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정세권 선생 연보'. 북촌 한옥을 짓고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내다
독립운동가 '정세권 선생 연보'. 북촌 한옥을 짓고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내다
  • 박용규 교수
  • 승인 2019.01.21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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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페이퍼 = 박용규 교수] 필자는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내 ‘기농 정세권 선생 기념사업’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정세권 선생도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많은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오는 4월 9일부터 북촌 한옥청에서 ‘기농 정세권 선생 전시회’가 개최된다. 

정세권(1888~1965) 선생의 모습. 사진 제공 = 박용규 교수
정세권(1888~1965) 선생의 모습. 사진 제공 = 박용규 교수

일제강점기 정세권의 업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 집을 짓지 않고, 우리의 집인 ‘개량 한옥’을 지어 민족의 주거 문화를 보존하였다. 1920년 9월 19일 서울 시내에서 건축업을 하는 건양사를 창립하여 이후 1943년까지 개량 한옥 수천 채를 건축하였다. 지금도 서울의 북촌 한옥 마을과 종로구 익선동에서 그가 지은 개량 한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정세권이 개발한 서울 북촌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한옥 마을 모습. 사진 제공 = 박용규 교수
정세권이 개발한 서울 북촌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한옥 마을 모습. 사진 제공 = 박용규 교수

둘째, 서울 북촌에 조선어학회에 회관을 기증하여 우리말과 한글을 지켜내었다. 그가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 1호 소재의 대지 32평(지금 시가로 땅값만 계산해도 12억 8천만 원에 달함)을 사서, 2층 양옥의 건물을 완성하고 이를 조선어학회에 기증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이곳에서 조선어 표준어를 확정하였고, <조선어대사전>에 들어갈 16만의 어휘 뜻풀이를 완성하였다.

'조선말 큰사전' 6권(1947∼1957)의 모습. 사진 제공 = 박용규 교수
'조선말 큰사전' 6권(1947∼1957)의 모습. 사진 제공 = 박용규 교수

 셋째, 학술연구기관인 양사원의 건립에 도움을 주었다. 그가 양사원 건립에 도움을 주고자, 서울 가회동에 있는 큰 집 한 채를 내놓았다.
이로 인해 정세권은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급기야 토지 3만 5천 여평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일제에게 강탈당하였다.

지금까지 독립운동가 정세권에 대한 연구에서, 그의 연보가 제대로 작성되지 않았다. 이에 필자는 ‘기농 정세권 선생 기념사업’의 자문위원으로서, 지금까지 연구하여 정리한 ‘기농 정세권 연보’를 발표하고자 한다. 이 연보가 ‘기농 정세권 선생 전시회’와 향후 정세권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정세권(鄭世權, 1888~1965) 선생 연보

호는 기농(基農)이다. 기농은 기본농사(基本農舍)의 준말로, ‘기본 농가 집’을 뜻한다.

1888년(1세) 4월 10일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248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필석(鄭必晳), 어머니는 이궁지(李宮旨)였다.

1892(5세)부터 마을의 서당에 다녔다.
 
1899년(12세)에 진주 백일장에서 장원을 수상하였다. 

1900(13세)에 하이면에서 부잣집의 마름이 되었다.

1902(15세)에 부잣집의 딸(철성 이씨)과 결혼하였다. 종친회를 발기하였고, 종친계를 설립하였다. 

1905년(18세) 상경하여 벼슬 직함만을 빌려 기자릉 참봉이 되었다. 조선농회 회원을 역임하였다.

1907년(20세) 신학문의 필요를 공감하여, 서당을 바꾸어 신식 학교를 설립하였다. 

1908년(21세) 8월 20일 3년제 진주 낙육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수차 월반하여 동년 12월 30일 우등으로 졸업과 동시에 측량과를 수료하였다. 
  
1909년(22세) 22세에 기본농사(基本農舍)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70세에 이르러 그 이치를 얻었다. 

1910년(23세) 하이면 면장에 선임되었고, 조선의 제2의 우량면이 되어 포상을 받았다. 
            
1910년(23세)에서 1912년(25세)까지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 방풍림을 조성하였고, 인근 지역에 나무 수만 그루를 심었다. 

1912년(25세) 8월 15일에 세금 수탈 등 면민들을 괴롭히면서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는 하이면 면장직에 회의가 들어 사직하였다. 

1914년(27세) 4월에서 9월까지 도 원잠종제조소(道 原蠶種製造所)에서 양잠(養蠶)을 전습(傳習)하였다.

1915년(28세) 12월 12일에 덕명 저축계를 발족시켰고, 차차 발전하여 하이면 저축조합에 이르렀다. 잠업전습소를 설립하여 우량한 누에고치를 생산하고 여러 차례 수상하였으며 후배를 양성하였다. 

1919년(32세) 2월에 상경하였다. 서울과 진주의 3·1운동에 참가하였다. 질병·심리 치료를 연구하는 진령도학회(眞靈道學會)에서 심령학(心靈學)을 공부하였다. 서울에서 심령치료원을 개업하여 정신질환자가 다수 효험을 얻게 하였다. 

1920년(33세) 9월 19일 서울 시내에서 건축업을 하는 건양사를 창립하여 몇 천원을 가지고 건축을 시작하였다. 이후 1943년(56세)까지 건양사를 경영하여 가옥 수천 채를 건축하였다. 

1924년(37세) 진령도학회에서 공부하여 철학사(哲學士)가 되었다.

1925년(38세) 일가 친척 김용기(金容起)를 통해 이상재·유진태·조만식·이인·이종린·안재홍 등을 알게 되어, 이들과 교유하였다. 같은 해 7월 15일에 발행한 김용기가 저술한 <단전요의檀典要義>(단전요의발행소)의 발매 주무(主務)를 맡았다.

1928년(41세) 1월 16일 조선물산장려회 경성지회가 설립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이사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월 28일 조선물산장려회 경성지회 제1회 이사회에서 경리부 상무이사로 선임되었다.

1929년(42세) 1929년에서 1932년까지 조선물산장려회 상무이사로 활동하였다. 1929년 10월부터 <조선물산장려회보>를 발행하기 시작하여, 이름을 바꾸어 1931년 1월부터 <장산>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어 1931년 8월부터 1941년까지 13년간 <실생활>을 계속 발행하였다. 몸소 면포 두루마기를 입었다. 조선인 토산품을 애용하는 마음을 고취하였다. 
1929년 12월 3일에 조선물산장려회 회의석상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 위원장인 이극로와 만났다.

1930년(43세) 4월 14일에 개최된 신간회 경성지회의 집행위원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28일 열린 신간회 경성지회의 대회준비위원회에서, 재정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44세) 9월에 정세권이 종로구 낙원동 300번지에 물산장려회관을 준공하였다. 같은 해에 조선 물산 염매시를 개시하여 1935년까지 지속하였다. 즉 조선 물산(토산품) 염매점을 경영하였다. 같은 해 12월 19일 만주동포 문제협의회에서, 회계로 선임되어 이후 만주동포 구제활동에 나섰다.

1932년(45세)에 장산 농업실습장(무의탁 소년 실습 수련장)을 서울 뚝섬(현 성동구) 자양동에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1934년(47세) 조선물산장려회에서 상무이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에 조선어학회가 확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에 대해 지지 입장을 밝혔다.
1935년(48세) 조선어학회가 주최한 조선어 표준어 사정회의 제1독회(1, 2.∼1, 6.)의 소요 비용을 전담하여 주었다. 1월 6일에 표준어 사정위원들은 이순신의 사당이 있는 현충사를 참배하고 기념촬영도 하였다. 정세권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같은 해 3월 이극로가 조직한 조선 기념 도서 출판관에서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에 조선어학회를 위해 서울 종로구 화동 129번지 1호 소재의 대지 32평을 샀다.( 지금 시가로 땅값만 계산해도 12억 8천만 원에 달하였다.) 2층 양옥의 건물을 완성하고 이를 조선어학회에 기증하였다. 당시 건물의 시가가 4천여원에 달하였다. 1935년 7월 11일에 조선어학회는 이곳에 입주하였다.

1936년(49세) 약 10만원 단위의 대상(大商)이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수재(물난리)가 발생하자, 같은 달 14일에 이재민을 위해 의복 115건을 기탁하였다. 같은 달 15일에 다시 의복 85점을 기탁하였다.
1936년부터 1941년까지 이극로가 추진한 학술연구기관인 양사원의 건립에 참여하였다. 

1937년(50세) 8월 평북에 일어난 수재로 인해 고통을 받는 이재민에게 도움을 주고자 건양사의 정세권은 의복 650건을 기탁하였다.

1939년(52세) 고향의 하이면 덕명리에 소재한 덕명간이학교 신축에 1600원을 희사하여, 같은 해 6월 15일에 개교하게 하였다. 

1940년(53세)에 고향 덕명리에 문중을 위해 ‘명덕재’라는 재실을 건축하여 주었다. 

1941년(54세)경에 양사원 건립에 도움을 주고자, 서울 가회동에 있는 큰 집 한 채를 내놓았다.

1942년(55세) 조선어학회 사건(일명 홍원사건) 발생, 이 사건에 연루되어 11월에 함경남도 홍원으로 소환되었다. 홍원경찰서에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15일 만에 풀려났다. 조선어학회 및 양사원으로 연루된 조선어학회 사건 이후 경제 활동 등에서 조선총독부의 감시대상이 되어 여러 해 동안 혐의를 받아왔다. 
 
1943년(56세) 6월 18일부터 7월 6일까지 19일 동안, 일제는 정세권을 탄압하고자, 경제사범으로 몰아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아들 정균식과 함께 구속하였다. 구속 기간에 일본 경찰은 조선어학회 사건 특히 양사원 관련 경위를 문제 삼아, 이를 묵인하는 조건으로 서울 성동구 자양동(뚝섬) 일대의 토지 35,279평을 친일단체인 대화숙(大和塾, 야마토주쿠)에 바치라고 강요하였다. 즉 조선총독부 산하 보호관찰소가 강제로 조작하여, 정세권의 무의탁 소년 실습 수련장과 그 부대농지 3만 5천 여평을 6월 23일부로 강제로 빼앗아, 경성 대화숙으로 강제로 소유권 이전을 자행하였다. 막대한 재산을 일제에게 강탈당하였다. 그 후 일제는 정세권의 건축면허증까지 박탈하였다.
1943년에 집에 찾아온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인 김구 선생의 수하에게 군자금(독립 자금)으로 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거금을 제공하였다. 

1945년(58세)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자,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1946년(59세)에 <기본주택 장려안>을 발행하여 농촌진흥에 주력하였다. 1946년 4월 1일에 서울 소년원 독도분원장이 되었고, 1948년 4월 26일에 사직하였다.

1949년(62세) 3월 24일 조선어학회의 재정을 원조하기 위해 ‘재단법인 한글집’이 창립되었다. 이때 정세권이 서울시 종로구 화동 소재의 32평에 달하는 토지와 건물(조선어학회 회관)을 재단법인 한글집에 정식으로 희사하였다. 5월 재단법인 한글집의 감사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에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은 인사들이, 조선어학회를 원조하고 회원 상호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십일회(十一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6월 12일 국일관에서 최현배·이희승 등 25명이 참여하여 십일회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 1942년 10월 1일을 회고하는 첫 모임을 가졌다. 이 날 모임에 정세권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1950년(63세) 6월 25일, 6·25전쟁으로 제기동 교당(敎堂) 건축을 중단하였다. 9월 28일 파편을 맞아 중상을 당하였다.

1956년(69세) 10월 21일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같이 겪은 김윤경, 장지영, 이석린, 최현배, 이우식, 정인승, 김법린, 이강래, 권승욱 등과 십일회 기념 모임을 가졌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1957년(70세) 10월에 「큰사전 완성을 축하함」(<한글>122)이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1958(71세)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및 향촌동에서 기본사(기본 집)를 경영하였다. 자비로 족보를 두 차례 발간하였다. 

1959년(72세) 귀향하였다. 시범 축산장을 설립하여 돼지를 사육하고 야채를 재배하여 수익을 창출하였다.

1962년(75세) 9월 9일 「삼천포 기본사(基本舍) 조합 발기문」을 발표하였다.

1965년(78세) 9월 14일에 경남 삼천포시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78세였다.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 안장되었다. 

1970년 3월 11일에 대한민국 정부(박정희 정권)는 정세권이 생전에 일제에게 빼앗긴 자신의 땅에 대해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한 필지도 되돌려 주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의 땅으로 강제 귀속시켜 버렸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14년 8월 29일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심장부인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오른편에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탑에 ‘정세권’의 이름이 새겨졌다.

2016년 4월 15일에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제5-112)에 안장되어 있다.

* 이상의 연보는 「정세권 구술이력서 타자본」, ; 정균식, 「(정세권) 경력의 줄거리와 경위」(1977, 12.), ; 정균식, 「기농 정세권의 애국 운동 줄거리」(<한글 새소식>131, 1983, 7), ; <진주정씨 호은공파보>(명덕재, 1987) ; 박용규,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한글학회, 2012), ; 김경민,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이마, 2017), ; 박용규, 「정세권의 민족운동 활약상」(<기농 정세권 선생 기념사업 토론회>자료집, 3·1운동 100주년 서울시 기념사업 주최, 2018, 2)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음을 밝혀둔다.

 

박용규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조선어학회 항일 투쟁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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