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전 발행인 故 김윤수 영남대 명예교수 별세, 많은 예술인 참여한 가운데 장례 치러져
창비 전 발행인 故 김윤수 영남대 명예교수 별세, 많은 예술인 참여한 가운데 장례 치러져
  • 육준수 기자
  • 승인 2018.12.0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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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윤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의 영정사진. 사진 = 육준수 기자
故 김윤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의 영정사진. 사진 = 육준수 기자

[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과거 창비에서 발행인을 맡았던 김윤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미술평론가)가지난 11월 29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였다. 이에 고인의 친지 및 유족들은 1일 오후 5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층 추모행사장에서 고인을 기리는 민족예술인장을 거행했다. 

故 김윤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민족예술인장. 사진 = 육준수 기자
故 김윤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민족예술인장. 사진 = 육준수 기자

故 김윤수 교수는 1936년 경북 영일군 청하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강사를 지냈으며 이화여대, 영남대에서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한국현대회화사”(1975)가 있으며, 존 버거의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와 허버트 리드의 “현대회화의 역사”를 번역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장, 전국민족미술인연합 의장,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으며 2001년에는 영남대학교 명예교수로 임명됐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의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1983년부터 2015년까지 30년 이상 계간 창작과비평의 발행인으로 일하다 백낙청 전 편집인, 백영서 전 주간과 함께 퇴임했다.

고인은 1971년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지식인 30인으로 서명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며, 1975년에는 투옥 중이던 김지하 ‘양심선언’ 배포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화여대 미술대학 교수직에서 해직되었으며, 이후 영남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수행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시기에는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재직했으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임기를 약 10개월 남겨둔 2008년 11월에 해임됐다. 10년도에는 국가를 상대로 한 해임무효 소송에서 승소했다. 

장례위원회를 구성한 구중서 문학평론가(좌)와 이시영 시인(우). 사진 = 육준수 기자
장례위원회를 구성한 구중서 문학평론가(좌)와 이시영 시인(우). 사진 = 육준수 기자

고인의 친지, 동료, 후배, 제자들은 민족예술인장을 열기에 앞서 ‘김윤수 선생 민족예술인장 장례위원회’를 조직했다. 장례위원장은 유홍준 미술평론가가 맡았으며 집행위원장은 박불똥, 이종헌, 강일우, 이영욱이 맡았다. 장례위는 전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인 구중서, 최원식 문학평론가와 이시영 시인, 백낙청 전 창비 편집인, 김사인 한국문학번역원장 등 수백에 달하는 예술인들로 꾸려졌다. 

이날 민족예술인장은 유홍준 장례위원장의 여는 말로 시작했으며, 최원식 문학평론가의 ‘조사’, 박불똥 한국민예총이사장의 ‘약력소개’, 김정환 시인의 ‘조시’, 백낙청 문학평론가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김정헌 화가, 이애주 서울대학교 교수의 ‘추모사’, 고인의 동생 김익수씨의 유족 인사말 순으로 진행됐다. 이밖에도 고인을 추모하는 퍼포먼스와 음악공연이 진행되기도 했으며, 사회는 박재동 만화가가 맡았다. 

故 김윤수 교수가 서울대학교에 강사로 있던 시절 강의를 들었던 유홍준 장례위원장과 최원식 문학평론가는 각각 여는 말과 조시를 통해 고인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유홍준 장례위원장(좌)과 최원식 문학평론가(우). 사진 = 육준수 기자
유홍준 장례위원장(좌)과 최원식 문학평론가(우). 사진 = 육준수 기자

유홍준 장례위원장은 고인이 유신독재의 압박에도 후학을 양성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고 이야기했으며, 최원식 문학평론가는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의 자유를 충분히 존중해주신 마음 따뜻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최원식 평론가는 “그때는 선생님이 강의실에서 한 번도 앉지 않으셔서 허리가 아픈지도 몰랐다.”며 “그렇게 재밌게 열심히 가르치는 선생님은 처음 봤다. 공부가 이렇게 재밌는지를 그때 처음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두 평론가는 김윤수 교수의 별세에 깊은 아쉬움을 표하며, 고인이 편히 쉴 수 있기를 기원했다. 

김정환 시인이 조시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 육준수 기자
김정환 시인이 조시를 낭독하고 있다. 사진 = 육준수 기자

고인이 살아있을 적에 가까이 지냈다는 김정환 시인은, 고인을 기리며 쓴 시 “속대찌개에 끓인 밥”을 조시로 바쳤다. 이 시는 “70년대 옥고를 치를 때나 87년/6. 10 항쟁 거리에/바리케이드를 칠 때를 거쳐/갑자기 노환이 닥친 뒤에도/그의 정신은 늙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김윤수 교수의 정신을 조명하고 있다. 

추모사를 맡은 백낙청 문학평론가와 백기완 통일연구소장, 김정헌 화가, 이애주 서울대학교 교수는 고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백낙청 전 창비 편집인. 사진 = 육준수 기자
백낙청 전 창비 편집인. 사진 = 육준수 기자

김윤수 교수가 창비 발행인을 맡을 당시 창비의 편집인이었던 백낙청 평론가는 “김윤수 선생님이 2015년까지 창비 발행인을 했으나, 이렇게 보도하신 분은 거의 없다.”며, 이는 “매스컴 특성상 제가 너무 드러난 것도 있고, 그분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일하셨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백 평론가는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계간지를 폐간시켰을 때”에 “김윤수 선생이 나서셔서 문공부 국장하고 협상을 하셨다.”며, 고인은 자신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창비를 위해 큰 힘을 쓴 인물이라고 이야기했다. 

백낙청 평론가는 “제가 창비에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이 저를 백프로 믿고 맡겨주셨기 때문”이라며 “오늘날의 창비가 있기까지는 그런 김 선생님의 공헌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김 선생님은 덕 있게 사셨고, 덕 있게 가셨다고 생각한다. 떠난 것에 너무 슬퍼하지 않겠다.”며 눈물을 삼켰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사진 = 육준수 기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사진 = 육준수 기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73년도에 박정희 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성명서를 쓸 때, 자신이 고인의 이름을 적어냈던 인연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백 소장은 당시 “장준하 선생이 김윤수가 누구냐고 물어 ‘서돌’과도 같은 사람이라 설명했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서돌은 짓밟힐수록 불꽃이 이는 불씨”라며, 김윤수 교수는 서돌처럼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불꽃”을 간직한 사람이었다고 전했다. 

김정헌 화가(좌)와 이애주 교수(우). 사진 = 육준수 기자
김정헌 화가(좌)와 이애주 교수(우). 사진 = 육준수 기자

김정헌 화가는 47년간 고인과 함께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애주 교수는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들었던 수업이 지금까지도 떠오른다고 말하며, 고인을 추모하는 무용을 짤막하게 선보였다. 

상주로서 민족예술인장을 끝까지 지켜본 고인의 동생 김익수씨는 “형에게 자녀가 없어서 제가 상주가 됐다.”며 “유족 대표로서 여러분이 장례식을 민족예술인장으로 치러주시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환송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형이 행복하게 하늘나라에 갔을 것 같다.”며 행사에 참여한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故 김윤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의 동생 김익수씨. 사진 = 육준수 기자
故 김윤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의 동생 김익수씨. 사진 = 육준수 기자

이날 민족예술인장은 수많은 예술인들과 유독들이 고인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고, 슬픔을 나누는 가운데 끝이 났다. 장례를 마치며 유홍준 장례위원장은 “마석에 묘역이 만 삼천 개가 있는 것 중에, 120분의 민주열사 묘역이 있다.”며, 故 김윤수 교수를 민주열사들과 같은 자리에 안치하기로 결정됐다고 전했다. 

故 김윤수 교수의 발인은 2일 오전 9시 30분에 장례식장에서 진행됐으며, 장지인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묘역에서는 11시 30분부터 추도식과 하관식이 진행됐다. 

故 김윤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의 빈소. 사진 = 육준수 기자
故 김윤수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의 빈소. 사진 = 육준수 기자

한편 고인의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문희상 국회의장,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박원순 서울특별시장 등 과거 민주화운동에 힘을 쏟았던 정치인들이 보낸 근조 화환과 깃발이 놓였다. 이들이 화환을 보낸 것은 故 김윤수 교수가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지식인 30인 서명에 참여하고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되는 등,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