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지난 17일 명동역 인근에 위치한 문학의집 서울에서는 작고한 시인의 문학을 조명하고, 유족들의 회고담을 듣는 ‘그립습니다 금요문학마당’ 행사가 진행됐다.
이날 행사는 196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바람’이 당선되고, 1962년 현대문학 3회 추천을 완료하며 작가로 데뷔한 故 이성부 시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자리였다. 고 이성부 시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에 참여했으며, 28년 동안 한국일보사의 기자로 일했다. 저서로는 시집 “이성부 시집”, “지리산”, “백제행”과 시선집 “평야”, “너를 보내고” 등이 있고 현대문학상과 경희문학상, 편운문학상 등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행사의 첫 순서를 맡은 이숭원 문학평론가는 고인의 문학세계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회고담을 맡은 고인의 따님 이슬기씨와 지인 김영재 시인은 ‘자신이 기억하는 이성부의 모습’에 대해 말했다. 이들은 고 이성부 시인을 어떤 작가로, 어떤 부모로, 어떤 지인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시인 이성부의 문학세계

이숭원 평론가는 “이성부 시인은 많은 문인을 배출한 광주고등학교의 문예반 출신으로, 당시 광주 일원에서 진행된 모든 문학대회에서 1등으로 당선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고교를 졸업하고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할 당시에는 이미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인이었으며, 군복무를 마치면서는 동아일보에 투고한 시 “우리들의 양식”이 당선됐다고 덧붙였다. 이성부 시인은 젊은 나이에 데뷔하여 ‘이성부 시집’ 등 많은 작품을 펴내, “당시 가장 활발한 창작활동 벌인 시인으로 평가 받았다.”는 설명이다.
이 평론가는 이런 이성부 시인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으로 시 ‘봄’을 꼽았다. 그러며 ‘봄’의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는 첫 구절은 “유신 체제 속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기다림마저 잃은 암담함 속에서도 결국은 봄이 오는 역설적인 상황”을 통해, 현실에 남아있는 일말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 또한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라는 마지막 구절은 “우리에게 온 봄이 그냥 온 게 아니라, 누군가가 싸우고 이겨서 온 것을 의미한다.”고 부연했다.
이숭원 평론가는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이성부는 우리 삶에 시련이 있어도, 봄은 먼 데서 승리를 거두고 우리를 자연스레 찾아온다는 것을 사십여 년 전에 알려준 시인”이라며, 지금도 “이런 시인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이야기했다.
더해 “이성부가 살아있을 당시 그에게 광주항쟁은 벽이고 아픔이었다.”고 이숭원 평론가는 말했다. 고인은 항쟁 당시 한국일보의 기자로 있으면서도, 시대의 참상에 아무런 발언도 하지 못하고 기사도 쓰지 못했다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꼈다는 것. 이 평론가는 “그 고통을 삭이느라 이성부는 밤이 되면 술만 퍼먹었다. 또한 자기 할 일을 못 했다는 자책감으로 한동안 자학의 세월을 보내고 시를 쓰지 못했다.”며 “건강했던 그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건 이 시대에 대한 울분 때문이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아버지, 가족, 친구로서 이성부가 보여준 인간미

이슬기씨는 “아버지는 우리 삼남매에게 항상 책을 가까이 하라고 하셨다.”며 “그 바람이 얼마나 크셨는지 중학생 되던 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가져다주시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책의 두께가 버거워 한두 달 씨름하다 끝내 다 읽지 못하고 덮었다.”는 이슬기씨는 “아버지는 우리가 책을 통해 지혜를 얻길 바라셨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려운 책보다 아버지를 통해 삶에 가치 있는 지혜를 얻은 듯하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가 여느 때보다 무더웠던 점을 말하며, 이슬기씨는 “아버지는 우리가 덥다고 투덜거리면 같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여름은 원래 더운 거라고 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계셨으면 이 더위에 대해 ‘조금만 참아, 곧 가을이 올 거야’라고 말하셨을 것 같다.”며 “아버지는 항상 인내하고 긍정적인 마음 알려주셨다.”고 이야기했다.
고 이성부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6년이 지났다. 하지만 이슬기씨는 “아버지의 목소리, 말투, 다정다감한 표정, 함께 보낸 추억은 우리 삼남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며 특히 “아버지가 기자생활을 하면서 알아둔 음식점에서, 손주들까지 불러 모아 가족 간의 정을 두텁게 쌓았던 일”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며 “아직도 그때 다니던 음식적을 가족들과 다 같이 가곤 합니다. 그리고 당시와 변함없는 음식을 맛보며 아버지를 떠올립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김영재 시인은 “이성부 선생은 저와 같은 고향을 가지고 함께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며 “저한테는 고향도, 시도 형이라 막역하게 호형호제를 하는 사이였다.”고 이야기했다.
김 시인은 “성부 형님은 등산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사람”이었다며, 시집 “지리산”을 집필할 때에는 함께 산에 오르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러며 “오늘 이 시간에 형님이 계셨다면 행사를 마치고 1박 2일 산행을 떠났을 것 같다. 지금도 함께 여행을 다니고, 술을 마시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또한 “정말 형님은... 좋은 형이면서 나쁜 형이었다. 아직도 세상을 떠났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다.”는 김 시인의 말에, 고 이성부 시인의 아내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이성부 시인을 추억하고 있는 가족들은 물론 함께 작품 활동을 해온 문학인들의 참여 속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행사 뒤에는 김유미 소프라노의 음악 공연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