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이퍼펑크(Cypherpunk)와 블록체인의 기원
[오피니언] 사이퍼펑크(Cypherpunk)와 블록체인의 기원
  • 공병훈 교수
  • 승인 2019.02.03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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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퍼펑크(Cypherpunk)와 블록체인의 기원.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사이퍼펑크(Cypherpunk)와 블록체인의 기원.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위조와 변조의 걱정이 없는 전자 장부의 탄생

[뉴스페이퍼 = 공병훈 교수] 인터넷은 사용자들 간의 평등한 동료적 협업을 통해 만들어가는 유토피아를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빅 브라더가(big brother) 개인의 생활과 삶을 세밀하게 감시하고 통제, 통치하는 디스토피아를 예정하고 있는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우리의 사회적 활동과 개인의 모든 영역에 결합하면서 우리는 낙관도 비관도 확신할 수 없는 혼돈의 경계를 걷고 있다.

지난 2018년, 혼돈 속에서 나타난 어려운 개념 하나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블록체인이다. 블록체인은 블록(block)과 체인(chain)의 합성어로, 위조와 변조의 걱정이 없는 전자 장부를 뜻한다. 블록체인 기술에서는 서로의 거래 내역이 블록에 담기고 이 블록들이 체인처럼 연결된다. 하지만 블록체인의 역사는 1980년대 사이퍼펑크에서 시작됐다. 사이퍼펑크를 이해하려면 먼저 세계 전체가 뒤흔들리듯 격렬하고 치열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70년대에는 사회주의권과 자본주의권의 냉전체제가 절정에 오르면서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몇 가지 큰 사건들이 벌어졌다. 자본주의 세계의 맹주로 자처하던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다. 제4차 중동전쟁이 아랍권의 패배로 끝난 이후 OPEC의 아랍권 국가인 리비아, 이라크, 이란과 이집트, 시리아, 튀니지가 손잡고 석유 수출을 줄이는 동시에 원유 가격을 인상했다. 1973년과 1978년에 걸친 석유 파동은 전 세계 경제를 충격에 빠트렸다. 그리고 1979년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다. 

1973년과 1978년에 걸친 일어난 두 차례의 석유 파동.
1973년과 1978년에 걸친 일어난 두 차례의 석유 파동.

변화되는 흐름에 대항하기 위해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걸쳐 영국의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와 미국의 레이건 정권이 주도하던 신자유주의(Neo-Liberalism)가 세계질서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40년 가까이 지난 2019년 지금도 세계 여러 나라들이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이론에 입각한 경제 정책을 펴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수정자본주의를 채택하여 소득평준화와 완전고용을 이루어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케인스 이론을 비판하였다. 자유시장과 규제완화, 민영화와 재산권 중시, 자본의 세계화와 시장개방, 사회복지 축소는 신자유주의의 대표적 슬로건이었다. 신자유주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한 경쟁을 초래하고, 분배의 악화를 가져오고, 선진국의 다국적기업들에만 혜택을 준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다국적 기업과 정부 권력의 감시에 맞선 활동가들, 사이퍼펑크 

사이퍼펑크는 다국적 기업과 정부 권력의 대규모 감시와 검열에 맞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강력한 암호 기술을 활용하는 활동가들 집단을 말한다.  블록체인기술을 통해 감시와 검열에 맞서기 위해 개발한 강력한 암호기술에서 비롯되었다. 사이퍼펑크들은 뚜렷한 철학과 관점을 지니고 있다. 1980년대부터 통신과 인터넷이 확산하면서 자유로운 사이버 공간과 연결망은 세계 곳곳에서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한다. 이러한 흐름과 반대로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다국적 기업과 정치 권력의 탄압과 통제 기술도 최고조로 발달되어간다. 온라인을 중심으로 대규모 감시 프로그램도 세계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이버 공간은 다국적 정보질서(multinational information order) 체제와 다국적 기업의 헤게모니 경연장이기도 하다. 다국적 기업들에게 정보라는 존재는 다국적 기업의 활동과 전략을 위한 필수불가결 요소이다. 따라서 정보 자체를 상품으로 보며 이윤 추구의 대상이라는 관점에서 정보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추구하려고 한다. 운영체제의 마이크로소프트와 2000년대 검색의 구글과 소셜 미디어의 페이스북조차도 유대인 창업자가 시작한 글로벌 차원의 다국적 기업이다. 

사이퍼펑크라는 말은 사이버펑크(cyberpunk)라는 개념에서 시작됐다. 윌리엄 깁슨(William Ford Gibson)의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가 파생시킨 새로운 공상과학 장르를 뜻한다. 새로운 대항문화 운동을, 그리고 그런 운동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집단 또는 개인을 가리킨다. 이러한 활동은 깁슨과 친구 사이인 브루스 스터링(Bruce Sterling)이 운영하는 뉴스 레터 그룹인 'Cheap Truth'를 중심으로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alt.cyberpunk, 1998). 물론 이때까지는 사이버펑크라는 용어가 존재하지는 않았다.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Neuromancer)』

소설 『뉴로맨서』에는 케이스라는 이름의 “컴퓨터 카우보이”, 즉 해커가 등장한다. 그는 해킹 활동 때문에 자신의 고객에 의해 신경 체계가 손상된다. 더 이상 사이버 공간에 접속할 수 없게 된 그는 일본 치바현(千葉県) 치외법권 지역에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수수께끼의 아미티지라는 사업가가 접근해 그에게 옛 힘을 되찾게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이 소설에서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고 1980년대 이후 등장한 과학 소설의 한 장르로서 표현된다. 이때부터 사이버펑크는 사이버시대의 저항문화 또는 그 활동가들을 상징하게 된다. 깁슨에게 사이버 스페이스는 일종의 가상현실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를 통해 접근하는 공간, 즉 컴퓨터 네트워크,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데이터에 의해 구축되는 가상 공간을 깁슨은 매트릭스(matrix)라 불렀다. 현재 사이버 스페이스는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로 구축된, 컴퓨터에 의해 유지되고, 컴퓨터를 이용해 접근할 수 있는, 그리고 컴퓨터가 만들어 내는, 다차원적인 인공 현실 또는 가상현실”로 정의된다(Benedikt, 1991, p.123). 이 세계관은 릴리 워쇼스키와 라나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에 잘 반영되어 있다. 

사이버펑크(cyberpunk)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 무정부주의적이며 급진적, 반항적인 분위기가 풍기며, 발달된 과학기술과 이에 따른 사회적 병폐, 부조리, 계급 갈등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1970년대식 반항적 패션경향이던 ‘펑크’ (Punk)를 합하여 만든 낱말로 브루스 베스키의 단편 「사이버펑크」(1980년)에서 이 용어는 공식적으로 탄생한다.

정부와 은행이 없는 자유로운 거래를 향하여

사이버펑크 활동은 통제와 권력의 상징이자 다국적 기업과 손잡은 정부 역할과 행위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정부는 개인이 컴퓨터를 가지고, 모뎀을 가지고, 정보를 가지고 그 어떤 행위를 하든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사이버펑크는 법의 외부에서 움직이는데, 중앙집권화된 국가와 기업구조에 대항하고 관련된 개인들의 필요에 봉사하는 과학과 기술의 탈중앙집권화되고 하위문화적이며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을 옹호한다. 사생활정보(privacy) 보호도 사이버펑크 자유주의가 내거는 주요 가치 중의 하나다. 사이버펑크 운동은 정부가 개인의 사생활정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암호(cypher) 체계를 개발하고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이퍼펑크(cipher punk)는 암호(cipher)에 저항을 상징하는 펑크(punk)를 붙여서 만든 합성어이다.

윌리엄 깁슨(William Ford Gibson)
윌리엄 깁슨(William Ford Gibson)

1980년대 들어 데이비드 차움(David Chaum) 박사가 ‘디지캐시’와 함께 평판시스템 등 익명 거래 시스템을 제안했다. 1992년에는 에릭 휴즈(Eric Hughes), 티모시 메이, 존 길모어에 의해 사이퍼펑크 모임이 시작됐다. 미국 수학자이자 프로그래머로 사이퍼펑크 운동 창시자 중 한 명인 에릭 휴스는 1993년 발표한 ‘사이퍼펑크 선언’(A Cypherpunk’s Manifesto)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프라이버시를 원하기 때문에 거래 당사자는 해당 거래에 직접 필요한 정보만을 알고 있어야 한다.”, “공개 사회에서의 프라이버시는 익명의 거래 시스템이 필요하다. ”, “프라이버시는 전자 기기 시대에 열린 사회를 위한 필수 가치이다. 정부나 기업 또는 다른 얼굴 없는 거대 조직들이 우리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줄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프라이버시는 우리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 “열린 사회에서의 프라이버시에는 암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이버펑크들은 정부의 권위를 대체할 수단을 ‘암호’에서 찾았다. 1980년대 이후 암호기법은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휘필드 디피(Bailey Whitfield) 박사와 마틴 헬만(Martin Hellman) 박사가 데이터 암호화 표준과 공개키 암호 기술을 발표하면서 암호는 민간 부문에서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는 공개열쇠 암호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공개열쇠에 의한 암호체계가 등장하면서 작성할 수는 있어도 암호해독은 어려워졌다. 쉽게 말해 공개열쇠를 이용, 암호문을 만들 수는 있어도 비밀번호가 없으면 암호화되기 이전의 문장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사이버펑크들의 노력은 정부나 은행 같은 공인 기관 없이도 암호를 통해 양자 간에 거래의 신뢰성을 확인할 수 있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기술을 열었다. 이 블록체인의 과정에서 생성된 데이터들은 P2P 방식으로 나눠진다. 분산된 데이터는 누구도 임의로 수정할 수 없고, 누구나 변경의 결과를 열람할 수 있으므로 데이터 위조와 변조를 방지할 수 있어 보안성이 높다. 마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은 누구도 왜곡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1970년대 이전까지 암호는 주로 정부기관들이 비밀리에 사용하는 기술이었다. 이 시절의 암호 기술은 대칭키 암호 시스템이었다. 암호문을 생성할 때 사용하는 키와 암호문으로부터 평문을 복원할 때 사용하는 키가 동일한 암호 시스템이다. 암호 시스템의 안전성은 키의 길이, 키의 안전한 관리에 상대적으로 의존성이 높다. 암호문의 작성자와 이의 수신자가 동일한 키를 비밀리에 관리해야 하므로 폐쇄적인 특성을 갖는 사용자 그룹에 적합한 암호 시스템이다. 

하지만 공개키 암호 시스템 이전의 대칭키 암호 시스템의 가장 큰 약점은 키 관리의 어려움에 있다. 한 사용자가 관리해야 할 키의 수가 너무 많아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타난 암호 시스템이 공개키 암호 시스템이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 각 사용자는 두 개의 키를 부여 받는다. 그 하나는 공개되고(public key), 다른 하나는 사용자에 의해 비밀키(private key)로서 관리된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 각 사용자는 자신의 비밀키만 관리하면 되기 때문에 키 관리의 어려움을 줄일 수 있다. 공개키 암호 시스템에서는 각 사용자의 공개키를 관리하는 공개키 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며 각 사용자는 이 시스템에 자유롭게 접근하여 다른 사용자의 공개키를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이후 사이퍼펑크 모임은 블록스트림(Blockstream), 해시캐시(HashCache), 디지캐시, PGP(Pretty Good Privacy), SSL(Secure Socket Layer) 등 중요한 암호 및 거래 기술을 만들었다. 1997년 아담 백(Adam Back)이 창안한 해시캐시는 익명성을 보장하고 이중 지불을 방지할 수 있는 가상화폐였다. 해시(Hash)는 한 방향 계산은 쉬운데 역방향 계산은 매우 어려운 특징을 갖는 함수이다.

블록체인 기술의 확산과 사이퍼펑크들의 꿈

블록체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개인과 개인의 거래가 생길 때마다 데이터는 장부가 되어 ‘블록(Block)’으로 만들어지고 기록된다. 이 기록들은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사슬(Chain)’ 구조를 형성한다. 거래 기록을 담은 블록들이 사슬로 이어져 하나의 장부를 만드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모든 거래 장부를 네트워크 참가자들에게 공개, 분산, 관리하기 때문에 '공공 거래 장부' 또는 ‘분산 거래 장부’, ‘분산 원장’으로도 부른다.

1998년 웨이 데이(Wei Dai)는 B화폐(b-money), 그리고 닉 재보(Nick Szabo)는 비트골드(Bit gold)를 통해 익명의 개인 간 계약을 체결하는 분산형 통화를 만드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했다. 이는 각 참여자가 B화폐를 얼마나 갖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모든 참여자의 별도 데이터베이스에 해시함수로 암호화해 서로 연결된 블록으로 저장하게 한다는 점에서 블록체인 개념과 상당히 유사하다. 그는 거래 발생에 의해 새로운 블록을 추가할 때 가장 먼저 암호를 풀어 성공한 참여자에게 B화폐 인센티브를 주는 ‘작업증명’과 보유한 가상화폐의 양에 따라 일부 참여자에게만 우선적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지분증명’ 방법도 제안했다. 작업증명은 현재 비트코인과 같은 대부분의 가상화폐가 채택한 방식이며, 일부 다른 가상화폐는 지분증명 방식을 채택하기도 한다. 

블록체인은 해시캐시 기술을 활용해 작업 증명을 할 뿐만 아니라, 블록과 블록을 해쉬로 연결하고 블록체인의 신뢰가 강화되도록 네트워크 참여자의 경쟁적 검증을 유도할 수 있어서 데이터를 안전하게 거래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한다. 

2004년 할 피니(Hal Finney)는 해시캐시를 사용해 ‘재사용 가능한 작업증명’을 만들었다. 비로소 가상화폐의 근간이 되는 블록체인 기술이 만들어진 것이다. 2005년 닉 자보(Nick Szabo)는 이를 이용해 ‘비트골드’라는 가상화폐를 제안했다. 비트골드는 총액을 제한하지 않았으나, 비트골드를 만들기 위해 동원된 계산량에 따라 가치가 정해졌다. 드디어 2008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익명의 개발자가 해시캐시와 비트골드를 발전시켜 비트코인을 창안했다. 거래의 자유를 향한 사이퍼펑크의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나카모토는 2009년 오픈소스 비트코인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을 설치해 최초의 블록을 만들고, 50비트코인을 채굴한 뒤 할 피니에게 10비트코인을 줬다. 이후 소수의 암호연구자와 프로그래머가 비트코인을 채굴하고 주고받았으나 거래량이 많지 않아 실물가치가 형성되기는 쉽지 않았다. 비트코인 최초의 실물거래는 2010년 어떤 프로그래머가 피자 두 판에 1만비트코인을 지불하면서 시작됐다. 2011년 위키리크스, 전자 프론티어 재단 등 비영리 재단은 비트코인으로 기부를 받기 시작했다. 상품 및 서비스 대가로 비트코인을 받는 곳이 점점 늘어났다. 

블록체인의 요체는 P2P 네트워크에 분산시켜 참가자들이 공동으로 자료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기술에 있다. 중앙 관리 자체가 없는 것이다. P2P 컴퓨팅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컴퓨터가 서버와 클라이언트의 기능을 하는 컴퓨터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동등한 동료(Peer) 간에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컴퓨터 간, 다시 말해 P2P의 기본 조건은 연결된 컴퓨터들 간, 사용자들 간의 동등한 관계이다. 원래 컴퓨터의 네트워크인 인터넷은 서로 동등한 수평적 연결망이었고, 그곳의 참여자끼리 평등한 공유와 나눔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철학이 깔려 있다.

2018년에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암호화폐의 수는 1,600여개를 넘어섰고, 현재 많은 국가들과 글로벌 기업들, 그리고 금융기관들이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기술에 뛰어들었다. 단순한 개인간 거래를 넘어서 글로벌 차원의 결제 방식으로 활용되는 사례들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국적 기업과 국가 귄력, 그리고 금융자본의 통제와 감시로부터 자유로우려던 사이퍼펑크들이 꿈은 지금 어떤 의미인가. 
 

참고 자료 

Hughes,  E. (1993). A Cypherpunk’s Manifesto, https://www.activism.net/cypherpunk/manifesto.html 
alt.cyberpunk (1998). Frequently Asked Questions on alt.cyberpunk. http://www.knarf.demon.co.uk/alt-cp.htm 
Benedikt, M. (1991). Cyberspace: Some Proposals. In Michael Benedikt (ed.), Cyberspace: First Steps. London: The MIT Press, pp.119~224.

공병훈. 협성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박사 미디어 경제경영 전공,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1964년생. 창작과비평사, 동방미디어, 교보문고, 푸른엠앤에스, 세계미디어플러스 등에 재직함. 소셜 미디어와 콘텐츠, 플랫폼, 홍보, 컨설팅 분야 실무자이자 현장 연구자. hobbits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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