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훈 교수, '정치적 올바름 한계에 대해 이야기 해'... 지젝의 말을 빌려 발표
복도훈 교수, '정치적 올바름 한계에 대해 이야기 해'... 지젝의 말을 빌려 발표
  • 김상훈 기자
  • 승인 2018.07.17 21: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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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 = 김상훈 기자] 흔히 PC라고 불리우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언어를 비롯한 표현에서 편견을 제외하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80년대 이후 서구에서 강하게 대두되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사회와 문화에서 영향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콘텐츠 분야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가 지난 6월 “앙가주망 : 예술 젠더 정치”라는 주제로 2018년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한 가운데, 발표에 참여한 복도훈 교수는 슬라보예 지젝이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한 내용을 소개하며, 정치적 올바름의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복도훈 교수(왼쪽)와 신형철 교수(오른쪽) [사진 = 뉴스페이퍼]
복도훈 교수(왼쪽)와 신형철 교수(오른쪽) [사진 = 뉴스페이퍼]

복도훈 교수는 “슬라보예 지젝은 초기 저서에서 최근의 칼럼들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간의 방대한 글쓰기 이곳저곳에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의 이른바 ‘비정치성’과 ‘올바르지 않음’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해왔다.”며 지젝의 저술을 통해 그가 어떻게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해왔는지를 살펴보았다. 

먼저 복도훈 교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카툰 하나를 소개했다. 첫 번째 컷에서 백인 남자는 "정치적 올바름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요."라고 말한다. 두 번째 컷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좋아요, 그러면 '정치적 올바름'을 빼놓고 말해 봐요."라고 말하자, 세 번째 컷에서 남자는 "여성과 소수자를 모욕하고 무시할 수가 없으니 힘들어 죽겠어요."라고 답한다. 이는 '강요된 선택'의 외피를 뒤집어 쓴 전형적인 이중협박의 프로파간다에 해당한다.  

강도가 “돈이냐, 목숨이냐”라는 선택을 들이밀며 위협을 할 때에, 목숨을 택하면 돈을 잃지만, 돈을 택하면 돈과 목숨을 모두 잃는다. 강도가 제시한 선택은 선택의 외관을 하고 있지만 양자택일의 이중협박에 가깝다. 카툰에서 그려지는 정치적 올바름은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성차별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로 추정하고 몰아가는 낙인찍기를 수행하고 있다. 복도훈 교수는 “이러한 선택의 강요가 실제로는 양자택일의 거짓협박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거부해야 마땅하다. 심지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당신의 비판이 혐오 세력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협박도 거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정치적 올바름의 두 주체 ; 금욕주의자와 '아름다운 영혼'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에서 금욕주의자적 주체를 읽어낸다.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을 "자신의 향유를 희생"하려는 "백인 남성 이성애자"의 "강박신경증의 약점"과 결부시키고, 그것의 유래를 "자신 안에서 좀 더 새로운 죄의 층위를 발견해내기 위해서 자신의 생을 바친 초기 기독교 성자의 노력"과 연결시킨다. 정치적 올바름은 백인 남성 이성애자의 특권을 희생하는 척 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확고한 위치를 고집하는 자기기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좌파 정치학의 관점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극단적 좌파의 위장된 표현”이기는 커녕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방패”인 셈이다. 

이러한 주체성은 후기근대적인 주체성의 출현에서 기원한다. 이데올로기의 종말, 역사의 종말은 이데올로기적 대타자(The Other)의 철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정체모를, 위협적인 타자들의 귀환으로 이어졌다. 이어 “타자들과의 모든 접촉은 폭력적인 침해로서 지각되고 경험” 되는 후기근대적인 주체성이 출현하게 됐다. 복도훈 교수는 지젝의 저술을 설명하며 “정치적 올바름의 주체성의 한 양식은 타자들과의 접촉에서 올 수 있는 폭력과 상해의 자각과 경험을 끊임없이 단속하는 의례와 규율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강박신경증에 가깝다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강박신경증적 주체에는 거울처럼 따라붙는 히스테리증적 주체가 존재한다. 타자의 폭력적인 침해로 경험하는 희생자적인 주체, 곧 사악한 세계의 피해자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계와 타자에 호소하고 인정받으려는 주체다. 

지젝은 히스테리증적 주체를 '아름다운 영혼'이라고 불렀는데, ‘아름다운 영혼’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등장하는 항목으로, 양심과 관련이 깊다. 양심은 특정한 의무를 행동으로 실천하기보다는 정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신념과 비평으로 표현한다. 행동은 타자에게 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양심은 신념과 비평의 표현으로 자신의 의무를 실천한다. 그러나 이는 “자기 마음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현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한 채 아집의 무기력으로 빠져드는 한낱 아름다운 영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젝은 아름다운 영혼이 “세계의 사악한 진로들을 개탄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세계의 재생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자기모순적 태도를 갖고 있으며, 복도훈 교수는 “금욕주의자가 온갖 향유를 금지하는 와중에 금지 자체를 향유하는 자기모순적인 태도와 한번 비교해볼 만하다.”고 전했다.

- 맥락화를 강조하기 또는 당사자성에 입각하는 방식으로 발화하기

정치적 올바름에서 등장하는 화법 중 하나는 지식이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한 발화행위의 부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이란 사유하는 서구 남성 주체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폭로하는 것인데, 복도훈 교수는 “있을 수 있는 비판이지만, 지젝의 입장은 이런 비판이 너무나 상투화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맥락화 하라는 명령의 상투화’는 이를테면 논쟁에서 점수를 따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된다. “누군가가 여성이라고 말할 때 그 여성은 어떤 맥락 속의 여성인가를 되물으며, 누군가가 남성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남성을 특정 맥락 속에 위치시키지 못하면 비난 받기 쉬운 상황”이 되고 만다. ‘맥락화 하라는 명령의 상투화’는 논쟁이나 문제, 비판을 무효화해버리는 기능을 하기도 하는데, “갤리선 노예를 바라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연구자의 이야기”는 그러한 예시 중 하나다. 

[갤리선의 노예가 노를 젓고 있는데, 절망한 몇몇 여성이 온몸에 쇠사슬에 묶여 있는 채로 배의 구석에서 신음하고 있는 모습이 발견되었다. 배가 어느 항구에 잠시 들렀을 때 항구를 거닐던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연구자는 갤리선의 노예가 '정말 우리 모두 죽을 것만 같아요'라는 말을 우연찮게 듣게 된다. 연구자는 갤리선 노예에게 지극한 동정심을 표하다가 이내 거두게 되는데, 그에 따르면 죽을 것 같다고 말할 때의 '우리 모두'의 '우리'는 백인노예의 특수한 위치를 보편화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지, 같은 층위에서 발화될 수 있는 것인지, '우리'가 담론적인 산물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화연구자는 즉시 갤리선 노예를 구해줄 방도를 모색할 수도 있었지만, '죽을 것만 같'다는 말이 정말로 고통을 발화한 것인지, 그때 고통은 과연 발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인지, '우리 모두 죽을 것만 같다고' 말한 갤리선 백인노예의 고통과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고통이 과연 동일한 '우리'의 공허한 범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인지, 유사 이래로 가부장제적 권력의 수혜자인 남자노예의 발화와 그러한 발화마저도 힘들여 낼 수 없어서 단지 '신음'하고 있을 뿐인 여성의 비가시적인 목소리를 과연 같은 층위에 놓고 함께 사유할 수 있는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백인남자와 흑인남자와 여성의 당사자적인 통각의 차이에 대한 인식론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지젝은 또한 정체성 정치의 당사자성에 대해서도 강한 의문을 제시한다. 지젝은 정체성 정치의 특수한 종(種)들 다른 종에 대해 자신의 관점과 종 그 자체에 대해 질문하는 방식으로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았다. 보편을 표상할 가능성을 내포한 각각의 정체성은 차이를 보전하면서 보편적인 연대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자신의 "진정성"을 다른 정체성과의 차이에서만 찾는 '변형주의적 조직'에 머무는 정체성 정치는 궁극적으로 '해방적 정치의 토대를 침식'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정체성 정치에 대한 논쟁은 옳고 그름에 대한 토론 대신에 도덕적 우월성이나 당사자성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축소되는 양상이 증가하고 있다. 정체성-당사자성에 입각하면 논쟁에서 자신이 옳고 타인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이 진리가 되고 타인을 비진리의 존재로 낙인찍는 것으로, 자신의 옮음과 타인의 틀림을 입증하는 것으로 변한다. 도덕적 우월성이 논쟁의 승패여부를 가르고, 금기가 논쟁을 대체하며, 논쟁의 어휘들은 검열의 대상이 된다. 

복도훈 교수는 “맥락화를 강조하기 또는 당사자성에 입각하는 방식으로 발화하기의 증가하는 특징은 결국에는 우리가 ‘의견의 차이’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보다는 ‘주체 위치의 차이’가 현저하게 중요해진 정체성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역설한다.”고 설명했다.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의 새로운 화용론(맥락화를 강조, 당사자성 입각 등)은 이데올로기적 간지(奸智)로 작동하면서 궁극적으로 권력담론이 정치적 올바름의 담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유하는 것으로 기능한다고 전했다. 적을 죽이는 일을 타깃의 소멸로, 민간인 살상을 부수적인 피해로, 해고를 구조조정이라고 부르면서 이뤄지고 있으며, 복도훈 교수는 “결국 그것은 라캉의 용어로 실재와의 마주침을 체계적으로 회피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 선험적 죄책감만을 가지는 방식에 앙가주망은 없다

복도훈 교수는 이밖에도 ‘라라랜드’를 둘러싼 정치적 올바름 비판, 미투 운동에 대한 논평 등에 대한 지젝의 저술을 살펴보았다. 영화 ‘라라랜드’에 제기됐던 ‘정치적으로 올바른’ 비판은 “게이가 많은 도시 로스엔젤레스를 배경으로 함에도 성소수자들이 등장하지 않느냐.”였다. 이에 대해 지젝은 질문을 돌려 “왜 하층 계급 노동자들이 등장하지 않느냐 라고 묻지 않느냐.”고 이야기한다. 지젝에 의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비평은 주인공인 젊은 백인남녀가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노동자라는 초보적인 사실을 간과할뿐더러, “영화에서 사랑 대신 경력을 택한 미아와 그 선택을 지지해준 세바스찬의 행위에서 대의에 대한 헌신과 사랑에 대한 충실성을 읽어낼 여력과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복도훈 교수는 “우리는 계급보다는 어떤 특정한 계급의 을들이 모욕당하고 수치스러워하는 것에만 훨씬 집중한다. ‘왜 그 사람이 계급적으로 노동자인지’보다는 ‘그 사람이 노동자인데 굴욕을 받고 모욕을 받는 것’에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계급적대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젝은 또한 최근 미국의 미투 운동과 관련하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성관계에서의 동의"를 칼럼에서 다룬 바 있다. 지젝은 "동의의 불확실성과 불가능함을 유지하는 것이 섹스의 가능성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또한 “말해진 것과 말해지지 않은 것의 미묘한 불균형과 긴장을 유지하는 대신 명시적인 계약서에 서명하는 방법으로 남녀 간의 불균등한 폭력을 피하고 성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발상에 회의적이며, 명시적 계약이야말로 시장의 계약과 섬뜩하게 닮는다.”고 비판한다. 다만 이에 대해 복도훈 교수는 "페이트먼이라면 지젝의 논평에 대해 불확실성의 동의의 열린 공간이 사실상 강간과 같은 비동의의 사건에서 여자들의 입을 틀어막은 채 불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온 역사를 상기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지젝이 동의의 애매하고 불확실한 열린 공간을 옹호할 때, 돌이킬 수 없는 회향적인 시선마저 엿보인다."고 보았다.

결론에서 복도훈 교수는 지젝이 정치적 올바름과 관련해 “초자아는 주체를 개인으로 호명한다”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소개했다. 정치적 올바름의 주체는 초자아에 의해 강박적으로 지배되고. 자기가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여러 불의에 대해 '선험적'(a priori)의 죄책감을 갖게 된다. 복도훈 교수는 “끊임없이 가책을 느끼며 불법적인 향유만 발견하는 방식 – 그런 식의 정치적 올바름으로는 돌파길이 없다. 앙가주망이 없다.”며 사르트르의 ‘가책’(또는 '추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가책'은 “내가 그 사태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으며, 죄인과 무고한 사람을 똑같이 질책하는 일이 내게는 전적으로 부당하다는 사실"에서 시작한다. 복도훈 교수는 “나는 근본적으로 사태에 연루되어 있고, 거기에 책임이 있으며, 모종의 투쟁과도 관련되어 있다는 불가피한 의식 속에서 앙가주망 혹은 팩트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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