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소설가 메도루마 슌, 자립과 독립 위해 소설 집필 및 저항 운동에 매진
오키나와의 소설가 메도루마 슌, 자립과 독립 위해 소설 집필 및 저항 운동에 매진
  • 육준수 기자
  • 승인 2018.05.03 2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지난 4월 27일부터 29일까지, 제주 한화리조트에서는 제주 70주년을 맞아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작가회의 제주도지회’가 주관하는 ‘전국문학인 제주대회’가 개최됐다. 

대회 첫날엔 국제 문학 심포지엄 “동아시아의 문학적 항쟁과 연대”가 1층 세미나실에서 진행됐다. 심포지엄에는 학살의 아픔을 가진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작가들이 참여했으며, 아픔을 넘어 문인들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다. 심포지엄 1부의 주제는 ‘역사 속 나의 문학적 저항’으로 베트남, 대만, 오키나와의 작가가 각각 발제를 맡았다. 

이날 오키나와의 소설가 메도루마 슌은 “오키나와의 자립과 독립을 향한 저항 운동”에 대해 논했다. 

메도루마 슌은 1983년 단편소설 ‘어군기’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국내에는 소설집 “물방울”과 “어군기”, “브라질 할아버지의 술” 등이 소개됐으며 신오키나와 문학상과 아쿠타가와 문학상,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 등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일본 현지에서는 오키나와의 비극적 역사와 의식을 독특한 상상력을 통해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키나와가 된 류큐 왕국, 그 차별의 역사 

메도루마 슌(이하 메도루마)은 1879년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오키나와는 ‘류큐국’이라는 하나의 나라였으나, 메이지 신정부가 류큐 왕국을 무력으로 강제 병합하며 ‘오키나와’라는 하나의 현이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메도루마는 병합 이전 오키나와는 “일본보다는 한국 역사 드라마에서 보이는 모습과 유사한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현재도 일본의 타 지역과는 풍속이나 생활습관이 전혀 다르며,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는 것.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 정부는 “공통어 교육을 강제”하여 오키나와 언어를 쓰지 못하도록 탄압했다고 메도루마는 설명했다. 그러며 자신이 10대이던 1970년대까지도 방언을 못 쓰게 하는 교육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일본인들은 오키나와 사람들을 ‘열등한 류큐인’이라 칭하며, 식당 앞에 ‘류큐인 사절, 조선인 사절’이라는 종이를 붙이는 등 차별했다고 덧붙였다. 

그리하여 1980년대 이전까지 오키나와 사람들은 일본인이 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메도루마는 이야기했다. 자신의 성을 바꾸는 사람도 있었고, 가난에 떠밀려 오사카나 도쿄로 나가 일을 한 사람도 있었다. 메도루마는 심지어 오키나와의 전통악기인 ‘산신’을 연주하면 (일본인이 되고 싶은) 자식들이 창피해하여, 벽장에 숨어 몰래 산신을 연주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메도루마는 특히 언어적 탄압에 대해 “근본적으로 문화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분노했다. 이는 언어는 문학은 물론 생활과도 밀접하기 때문이다. 메도루마는 오키나와의 작가들은 그들의 언어를 빼앗겼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부터 공통어(일어)로 창작활동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오키나와 사람들의 기억과 문학적 형상화 

하지만 일본인이 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 사람들이 맞이한 것은 ‘오키나와 전투’였다.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3월 하순, 미군이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상륙작전이다. 지상전은 3개월 간 오키나와의 각 섬에서 이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약 12만 명의 주민이 희생됐다. 메도루마는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뿐만 아니라, 일본군으로부터도 공격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편견과 차별 의식을 가진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워 식량을 빼앗고 학살했다는 것. 

메도루마는 이런 아픔을 간직하고 있기에 오키나와 사람들은 전쟁이나 군대를 강하게 부정하고 평화를 지향하며, 오키나와 작가들은 ‘오키나와 전투’와 ‘미군’이라는 요소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오키나와의 유명 작가인 ‘오시로 다쓰히로’의 소설 ‘칵테일파티’는, 미군이 오키나와에 엘리트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벌이는 모습을 통해 그 이면에 숨겨진 위선적 모습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메도루마는 자신은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에, 기억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밝혔다. 아무리 형상화를 시도해도 사건을 직접 경험한 작가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하지만 메도루마는 기억에 집필하는 작업이 “커다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추체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며, 계속해서 집필을 시도할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헤노코 지역 미군기지 설립에 대한 메도루마 슌의 저항 

1995년 오키나와 북부 한 마을에서는 12세 여학생이 미군 병사 세 명에게 납치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메도루마는 이때 오키나와의 현민들은 크게 분노했으며, 미일 양국 정부는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오키나와에 설치된 미 해병대 후텐마 비행장 반환을 약속했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반환은 명목일 뿐, 사실 이 약속은 시설이 노후한 후텐마 비행장을 나고시 헤노코 지역으로 이설하기 위한 제안이었다. 

메도루마는 “오키나와는 전쟁의 피해와 가해가 복합되어 있는 장소”라고 지칭했다. 오키나와 전투로 피해를 입었지만, 미군기지가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는 아시아에 대한 가해자로 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관광업이 오키나와의 주 사업이 된 현재, 다시는 동아시아에서 “오키나와가 휘말린 군사 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메도루마는 이야기했다. 분쟁이 발생하면 “관광을 중심으로 한 오키나와의 경제”는 날아가 버린다는 것. 

때문에 메도루마는 최근 헤노코 지역에서 저항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밝혔다. 게이트 앞에서의 육상 운동(시위)과, 카누를 탄 채 벌이는 해상 저지 활동이다. 메도루마는 현재 ‘올 오키나와’라 불리는 세력은 미군기지 설립을 반대하고 있지만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대화를 거부한 채 설립을 강행하고 있다.”며, 그렇다 보니 “소설을 쓰고 싶어도 시간이 없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끝으로 메도루마는 “오키나와 현민이 대립하고 있는 상대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 오키나와가 다시 전쟁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지 강화에 반대해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전했다. 

한편, 메도루마는 자신이 대학에 다니던 시절 한국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당시 류큐 대학 학생자치회에서 구한 광주민주화 관련 필름을 본 메도루마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한국의 여러 문제들과 오키나와가 현재 겪고 있는 문제(기지 갈등)가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연대해서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날 심포지엄의 1부는 메도루마 슌의 차례를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휴식 뒤에는 2부 ‘아시아의 문학적 항쟁과 연대’가 이어졌다.

Tag
#N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