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스웨덴의 고고학자인 폴크 베르그만은 1934년 여름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을 탐사하던 중 청동기 시대 백인 여성의 미라를 발견했다. 특이하게도 머리카락과 눈썹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미라는 소하공주, 혹은 소하미녀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후대의 연구자들은 그와는 다른 결의 별명을 붙였다. 소하공주가 발견된 해에 태어난 영화배우 ‘소피아 로렌’이라는 이름으로 이 미라를 칭한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미라와 소피아 로렌. 이 둘 사이의 간격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붙으면 무언가 법칙처럼 긴밀한 연결이 생기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것도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지난 14일 책방이듬은 제37회 일파만파낭독회에 참여한 기혁 시인은 작년 11월 출간된 두 번째 시집 “소피아 로렌의 시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날 행사에서 기혁 시인은 자신의 두 번째 시집인 “소피아 로렌의 시간”을 소개하고 수록된 시를 낭독했으며, 각 시에 담긴 의미를 이야기했다.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잘 쓴 시’, ‘문학’이란 무엇인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기혁 시인은 미라 소하공주에 배우 소피아 로렌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우리가 이 세계를 사는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고 이야기했다. 미라는 사막 속에 웅크려 자신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이 미라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이송되며 ‘소피아 로렌’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기혁 시인은 “모래 속에 있는 미라의 삶이 우리와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이는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이 타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짚은 것이다. 그러나 미라처럼 모래 속에 매몰된 삶에서도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거나 결정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기혁 시인의 생각이다.
이곳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이지만, 방바닥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면 약간의 현실이 묻어 나온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수도 있고 불어터진 면발을 드미는 배달원에게 주소의 허구성과 결제의 진정성에 대해 물을 수도 있다.
- 시 ‘소피아 로렌의 시간’ 일부, 기혁

시집 “소피아 로렌의 시간”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혁 시인은 표제작인 ‘소피아 로렌의 시간’이 실린 1부는 ‘먼 곳에 있지만 전혀 상관없는 매개에 의해 우리 가까이에 있다고 느껴지는 것’을 다루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2부는 시인 자신의 과잉된 감정을 전통적 서정시의 형식으로 풀어냈으며, 3부에는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인의 고민을 담은 시가 실렸다고 전했다. 4부에는 그밖에 전혀 생소하게 느껴지는 시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집 전체의 심상에 대해서는 “우리랑 가까우면서도 생소한 것들”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낭독회에 참여한 한 독자는 3부에 수록된 시 ‘바바리맨’을 낭독했다. 시 ‘바바리맨’은 도덕적으로 무결하다고 생각되는 성직자들의 모습을 바바리맨에 빗댄 작품이다.
드러낼 수도 없고
뒤집을 수도 없다.잠자리에 누워서도 겉옷을 벗지 않는
유대교 성직자들처럼.(중략)
바깥을 안쪽으로 집어놓은 새장과 혼신을 다해 빠져나오려는 새들의 싸움.
젠틀맨이라 불렀다도덕적으로 가장 완벽한 이 정부에서
모두를 발가벗긴 단 한 사람을.- 시 ‘바바리맨’ 일부, 기혁

기혁 시인은 유대계 성직자들이 밤에 옷을 벗고 자는 것은 “신을 영접할 때에 거추장스러운 게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바바리맨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어디에서든 옷을 벗는다. 옷을 벗는다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성스러운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음란한 행위인 것이다. 기혁 시인은 어떤 규칙이라는 것이 시대나 상황에 따라 성스러운 행위가 되기도 하고, 음란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 시대의 규칙이나 가치관은 정해져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인이 스스로 고민해보고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낭독회를 마치며 “잘 쓴 시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기혁 시인은 “문학이라는 것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 기본 본령”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사실이 주어졌을 때 무조건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질문을 계속 생산해나가는 것이 좋은 시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혁 시인은 시에 대해 작가가 말하더라도 꼭 그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오히려 작가는 시를 쓸 때의 복잡한 회로도를 몇 년 지나면 전부 잊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혁 시인은 시를 읽은 독자들이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시작으로 여러 고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에서 명백한 해답을 찾기보다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해나가길 바란다는 것이다.
한편 기혁 시인은 제33회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이후 많은 비판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네가 왜 그 상을 받냐, 김수영 문학상도 망했나보다.” 같은 질투 어린 목소리도 있었다는 것이다. 기혁 시인은 “그때 그걸 극복하는 것이 시를 쓰는 것이었다.”며 “이번 시집이 나오니 옛날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더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현재는 “제게 질투했던 사람들이 절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 같아 고맙다.”고 말하며 웃음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