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인 동인문학상 논란] 야비한 자연주의, 그 친일논리의 허약한 본질 - 김동인의 경우. 1부 김상천 평론
[친일문인 동인문학상 논란] 야비한 자연주의, 그 친일논리의 허약한 본질 - 김동인의 경우. 1부 김상천 평론
  • 김상천 문예비평가
  • 승인 2018.11.14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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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비한 자연주의, 그 친일논리의 허약한 본질 
-김동인의 경우

김상천 평론 "야비한 자연주의, 그 친일논리의 허약한 본질 - 김동인의 경우".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김상천 평론 "야비한 자연주의, 그 친일논리의 허약한 본질 - 김동인의 경우".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1. 문제제기 

[뉴스페이퍼 = 김상천 문예비평가] ‘한국 문단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동인문학상 수상의 적절성 여부에 대해 가타부타 사회적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 나는 일개 비평가로서 어려운 판관의 위치에 서 있거니와, 왜냐하면 판관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한 작가와 그의 작품의 논란에 대한 비평 행위가 일종의 심판 행위로서 그 내용이 공정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 결정 또한 가차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사회적 논란에 대해 명쾌한(?) 판결을 내리기 전에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에서 친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문인들과 그들을 기리는 문학상 수상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이 관습적 행위에 대해 심한 자책을 느끼지 않을 수 없거니와 그것은 머 우리가 마치 중풍이 든 환자처럼 마비된 의식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무엇보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1세기가 다가오는데도 우리는 아직 저 근대라는 정신의 독립이 이에 미치지 모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성이 나의 흐린 눈을 따갑게 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얼마 전에 <뉴스페이퍼>의 청탁으로 일제의 만행을 미화하고 독재자를 찬양한 미당의 노예적 삶으로 일관한 행적에 대해 가차 없는 칼을 휘둘렀거니와, 즉 그가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민족문학 운운했지만 사실은 순수를 가장하여 정치적 시녀 노릇을 자임하고 민족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는데 급급했던 가장 야비한 기회주의자였음을 좀 신랄하게 논파한 바 있다. 

자, 그렇다먼 ‘소설가’ 김동인은 어떤가. 그는 한국문학사에서 ‘근대 소설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되어 왔다. 좌파 계열의 임화조차 “조선 현대소설은 진정하게는 김동인에게서 시작한다”(‘소설문학의 20년’, [문학사], 소명출판)라고 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문학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문인과 그를 기리는 상에 대해 이견이 멈추지 않고 있는가. 이런 사실은 앞의 얘기대로 문학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문인과 그를 기리는 상에 대해 이견이 있다먼 다음과 같은 문제가 하나의 사실관계로서 검증되어야 함을 문제제기한다.  

가, 그는 과연 근대 소설의 진정한 선구자였나 

나, 그는 과연 전범이 될 만한 모범적인 작가였나 

만약 가, 나가 사실이라먼 논란의 의미가 없을 테고, 가, 나가 사실이 아니라먼 한국문학사는 다시 써야 하고, 그를 기리는 문학상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잘못된 평가에 기초해서 상을 주고 기리는 것은 사회적 신뢰성과 논리적 정당성에 반하는 것으로 사회의 기초질서를 훼손하는 매우 몰가치하고 심각한 비도덕적 처사이기 때문이다.  

2, 그는 과연 근대 소설의 진정한 선구자였나 

소설가 김동인이 과연 한국 근대 소설의 진정한 선구자였는지를 검토하려먼 우선, 근대가 무엇인지부터 소명되어야 하고 이것과 소설의 관계가 규명되어야 하며, 그런 다음 김동인이 이와 관련하여 과연 어떤 선구적인 역할을, 즉 다른 사람에 앞서서 어떤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 일을 진실하게 실행하였는지를 좀 ‘주의깊게closely’ 검토해야 한다.  

먼저, 근대의 개념부터 보자. 근대는 머 고대, 중세, 근대, 현대 할 때처럼 쓰이는 역사적인 시간의 개념으로 여기서 말하는 근대modern는 현대와 가까운 시대라는 함의를 지니고는 있지만 본래 ‘모던’이라는 단어는 ‘모데르누스Modernus’라는 라틴어의 형태로 5세기 말엽 로마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공인되었던 당시와 그 이전 이교도였던 로마의 과거를 ‘구별짓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후 모던의 의미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것’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거니와 그것은 특히, 근대 과학에 의해 고무되어진 지식의 무한한 발전과 사회와 도덕의 개선을 향한 무한한 진보에의 신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니까 근대의 모던이라는 개념 일반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과거와는 다른 차이와 구별과 진보라는 개념이고, 이런 차이와 구별과 진보에의 신념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로 우리는 저 유명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생각한다’는 뜻의 라틴어) 명제를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생각할 수 있는데, 역사는 명제들의 다툼의 역사라는 말을 적용해본다먼 이 데카르트의 명제야말로 실로 역사적인 명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자, 여기 데카르트의 명제-머 사실은 ‘주관적 관념론’이기는 하지만-가 근대를 축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근대의 핵심은 바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이 생각하는 주체가 곧 신이 아니고 인간인 ‘나’라는 사실이다. 이는 그대로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는 내가 아닌 외부 집단의 모럴이 하나의 움직일 수 없는 도덕률로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고, 이 외부 집단의 모럴을 상징하는 게 바로 신으로 상징되는 비가시적 실체였었다. 이 신을 모셔둔 가시적 실체가 세속의 신전, 성당이었다. 즉 고중세는 거대하고 신성한 건축이라는 공간이 지배하는 세계질서가 온존했던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신을 중심에 모시고 있던 고중세적 건축 공간이 갑자기 무너진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에 따른 책에 의해서였다. “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 자, 이것은 문맥상 이것(책)이 저것(건물)을 죽일 것이라는 수수께끼처럼 무시무시하고 알쏭달쏭한 말이거니와 사실은 신의 말씀으로 상징되는 고중세의 구술문화가 종언을 고하고 인간의 지식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문자문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노트르담 성당 신부의 경탄과 두려움 섞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즉 근대의 주체는 바로 출판인쇄를 통해 독서문화를 주도한 계몽적 지식인들이고, 이들이 당시의 ‘일상어romance’를 중심으로 맞춤법을 제정하다보니 근대의 맞춤법은 자연 독서문화에 맞게 ‘형태소’를 중심으로 한 자의적인 말 꼴form세우기였고, 그것은 또한 그것대로 ‘지방어’를 매개로 한 하나의 나라세우기nation-building과정으로서 ‘상상된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라는 민족국가 형성의 근대적 과제와 물리는 부분이었다. 즉 근대는 '인쇄자본주의print capitalism'라고 불릴 수 있는 문자문화의, 독서문화의, 지식인들의 세계였다고 볼 수 있다.  

자, 여기! 근대 지식인의 멘탈리티를 잘 보여주는 게 바로 노트럴한 ‘중립성’이고 ‘개별성’이지 않은가. 중립성은 대상과의 심미적 거리를, 개별성 또한 집단에 대한 심리적 거부를 요구한다. 이는 그대로 문자문화를 주도한 지식 계몽들이 자신들을 하나의 근대적 ‘자아’로, 독립적 ‘주체’로, 합리적 ‘이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말한다. 루카치 식으로 말해서 근대는 ‘선험적 고향transcendental home’이라는 신과의 유대가 끊어진 시대임을 암시하는 것이고, 이는 또 그대로 근대의 개인이 신을 상실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의 새로운 신을, 즉 도덕을, 가치를, 형식을 세워나가지 않으먼 안 되었던 시대를 맞았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이성적 인식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근대의 소설의 탄생을 생각해 볼 수 있고, 근대를 대표하는 이 소설에 ‘시간’이 요청되는 이유를 상정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으로 상징되는 고향과의 유대가 끊어졌다는 것은 이른바 ‘문제적 개인’이 이제 새로운 신을 찾아 출발을 해야 할 현재를 각성시키고, 이는 그대로 과거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주입시키고, 대상에 대한 ‘미적 거리두기’라는 형식을 요청하게 됨을 예측하게 된다. 즉 서사시가 고대의 신정론이라먼, 소설은 근대의 형이상학이다.  

여기서 우리는 근대 지식인의 노트럴한 중성적 멘탈리티를 반영한 소설에서 왜 '객관적 묘사'가 요청되고 서사시와 비극이 공간의 지배를 받는 현재형의 문학인데 반해, 소설이 왜 시간의 지배를 받는 ‘과거형’의 문학인지를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즉 ‘이니’, ‘해서’에서 ‘한다’로, ‘다’로 어형의 중성적 변화를 겪게 되고, “근대문학의 내러티브는 ‘ㅆ다’라는 과거형에 의해 완성된다”는 ([가라카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명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자, 여기 근대라는 것이 하나의 ‘자아’에 대한 인식이고, 이를 나타내기 위해 하나의 ‘차이’의 형식으로서 소설이라는 새로운 형식이 요청되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과거형이 필요했다먼 김동인은 과연 그 어떤 방법을 가지고 한국 근대 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나 보자. 

근대가 민족국가로서의 나라세우기 과정이고, 근대문학이 소설의 탄생 과정이라먼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김동인의 근대문학 형성 과정과 ‘일단’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 즉 1919년 삼일독립운동의 힘으로 나라세우기가 일어난 그 해에 김동인 또한 조선의 소설을 탄생시키는데 주춧돌을 놓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좀 구체적으로 보자. 김동인은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그러니까 1919년 2월 8일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문’의 발표가 있던 날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등 몇몇 동인들과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를 창간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로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그가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조]를 창간하먼서 가졌던 의식은 그대로 근대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어서, 즉 그는 창간호에 실린 [약한 자의 슬픔]이라는 최초의 단편 소설을 통해 구어체를 확립하고, 3인칭 ‘그’를 처음으로 썼으며, 특히 과거형을 과감하게 구사했다는 점을 볼 때, 그가 한국 근대소설의 선구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즉 그는 한국 근대소설의 피오닐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고 볼 수 있다.  

what matters,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무슨 소린가. 그의 소설 작품이 비록 근대적인 산문이 요구하는 여러 형식적 요건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용이고, 그 내용 속에 드러난 삶의 태도이다. 왜냐하면 태도야말로 궁극적으로 작가적 인식을 드러내고 지향 가치를 엿볼 수 있는 세계관의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먼 그가 그토록 호언하는 [약한 자의 슬픔]을 보자. 이 작품의 내용은 주인공 강 엘리자베트가 K남작과 불의의 관계를 맺은 후 쫓겨나 소송을 제기하나 재판에 지고, 유산한 후에 자살을 꾀하나 이 역시 실패하고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참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도입을 보자.

“가정교사 강 엘리자베트는 가르침을 끝낸 다음에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이제껏 쾌활한 아이들과 마주 유쾌히 지낸 그는 찜찜하고 갑갑한 자기 방에 돌아와서는 무한한 적막을 깨달았다. 
......”

자 이것은 오늘 현시점에서 읽어 보아도 그 모던한 감각을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국적인 이름의 설정과 단정한 문체, 자신의 내면을 분석하는 심리적 자아의 등장 등...무엇보다 당시로서는 처음 시도되었던 구어체 문장과 3인칭 대명사 ‘그’의 사용, 그리고 과거형의 과감한 도입, 이것은 과연 김동인이 형식적으로 근대적 멘탈리티를 드러내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는 근대 소설사의 한 쾌거임에 틀림없다. 그는 이런 자신의 작업에 대해

“‘한다’ ‘이라’ ‘-인다’ 등의 현재법 서사체는 근대인의 날카로운 심리와 정서를 표현할 수 없는 바를 깨달았다. 현재법을 사용하면 주와 객체의 구별의 명료치 못함을 깨달았다. 우리는 감연히 이들을 척하였다.” 

- 김동인, ‘조선근대소설고’

라고 할 정도로 그가 ‘근대적’ 의식(구별의 명료함)의 소설적 문법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 그렇다먼 이건 그대로 김동인의 것일까. 즉 김동인은 어떻게 이렇게 형식에 대한 명료한 근대적 지식을 터득하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김동인이 소설을 배우게 된 것은 전혀 일본 내지內地에 유학하게 되먼서다. 그는 미술을 배우려다 그만두고 어떤 계기로 소설을 배우게 되었는데, 당시는 일본의 근대문학이 형성되던 무렵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일본근대문학이 메이지 유신의 군국주의, 제국주의화 과정에 놓이게 되먼서 정치적 좌절을 내면화시키는 과정에 놓여있(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던 결과, 김동인이 받아들인 일본근대문학은 매우 자연주의적인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근대적인 민권의식이 좌절되먼서 나타난 일본의 자연주의가 마치 프랑스의 그것([마담 보바리])처럼 가령, 루카치는 [역사소설론]에서 플로베르의 자연주의적 성취를 두고 ‘감정의 야비화’라고 힐난하먼서 말하기를, 보바리의 환상과 환멸에는 1789년에서 1848년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부르주아 혁명이 광범한 대중의 현실적 열망을 채워주지 모함으로써 초래된 민중의 원한과 분노가 극히 말초적인 신경으로 은유화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그대로 일본의 근대소설이 정치적 좌절과 연계되먼서 내면의식에 기울고, 사소설화私小說化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는 이유와 그 본질상 다르지 않다. 그는 당시 명치학원의 대선배로 자연주의 소설가로 이름이 높았던 시마자키 도손에게 큰 영향을 받았(김동인, ‘문단 30년의 자취’)는데, 김동인이 이렇게 일본의 근대문학을 대변하는 자연주의 문학을 이식받는 과정은 곧 조선의 주권이 좌절되먼서 나타난 허무의식과 다르지 않고, 이는 그대로 [약한 자의 슬픔]의 주인공이 황폐한 세계의 무게에 짓밟혀 패배당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즉 작가가 현실을 바라보는 인식은 매우 회의적이고 비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품의 결말을 인위적으로 재생의 결의와 사랑의 깨달음으로 끝맺음으로써 비관적 현실과 타협하는 순응주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자, 여기 현실에 대해 순응주의적 태도를 드러내고 있는 자연주의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문학으로부터 전체적(역사적, 사회적) 관심이 수축하고 개성의 자율이란 것이 당면의 과제가 된 시대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근대적 인식과 쌍을 이루는 것이었다. 즉 자연주의는 사회를 떠나 개인을 우선에 두고 있는 근대적 망탈리테와 통하는 그것으로 ‘정치한 묘사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이런 경향을 추수하고 있는 것은 그것대로 한 장점일 것이다. 그러나 양지가 음지를 낳듯이, 장점이 그대로 단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과연 개인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는 고차적인 입장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즉 자연주의는 비관주의의 소산이다. 가난과 술에 절어 비참한 죽음을 맞는 제르베즈(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의 여주인공)를 상기해 보자.  

김동인의 현실순응주의적 자연주의관을 잘 나타낸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이라는 [감자]를 들 수 있다. 자, 여기!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주인공의 도덕적 타락과 비극적 죽음을 보여주고 있는 [감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가난이라는 환경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거다. 이는 그대로 자연환경결정론이다. 즉 인간의 도덕적 의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자, 작가를 작품과 분리시킬 수는 없으니, 즉 작품도 하나의 작가의식인 뇌분비의 산물이니 이를 그대로 대입해 보자. 그러먼 우리는 가난이라는 환경을 일제시대의 식민현실로, 주인공의 운명을 김동인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먼 가난은 그대로 객체이고, 주인공은 주체다. 이런 사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나. 객체가 주체보다 앞선다는 거다. 즉 김동인의 작가적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작품을 가로지르는 작품의 경향이 자연주의이고, 이 자연주의가 현실에 대한 비관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문학 사조라먼 이를 두고 근대적이라 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김동인의 문학사적 평가는 그 형식에 대한 모던적 인식에서 나온 것이지 그의 작품 내용에 기반한 실체적인 평가라고 볼 수는 없다.  

이렇게 현실에 대한 순응적이고 비관적 태도를 드러내는 작품들이 암울한bleak 현실이 제기하는 본질적인 모순에서 벗어나 트리비얼trivial한 이야기에 빠지고 사소설적 경향을 지니며, 더구나 김동인의 경우처럼 색정문학에 가까운 타락을 면치 못하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사상과 세계관이 투철하지 모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이는 그만큼 근대적 자아의식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이와는 달리 한때 김동인과 한 소설을 두고 격론을 벌였던 염상섭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김동인과 달리 조선의 암울한 현실을 그대로 묘파하고 식민 치하의 조선의 현실을 ‘무덤([만세전의 원래 이름]’으로 보았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의 분기점이 놓인다. 


2부에 계속

 

김상천 문예비평가 

“텍스트는 젖줄이다”, “명시단평”, “삼국지 : 조조를 위한 변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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