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바디, <끝나지 않은 이야기>
(5) 이바디, <끝나지 않은 이야기>
  • 김병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6.03.31 23:20
  • 댓글 0
  • 조회수 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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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발견했을 땐 너무 낡았고

제법 여러번 아픔을 견딘

아름답던 존재란걸 알게된 지금

너무 늦은건 아닐까

(...)

우릴 발견 했을 때 너무 낡았고

제법 여러번 아픔을 견딘

우린 너무 아름다운 존재였던걸

너무 모른건 아닐까

-이바디, 「끝나지 않은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란 실은 아주 지독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독하게’라는 단어가 붙는 것은 사실이다. 지독하게 아름답거나, 지독하게 선하거나, 지독하리만치 솔직하거나. 이야기는 우리의 삶보다 더 매혹적이고, 우리는 그 매혹된 표정 안에서 싹트는 감정을 느낀다. 그 감정을 피할 수 없기에 우리는 부품이 아니고, 그 감정에서 도망갈 수 없기에 우리는 사람이다.

영원의 도서관에는 이렇게 지독하게 하나의 세계에 천착해서 일가를 이룬 작가들을 위한 서가가 따로 놓여있다. 나는 가끔 그 이름들을 맥락없이 헤아릴 때가 많다. 트웨인이나, 멜빌, 포, 보들레르와 말라르메, 프루스트, 도스토예프스키, 카프카, 무질, 소세키, 조이스, 단테, 파운드, 이문구, 박상륭이나, 이오네스코, 앨리스 먼로, 박완서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작품에선 그 흔한 단어들조차도 마음을 움직인다. 나는 그 장소를 사랑한다. 그들의 지구력이 나를 뿌듯하게 한다. 그들 스스로가 지독하게도 문학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글을 통해서도 전해지기 때문이다.(그래서 문학에서의 동지 의식은 의외로 불가피하다.)

푯말들이 얽히고 섥혀서 어느 방향으로 갈 수 없을지 모를 때, 나는 그 서가 쪽을 바라본다. 진정으로 문학을 믿은 사람들이 그런 글을 쓰기에 그들의 말은 믿을 수 있다.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비록 이 문구 외엔 아무런 예증도 없지만) 믿음이 그 지독한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사실만큼은 안다. 나는 그 연꽃에 대한 향기를 종종 맡지 못하고 만다. 어딜가나 늘 과한 것이 문제다.

이바디의 뜻은 순우리말로 잔치라는 뜻이다. 오래전에 이 곡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낡으면서도 아름답다는 저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둘이 다른 영역이라고 막연하게나마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국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안 것은 저 곡을 들으며 지낸 시간이 증명해주었다. 고통에도 꽃이 필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꽃일테다. 아픔을 견디고 나면 흔히 마시는 물조차도 아름답다.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를 아름다운 사람들로 만들어준다. 문학을 버릴 수 없는 이유, 문학을 인간이 해야만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제법 여러번’ 표현에서 느껴지는 자부심, 온전히 아픔을 감싸안고 견딘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그 다섯 글자 안에 다 들어가 있다. 그게 연륜이다. 나는 이바디의 노래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들은 헤어지듯 만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만 간직한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셰혜라자드가 두냐자드에게 이야기를 건낼 때,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독한 이야기의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왕은 미로 같은 그 숲 속에서 오랫동안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그 심호흡이 우리에겐 중요하다. 아픔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라며 수없이 아픔을 씹고 또 씹어대는 고행의 길.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 사실이 나를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

어제는 좀 더 얇은 옷을 입고 외출했다. 지하철 좌석에 앉으면 얇은 옷 때문에 옆 사람의 온기가 좀 더 내 안으로 자주 스며든다. 4월이 그렇게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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