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설렘', 김병호 시인의 '환한 길 하나' - 하린 시인의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14, '설렘', 김병호 시인의 '환한 길 하나' - 하린 시인의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 하린 시인
  • 승인 2018.10.04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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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는 하린 시인의 시 단평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를 격주 연재합니다. 이번 감정은 "설렘" 입니다
뉴스페이퍼는 하린 시인의 시 단평 "당신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를 격주 연재합니다. 이번 감정은 "설렘" 입니다

 

환한 길 하나 

김병호(1971~) 
  
홍제동 봄산부인과 병원 앞 
수줍은 아내와 난감한 나는 
서둘러 친가와 처가에 소식을 전하는데 
  
아이가 먼저 닿아 있었다 
  
고향 어머니는 산기슭에서 내려와  
방문 앞에서 서성이던 호랑이를 맨발로 안으셨고  
처제는 무지개 환한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깨물었다고 하고 
시골의 처외할머니는 댕기머리 처녀가 되어 
꽃뱀 한 마리를 치마에 담으셨단다  
  
호랑이로 복숭아로 꽃뱀으로  
깜깜한 길을 내달은 아이를 
홍제동 비탈길 검은 가지의 감꽃들이  
환히 비춘다 
  
내가 잠시 우주의 저녁이었을 때 
한 숨 한 숨  
거닐었던 숨들이 모여 별자리를 만들고 
내가 다시 바다의 새벽이었을 때 
한 눈 한 눈  
몸 비벼 만든 종소리들이 아침을 이끌었듯이 
  
슬그머니 아내의 배에 손을 가져다대면  
아내의 오월 한복판엔 잎 푸른 감나무가 자라  
지극한 우주가 감씨마냥 잠기고 
  
손끝에 타오르는 환한 길 하나  

― 달 안을 걷다, 천년의 시작, 2006.

 

<해설>  

‘설레는 일을 내가 언제 만나 보았나?’ ‘설레던 순간이 나에게도 찾아오긴 했었나?’ 이런 자조 섞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독자 여러분 주변에 있다면 김병호 시인의 「환한 길 하나」를 읽어보라고 권해주길 바란다. 지금 암울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도 분명 어머니 자궁 속에 있다가 태어나서 ‘환한 길 하나’가 되었을 것이고, 결혼해서 자식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환한 길 하나’를 두 번째로 경험했을 것이며, 결혼한 자식이 자손을 낳아 소식을 전해 왔다면 ‘환한 길 하나’를 세 번째로 만났을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운명적으로 ‘환한 길 하나’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직간접적으로 ‘환한 길 하나’를 경험하게 해준다. 그러니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 설렘을 안고 태어난 존재인가?

시 속 화자는 산부인과에서 “수줍은 아내와” 함께 임신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난감하다. 왜 난감했을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언술은 없지만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의 난감함은 아니다. 아마도 조금 더 늦게 소식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조금 앞서 찾아왔기에 조금 일찍 놀라고 있는 듯하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의 임신 소식일 수도 있고, 아이를 맞이할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의 임신 소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일찍’이 아니었다. 예정된 설렘이었다. “서둘러 친가와 처가에 소식을” 전하면서 예지몽을 통해 상징화된 잉태가 운명적으로 다가오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호랑이로 복숭아로 꽃뱀으로” 꿈을 통해 “아이가 먼저” 이 세상 안쪽에 “닿아 있었다”. 놀라운 전조(前兆) 앞에서 화자는 진지하게 생각한다. 이것은 자신에게 찾아온 난감한 일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패턴에서 찾아올 수밖에 없는 우주적 결과물이라는 것을…. 화자가 “우주의 저녁이었을 때”(저녁의 상태처럼 삶에서 어두운 상태를 서서히 맞이하고 있을 때) “한 숨 한 숨/ 거닐었던 숨들”이 모여서 아름답고 환한 별자리를 만들었고, “바다의 새벽이었을 때”(바다의 새벽처럼 막막한 상태에서 어둠을 벗어나려 몸부림칠 때)는 “한 눈 한 눈/ 몸 비벼 만든 종소리들이” 눈부신 아침을 다가오게 만들었다. 그러니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이도 어차피 맞이하게 될 또 하나의 ‘환한 별자리’와 ‘눈부신 아침’이었던 것이다. 이제 임신 소식은 아이에게도, 화자 부부에게도 모두 축복이자 설렘이다. “홍제동 비탈길 검은 가지의 감꽃들”이 세 사람의 행복한 길을 환히 비춰 주는 모습이 독자들 머릿속에 따뜻하게 연상된다.

이 시에서는 독특하게 ‘저녁’ ‘새벽’ ‘깜깜한’ ‘검은’이라는 어두운 이미지의 단어가 ‘탄생’의 순간과 ‘어울리지’ 않게 네 번이나 쓰였다. 이것은 시인이 그런 단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기에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시를 감상할 때 우리는 종종 관습화된 인식에 의해 어떤 단어를 성급하게 규정지어 감상의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시를 감상할 때는 앞뒤 정황과 문맥이 품고 있는 내포성을 참고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편안하게 감상해야 한다. 이 시에 쓰인 네 개의 단어도 모두 하나의 의미로만 규정될 수 없다. 단어들은 힘든 상황을 암시하는 동시에 무한성을 품은 열린 상태를 의미한다. 자궁 속은 얼마나 어두운 상태이고 “깜깜한 길”인가? 그러나 그것은 가능성을 품은 충만한 상태이다. 빛을 만나려면 어둠을 반드시 거쳐야 하듯이 화자도, 아내도, 아이도 ‘한 숨 한 숨’, ‘한 눈 한 눈’을 경험하며 천천히 어둠을 통과해야 ‘별자리’와 ‘아침’을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네 개의 단어들은 모두 “지극한 우주”를 품은 채 ‘환한 길 하나’를 설렘으로 만날 수 있게 해주는 필수조건이 되는 셈이다.

김병호의 「환한 길 하나」는 존재의 탄생이 갖는 소중함과 설렘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따뜻하고 맑은 서정시이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소원해진 오늘날, 자기 자신이 품고 있던 ‘설렘’을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진 오늘날,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감동이 번져나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공유해서 ‘설렘’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설렘’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하린 시인 약력

2008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이 있고 연구서로는 정진규 산문시 연구가 있음.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중앙대, 한경대, 광주대, 협성대, 서울시민대, 열린시학아카데미, 고양예고 등에서 글쓰기 및 시 창작 강의를 함. 첫 시집으로 2011년 청마문학상 신인상을, 두 번째 시집으로 제1회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함. 2016년 한국해양문학상 대상 수상. 시클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 사업에 선정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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