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인과 촌장, 진달래
(4) 시인과 촌장, 진달래
  • 김병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3.24 2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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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시 진달래로 피어

그대 가슴으로 스몄으면

나 다시 진달래로 피어

그대 타는 가슴으로 스몄으면

 

사월 목마른 사월하늘

진홍빛 슬픔으로 피어

 

-시인과 촌장, 「진달래」中

 

‘봄보다 먼저 3월 1일이 온다’고 노래했던 임화는 몇 년 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봄이 되면 알게 모르게 없어진 사람들이 취기와 더불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겨우내 사라진 사람들. 이름보다 먼저 기억하는 얼굴이 있고, 이름보다 먼저 기억하는 냄새가 있다. 이름보다 먼저 기억하는 소리가 있다. 시인과 촌장의 곡을 들을 때마다 그렇다. 나는 이 곡이 실린 앨범의 모든 곡을 소리로 기억한다. 「푸른 돛」의 슬라이드 주법, 「매」의 건조한 기타 톤, 「고양이」의 능글맞은 베이스, 「비둘기 안녕」에서 내지르는 하덕규의 절규까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이 앨범을 잡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이 소리가 나를 위태롭게 한다. 관습에 익숙해져가던 나를 다시 위태롭게 만든다. 그렇게 놀라면서 피가 도는 것을 느낀다. 일찍이 피가 도는 이미지와 봄을 병치해서 노래했던 젊은 날의 서정주 시인처럼.

진달래야 수많은 시인들이 노래했지만 내가 이 노래를 고른 이유는 바로 그 소리 때문이다. 정확히는 이 노래의 후반부에서 내지르는 클라리넷 때문이다. 그것 하나 때문에 저 가사는 단순한 연가의 의미를 넘어 보다 풍부해질 수 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온전히 그 음을 받은 사람이, 받은 귀가 그 위태로움을 알아챌 것이다. ‘피어’라고 되뇔 때, 느닷없이 데시벨을 높이는 클라리넷이 마치 사이렌처럼, 이명(耳鳴)처럼 오래도록 이어진다. 아픈 귀를 부여잡는 나와 붉게 피어난 노래 속 꽃이 한 자리에서 조응한다.

가사는 이러한 클라리넷 음의 상승과 대비된다. ‘스몄으면’이라는 단어에서 시옷에서 풍기는 서늘함을 ‘ㄴ’이 풍기는 부드러움에 스며드는 음가들의 조합을 생각해보았다. 단 하나의 언어로도 언어의 음가로도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노래가 몇이나 될런지.

하덕규의 곡이 지닌 힘은 거기에 있다. 그는 위태로운 우리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가 설산에서 「한계령」을 생각할 때, 시인과 촌장의 앨범에 들어갈 곡을 쓸 때, 그는 행복하지 못했다. 불행을 질환처럼 겪던 그가 써내려간 노래들은 결국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이런 아픔 앞에서 청춘이라는 단어는 낭비다. 청춘이라고 말하기 전에, 젊다고 말하기 전에, 그는 아프다고 소리지른다.

팀 이름인 ‘시인과 촌장’에서 ‘시인’은 사실 시인(詩人)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도시인(都市人)과 촌장에 가깝다. 이러한 비유적인 대비 자체가 (자켓에 등장하는 검은 고양이와 흰 새처럼) 그들의 미적 엠블렘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모든 극단은 위태롭다. 사이에서 머뭇거리다간 내가 죽는다. 어두운 골짜기로 뻗은 발자국들이 보인다. 일정한 보폭으로 내딛은 걸음들. 내가 사랑한 예술가들은 모두 그 길을 걸어갔다. 비겁한 나는 지금 길이 난 방향으로 고개를 치켜드는 수 밖에 없다.

담장마다 흐뭇하게 자라는 꽃향기가 드높다. 우리는 아직도 여기에 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다시 돌아오고 또 다시 지나간다. 봄은 그런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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