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시인의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11. '부끄러움',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
[하린 시인의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11. '부끄러움',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
  • 하린 시인
  • 승인 2018.08.06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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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는 하린 시인의 시 단평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를 매주 연재합니다. 이번 감정은 "부끄러움" 입니다
뉴스페이퍼는 하린 시인의 시 단평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를 매주 연재합니다. 이번 감정은 "부끄러움" 입니다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창작 시기 1942.6.3.) 

< 해설 > 

2018년 7월 23일 월요일 오전 노회찬 의원의 죽음에 관한 뉴스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정치적 ‘음지’에서 사회적 ‘음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온몸으로 싸우신 분이 하루아침에 고인이 되어 버리다니, 그 충격과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슬픔 뒤에 찾아오는 울분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물론 정치권에도 국민들의 삶을 우선시 하는 좋은 분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노회찬 의원처럼 묵묵히 ‘음지’에서 고군분투하진 않았다. 정치 분야에서 ‘양지’는 당선될 확률이 높은 정당이나 지역구, 그리고 힘 있는 권력자 밑이다. 그런 ‘양지’에서는 외부적으로 드러나 있어서 능력을 인정받기 용이하고, 대다수 유권자들이 좋아하는 ‘입맛’에 맞춰 정치를 펼치면 정치인으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런데 노회찬 의원은 그러지 않았다. 당선될 확률이 적은 정당에서 힘없는 노동자와 서민들의 편에 서서 진정성 있게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던 그가 단 한 번의 실수로 자살까지 하다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기에(이것은 누가 봐도 확실하다. 노회찬 의원은 그 당시 누군가에게 청탁을 들어줄만한 힘이 없었다.) 아쉬움과 슬픔은 평생 필자를 따라 다닐 것이다.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지 않은 4000만원’. 이 사실을 안고 노회찬 의원이 만약 살아있었다면 어떠했을까? 법정 싸움을 하는 내내 자신을 지지해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겼다는 생각 때문에 내내 괴로워했을 거다. 양심의 가책과 부끄러움으로 판결이 날 때까지 자기 자신을 학대하면서 암울한 시간을 보냈을 거다.  

그런 노회찬 의원의 죽음 앞에 떠오른 시인이 바로 윤동주 시인이다. 윤동주도 일제 강점기 때 자신을 학대하듯 내내 ‘부끄러움’을 안고 살았던 시인이다. 일제강점기 상황에서도 시인들에게 분명 ‘양지’와 ‘음지’는 따로 있었다. 일제에 협조하면 ‘양지’에서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이고, 일제에 저항하면 ‘음지’에서 가혹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윤동주는 분명 ‘친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끊임없이 부끄러웠다. 왜 그렇게 부끄러움을 느꼈을까? 그가 살았던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이 되면 일제에 협조하는 일이 일반화 되고 만다.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시인들 또한 친일시를 쓰게 되었고, 친일을 도모하는 강연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한 분위기였기에 윤동주는 오히려 더더욱 떳떳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윤동주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당하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자아의 양심 때문에 부끄러움을 집요하게 펼쳐나갔다.   

「쉽게 씌어진 시」에도 그러한 태도가 반영됐다. 불합리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편하게 시를 쓴 것에 대해 내내 부끄러워했다. ‘천명(天命)’이란 하늘이 준 타고난 운명이란 뜻도 있지만 하늘의 명령이란 뜻도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윤동주는 시인으로서 ‘천명’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시대의 아픔과 불합리를 적극적으로 노래하는 것이 ‘천명’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자꾸 개인적인 것을 노래하고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나태하게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육첩방’이 있는 일본 제국주의 국가에서…. 그런 와중에도 윤동주는 자기 연민과 희망에 대한 의지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부끄러운 ’나’와 그런 ‘나’를 가엽게 여기는 ‘나’를 솔직하게 표현했다.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라고 명명하며, 부끄러움과 자기 위안적인 정서를 진실되게 언술했다. 이런 심리는 「자화상(自畵像)」에 나온 화자의 심리와도 상통한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 가만히 들여다 볼 때 거기에 비춘 ‘나’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고 못나 보여 화자는 되돌아온다. 되돌아오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런 ‘나’도 ‘나’의 또 다른 하나의 본질이구나, 하고 여겨져서 다시 또 우물가로 가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본다. 못난 마음과 부끄러움이 또다시 밀려온다. 그렇게 부끄러움과 자기 연민이 교차되면서 형상화된 것이 윤동주의 「자화상」이다.  

이것이 바로 윤동주 시가 갖는 매력이다. 인간적인 솔직성과 인간적인 ‘부끄러움’을 진정성 있게 표출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시대성을 뛰어넘는 떨림과 울림을 맛보게 했다. 거기에 허무주의로 떨어지지 않는 극복의지까지 덧붙여져 시의 감동을 극대화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를 제시하여, 암울함 속에서도 희망과 ‘별’을 품는 의지를 피력했다.  

우리 문단엔 친일시를 쓴 시인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필자는 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그 친일시를 읽고 당신의 아들이나 손자가 학도병에 지원해 일제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면 당신은 그 시인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또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시인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분명 일제강점기 시대의 시인들은 오늘날 시인들이 갖는 사회적 지위와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난다. 그 시대 시인들은 엄청나게 높은 대중적 인지도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말과 행동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양심과 부끄러움이 조금이라고 있었다면 그들이 선뜻 친일시를 썼을까?  

친일을 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시인들과 편법과 비리를 저지르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오늘날 정치인들은 너무나 닮았다. 그리고 타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심 때문에 부끄러움을 내내 가졌던 윤동주 시인과 ‘티끌’만한 허물 때문에 부끄러움을 엄청나게 느껴 고인이 된 노회찬 의원도 닮았다. 어느 쪽이 역사에 오래 기억되어야 하겠는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명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하린 시인 약력

하린 시인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이 있고 연구서로는 정진규 산문시 연구가 있음.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중앙대, 한경대, 광주대, 협성대, 서울시민대, 열린시학아카데미, 고양예고 등에서 글쓰기 및 시 창작 강의를 함. 첫 시집으로 2011년 청마문학상 신인상을, 두 번째 시집으로 제1회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함. 2016년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시클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 사업에 선정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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