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아르스' 참여한 신형철 평론가, '문학적 인식'은 윤리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가장 훌륭한 위로
'호모 아르스' 참여한 신형철 평론가, '문학적 인식'은 윤리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가장 훌륭한 위로
  • 육준수 기자
  • 승인 2018.07.20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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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성북문화재단은 지난 6월 21일부터 5주 동안 매주 목요일 연속 특강 프로그램 “호모 아르스”를 진행했다. 본 프로그램은 예술 일반과 미술, 음악, 문학, 영화 분야의 전문가들이 “문학과 예술은 어떻게 세계를 담고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이중 문학 분야를 맡은 신형철 평론가는, 지난 12일 성북구에 위치한 아리랑도서관에서 “문학의 인식적 가치”에 대한 강의를 펼쳤다. 신형철 평론가는 2005년 문학동네를 통해 평론가로 데뷔했으며, 2008년 “몰락의 에티카”를 펴내 많은 사랑을 받았다.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신형철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신형철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신형철 평론가는 자신의 직업이 비평가다 보니 평소 소설책을 많이 읽지만, “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론서를 읽지 않으면 도태될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때문에 “문학을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는 자신의 오랜 관심거리로, 소설 자체가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대해 많은 생각을 해왔다고 전했다.

문학적 인식의 구조 : 미메시스

문학이 얼마나 강력하게 인식적 가치에 결부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신형철 평론가는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본질을 미메시스(재현)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여기서 미메시스는 단순히 무언가를 싱크로율 높게 보여주는 재현이 아닌, “과감하게 본질만 남기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축소하는 선별행위”이다. 

미메시스의 예시로 신 평론가는 한 학생이 캐리커쳐를 그려준 경험을 이야기했다. 얼굴의 90%를 코가 차지하는 우스꽝스러운 그림이었다. 신 평론가는 “저는 기분이 나빴지만, 그것을 잘 그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쓸데없는 것들을 전부 빼고 중요한 점을 강조해서 그렸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신형철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신형철 평론가는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는 쾌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미메시스를 좋아한다며, “우리가 캐리커쳐를 보고 웃음이 터지는 이유 역시 그림을 보면서 이게 이 사람의 본질적 특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런 의미에서 미메시스를 통한 인식은 재인식이 아닌 최초의 인식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미메시스를 통해 “아, 이것의 본질은 이거구나!”라고 최초로 깨닫기 때문이다. 문학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신 평론가는 문학은 어찌 보면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미메시스화 하는 것”이라며 그렇기에 “문학은 인생의 본질적인 것이 건드려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문학적 인식은 우리의 삶을 두 번째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이런 문학의 인식의 구조에 대해서는 반박도 잇따른다. 문학이 커다란 지식을 가진 덩어리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문맹을 위해 그림으로 그려낸 ‘문맹자 성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카이 함머마이스터’의 비판을 인용했다. 

“훌륭한 리얼리즘 예술과 나쁜 자연주의 예술을 구별하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현실의 본질에 대한 올바른 재현과 부정확한 재현을 구별할 수 있는 또 다른 인식적 심급을 전제해야 한다. (...) 예술이란 이론적으로 얻어진 통찰을 예시하는 것 이외에 어떤 기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독일 미학 전통」 일부

강의를 진행 중인 신형철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강의를 진행 중인 신형철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신형철 평론가는 정말 소설을 좋아한다면 소설이 중요한 것이 되기를 바랄 것이고, 그렇다면 소설이 “인문사회과학으로 직진하면 쉽게 얻어낼 수 있는 인식을 향한 불필요하고도 불완전한 우회로일 뿐인가”라는 의혹과 대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며 신 평론가는 “소설이 문맹자 성서가 되지 않으려면 다른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신 평론가는 자신이 소설을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세계의 구조에 대한 명제적 진리”가 아닌, “내 과거와 미래의 경험에 대한 상상적 이해”라고 말했다. 

한 개인은 살면서 해보지 못한 경험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경험에 대한 질적 이해를 할 수 있다. 내가 못해본 경험을 할 수 있고, 해봤던 경험이라 할지라도 문학작품을 통해 더 깊게 알게 될 수 있다. 신형철 평론가는 “누구도 두 번 살 수는 없다.”만 “우리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을 언제나 두 번째 삶으로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이미 한 번 살았던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 육준수 기자
신형철 평론가의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 육준수 기자

그렇기에 신형철 평론가는 문학을 통해 겪게 되는 인식은 어떤 윤리적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지점이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인식은 감정과 분리된다고 하지만, 문학적 인식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타인의 상처나 고통을 인식”하게 해주므로 감정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철 평론가는 고든 그레이엄의 “예술철학의 중요한 것은 ‘경험에서 예술로가 아니라 예술에서 경험으로의 이행’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제인 오스틴의 “엠마”를 예로 들었다. 엠마를 읽을 때 작중 우울증 환자 우드하우스를 현실의 우울증 환자를 근거로 검열하기 쉽지만, 사실은 우드하우스를 통해 현실의 우울증 환자에게 접근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다.

물론 문학만이 우리 삶에 인식을 가져오고, 우리를 훌륭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형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나와 남이 다친 영혼을 달래는 길뿐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제가 생각할 때는 달리 방법이 없다. 가장 훌륭한 위로는 인식이며, 내가 다 경험할 수 없으니 우리는 문학작품을 읽을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문학을 통해 타인의 심정이 어떤지 알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하면 그 자체가 위로가 된다는 뜻이다.

독자에게 사인을 해주는 신형철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독자에게 사인을 해주는 신형철 평론가. 사진 = 육준수 기자

이날 신형철 평론가의 강의는, 도서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뜨거운 학구열 속에서 마무리 되었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을 가져온 독자들은 그에게 사인을 받는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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