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시인의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12. '불망(不忘)', 류근 시인의 '반가사유'
[하린 시인의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12. '불망(不忘)', 류근 시인의 '반가사유'
  • 하린 시인
  • 승인 2018.08.3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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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는 하린 시인의 시 단평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를 매주 연재합니다. 이번 감정은 "불망(不忘)" 입니다
뉴스페이퍼는 하린 시인의 시 단평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를 매주 연재합니다. 이번 감정은 "불망(不忘)" 입니다

반가사유

류근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현실도 미래도 종말도 아무런 희망 아닌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 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 "상처적 체질", 문학과 지성사, 2010

 

<해설> 

대중가요의 90% 이상이 통속적인 사랑과 이별을 주요 모티브로 삼고 있다. 단순하게 소재적 측면으로 접근하면 그 노래들은 전부 식상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대중들은 통속적인 노래에 끊임없이 열광한다. 왜 일까? 노래는 단순하게 하나의 요소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분위기 있는 멜로디에 공감대가 큰 가사가 더해져 묘한 매력을 자아낸다. 통속적인 내용이어도 흡입력이 극대화 돼 심금을 울리고, 오랫동안 아니 죽을 때가지 뇌 속을 떠돌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통속’을 경박스러운 성질의 것으로 무조건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통속’이란 말을 들으면 ‘근엄한’ 시인들은 ‘가볍다’, ‘경박스럽다’, ‘깊이가 없다’ 등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창작의 과정 속엔 ‘통속’이 처음부터 개입되어 있다. 창작은 기본적으로 시적 대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출발한다. ‘사랑’이 없다면 시적 대상을 진지하게,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의 종류와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자아와 타자에 대한 진지한 ‘끌림’에서 시작된다. 그러니 우리는 시를 쓸 때 ‘통속’적인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돌멩이’가 소재라면 통속적으로 돌멩이의 외연과 내적 속성을 지독히 사랑해야 차별화된 돌멩이를 만날 수 있다. 김소월과 한용운이 창작한 다수의 시들이 ‘통속’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만 인지해도 ‘통속’의 가치성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무조건 ‘통속’을 가벼운 행위로만 치부하지 말고 ‘통속을 말하면서 통속을 뛰어넘는’ 작품이 되고 있느냐? 아니면 ‘통속’ 자체로만 끝나고 있느냐?를 따져 물어야 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일상을 말하면서 일상을 뛰어넘는’ 작품을 창작해야 한다고 자주 들어왔다. 그러나 일상은 일상일 뿐인데 어떻게 일상에서 벗어난 ‘비범함’을 획득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가능한 일이다. 시의 본바탕이 일상임을 대다수 시인들은 알고 있다. 시인들은 ‘일상을 뛰어넘는’ 일상을 형상화하기 위해 일상 안쪽에 서린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어 일상을 통해 개성적으로 형상화한다. 일상적 현상 안에 상징이나 암시 기법이 작용되게 하거나 시적 반전과 시적 암시 등을 통해 ‘울림’과 ‘번짐’이 자리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류근 시인의 「반가사유」는 그러한 창작방법에 해당하는 좋은 작품이다. 작품의 모티브는 통속적인 ‘사랑’과 ‘이별’로 되어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관계성이 단순하지 않다. 이별 상태에 놓인 ‘나’와 떠난 ‘당신’의 의미를 단순화시키지 않고 다층적으로 다루었기에 관계성이 내밀하게 아프게 다가온다.  

이 시에 깔려있는 근본 정서는 ‘불망(不忘)’이다. 즉 ‘잊지 못함’이다. 일반적으로 이별 후에 다가오는 정서엔 ‘애증’, ‘그리움’, ‘허탈’, ‘무기력’, ‘자학’ 등이 있는데, 「반가사유」의 경우 ‘사랑의 후일담’으로 남겨진 화자가 ‘잊지 못함’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 있는 태도는 이상적인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하지만 ‘바람’의 원인을 유추해보면 분명 ‘당신’을 잊지 못해서 ‘당신’과 다른 태도와 성격을 가진 여자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는 이전에 ‘사랑 같은 걸 믿는 여자’와 연애를 하다가 어떤 장애에 부딪쳐 헤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상반된 태도와 성격을 가진 여자와 거리낌 없이 저물도록 끝까지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자꾸 ‘다른 태도와 성격을 가진 여자’와 ‘당신’이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성이 이상형으로 강하게 자리 잡으면 계속해서 같은 외모와 성격을 가진 사람을 반복적으로 사랑하게 되므로, 화자가 갈망하는 여자는 결국 예전의 여자와 많이 닮아 있을 확률이 있다. 이것이 「반가사유」가 가진 묘한 매력이다. 솔직성 후에 두 가지의 암시성이 나타나 화자에게 더 가까이 가서 자세히 나머지 이야기를 듣고 싶은 충동에 젖게 했다.  

류근은 ‘통속을 말하면서 통속을 뛰어넘는’ 작품을 능수능란하게 창작할 줄 아는 노련한 시인이다. 그의 시집 속 다수의 작품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사랑과 이별의 감정을 단순화 시키지 않고 다층적으로 다각적으로 접근해서 공감대 있게 실감나게 형상화해 낸다.  

바야흐로 지금 시단은 다양성의 시대이다. 어떤 한 조류가 시단의 중심축이 되어 전체를 이끌지 않고, 다원주의처럼 여러 개의 중심축이 형성되어 미학성을 발휘하고 있다. 류근의 시도 분명 어떤 하나의 축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의 행보가 맹목적으로 우직하기를 한 명의 독자로서 기대해 본다. 

 

하린 시인 약력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이 있고 연구서로는 정진규 산문시 연구가 있음.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중앙대, 한경대, 광주대, 협성대, 서울시민대, 열린시학아카데미, 고양예고 등에서 글쓰기 및 시 창작 강의를 함. 첫 시집으로 2011년 청마문학상 신인상을, 두 번째 시집으로 제1회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함. 2016년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시클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 사업에 선정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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