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시인 특집] 좋은 시 12. 소설(小雪) - 윤여진 시인
[신인 시인 특집] 좋은 시 12. 소설(小雪) - 윤여진 시인
  • 윤여진 시인
  • 승인 2018.03.29 10:33
  • 댓글 0
  • 조회수 1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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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에서는 데뷔 5년 미만의 신인 시인들 중, 작품이 뛰어난 시인을 선정하여 미발표 신작 시와 시에 관한 짧은 단상, 에세이 등을 연재합니다. 시인들의 시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소설(小雪)
    
소란스러운 건 싫어요
이 방엔 남겨진 소음이 너무 많거든요
잠이 들기 전, 방의 밝기보다 바깥이 더 환해지면
내가 누운 베개 안쪽에도 
곧 눈이 도착할 거라, 숨을 몰아쉬는 잎들이
납작 엎드린 채 말해주었어요


그가 벗어두고 간 양말 한 짝을 
허리를 굽혀 주웠을 때 
벗은 발과 분주할 그의 아침을 생각해요
모서리부터 깨지는 방 한가운데서
달력을 세어보며
이상하다, 잠긴 목소리를 다듬으면
그림 속, 제일 큰 나무에 목맨 의자가 흔들려요
아랫배엔 흰 피가 도는 것 같아요
손을 넣으면 축축한 음지가
내가 만든 그늘로 들어와 볼래요?
고개를 돌리면 눈 내리는 소리가 뺨에 닿아요
눈은 힘껏 쥐기도 전에 
가장 여린 피부 안쪽으로 녹아들어요
슬픔은 어느 쪽으로 돌고 있는가요
골똘해질 때 나는 생생해져요


뒤척이는 소리 하나 없이
나 혼자 그의 이름을 불러요 
이번이 처음이라는 듯 
놀란 입을 한 손으로 가릴 때
미처 가리지 못한 눈동자를
베개를 더듬거리다 마주칠 때
거짓말은 언제까지 미끄러질까요
계절이 미처 알려주지 않는 게 있어요


매일 한 뼘씩 덮이는 바깥의 일을 모른 체해요
처음 보는 밝기를 찾아 맞추고 몸을 눕혀요
두 귀를 꼭 잠근 묵묵한 잠이 있고
그늘을 배에 올린 
내가 누운 자국이 있어요
희미해지기 전에
남은 소음을 다 가져가 줘요
곧 더 많은 눈이 내린다, 했거든요

 

 

시작노트

불안의 곁
  

시의 처음엔 늘 사람이 있다. 주로 내 곁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들이. 곁을 살피다 보면 나는 끝없이 욕심이 많아진다. 나도 몰랐던 이기심과 어설픈 배려가 부끄러움으로 점철될 때 무언가 쓰고 싶어진다. 쓴다기보단 툭 하고 뱉어내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받아 적을 준비를 한다. 내뱉은 말들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어서 보고만 있는다. 대체로 찌질하고 허무한, 그 어설픈 기록이 시가 되기도 한다.

사랑을 발견할 때마다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아무 색도 없는, 묽은 구멍에 들어가 하고 싶은 말을 버려두고 다시 세상에 나와 아무렇지 않은 듯 살고 싶었다. 묵묵해지는 것. 내가 만든 그림자보다 내가 더 고요해지는 것. 자꾸만 길어지는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을 아끼고, 가능한 하지 않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결국, 피할 수 있는 사랑은 없었다. 이제 어쩌지, 고민하는 사이 사랑이 달아나기도, 달아났던 사랑이 갑작스레 안기기도 했다. 

어떤 경우는 그토록 견고하다고 믿은 나를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나보다 아픈 당신이 새벽에 방문을 열고 내 잠을 확인할 때.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볕 드는 자리를 겨우 찾아 앉아있을 때. 그러다 거실 한 가운데서 소리 내어 울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을 때. 당신의 슬픔을 공감하지 못할 때. 꿈에서 깨면 몸과 마음을 꼭 씻어내야 할 때가 그랬다.

내 슬픔이 우선이었으므로 짓무르는 표정과 절망을 끼얹은 얼굴을 모른 체 했다. 풍경과 사물이 순간마다 쉬는 한숨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모든 일이 없었던 일처럼 구멍으로 들어가면 해결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구멍 파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신과 증오는 끝이 나게 마련이니까.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그 끝은 보잘 것 없는 내가 있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내게 시는, 더는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이보다 더한 끝은 수없이 많을 거라고. 넌 순간마다 마지막 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속삭였다. 불안의 끝엔 또 다른 형태를 가진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을 자세히 들여다볼 때 알 수 없는 힘으로 나는 쓴다. 그때의 중얼거림은 절망으로 빚어낸 연기처럼 내가 가보지 못한 곳으로 떠돈다. 나 여기 있어 나 여기 있다니까, 어디선가 아득한 손이 나를 붙잡는다. 그럴 때 조각난 몸 일부를 건네고 싶어진다. 혼란스러움과 서투름으로, 내가 나를 이루고 있는 힘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한다. 발견하지 못한 절망은 무엇일까, 더듬거리며 걷는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집을 향해 멀리 돌아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한순간 집이 보인다. 몇 발자국만 걸으면 문으로 손을 뻗을 수 있을 테지만 그사이에 또 다른 길이 나타난다. 집을 등진 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난 길. 주변을, 순간의 날씨를 살피지 않은 채 걷는다. 이제 한 집을 지나쳤다. 나의 철없음과 무모함이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든다는 말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 
  


윤여진 시인
충북 음성 출생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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