문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상천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 “명시단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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