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러시아 혁명의 붉은 장미.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 그녀를 표현하는 한마디입니다.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인 3월 9일은 콜론타이가 스탈린 지배하의 소련 모스크바에서 1952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날입니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10년 국제사회주의여성회의에서 콜론타이가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과 함께 제안한 데서 유래됩니다.
1908년 열악한 환경에서 일어난 작업장 화재로 불타 숨진 여성들을 기리기 위해 미국 노동자들이 궐기한 날을 기념하여 1909년 2월 28일 ‘전국 여성의 날’이 미국에서 선포된 바도 있습니다. 콜론타이와 클라라 체트킨이 한 제안에 힘입어 1911년 3월 19일 오스트리아, 덴마크, 독일, 스위스 등에서 참정권, 일할 권리, 차별 철폐 등을 외치는 첫 번째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개최된 후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이루어지고 여성 참정권이 주어지면서 소련에서는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하여 국경일로 지정합니다.

저는 1984년 대학교 1학년 때 콜론타이의 소설 『붉은 사랑』(Vasilisa Malygina, 1923)에 깊은 감동을 받고, 출판의 자유가 없고 국가보안법의 서슬이 퍼렇던 군부독재 시절 콜론타이에 대해 자료들을 찾아 몰래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군부정권 시절 1980년부터 1992년까지 3,064명이, 그리고 그 후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년 일본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진 치안유지법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이 국가보안법으로 많은 사람이 투옥되고 있습니다.
소녀 시절, 결혼과 유학, 그리고 취리히 유학
콜론타이의 아버지 미하일 도몬토비치는 러시아 제국의 육군 대령이었고 1877년 러시아와 튀르크 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워 장군으로 진급하였습니다. 그는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에 관심이 많아서 불가리아에서 사는 동안 자유주의파에 가담하여 정치적 탄압도 받았으며 슈라는 아버지가 이 같은 일을 당하는 데 분노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콜론타이의 어릴 적 애칭은 슈라(shura)였습니다. 슈라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마살리나 마라빈스카는 핀란드의 부유한 목재상 집안의 딸이었습니다만 첫 번째 결혼생활 중에 콜론타이의 아버지 도몬토비치와 사랑에 빠져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첫 남편과 이혼하고 재혼합니다.

슈라는 어려서부터 소설과 시를 잘 지었으며 1888년 이름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로 고치고 교사 임용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1893년 먼 친척이던 블라디미르 루트비코비치 콜론타이와 결혼하고 아들 미하일(Mikhail)을 낳습니다. 그녀는 19세기 러시아의 인민주의 사상인 나로도닉스(Narodniks)와 마르크스주의 글을 읽거나 소설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다 1894년 무렵 단편 소설을 써서 잡지사에 투고하기도 합니다.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던 여인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애인과 결합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실제로 콜론타이는 자신의 결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와 1896년에 남편과 결별하고 독서와 토론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스위스로 유학하여 취리히 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해 국민경제학을 공부합니다.
19세기 산업 혁명과 시민 혁명은 유럽 지역을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하게 변화시켰고 여성들의 사회적 처지도 과거와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여성들은 집안에서 가사와 육아 노동을 감당하던 상황에서 벗어나, 공장 노동자로서 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19세기 공장은 여성들에게 남성보다 가혹한 조건을 요구했고, 여성 노동자들의 불만이 1857년 미국의 뉴욕시에서 처음으로 폭발합니다. 이때 방직, 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고 이는 곧 경찰에게 공격받고 해산되었습니다. 2년이 지난 1859년 3월, 이 여성들이 최초로 그들의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됩니다.
여성의 운명에 대한 걱정이 사회주의로 이끌었다
콜론타이는 1896년 나르바(Narva)를 여행하던 중에 1만 2천 명이 일하는 직물 공장을 견학하게 되는데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와 더럽고 악취가 풍기는 집단 침실에서 별다른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그들의 아이들을 목격합니다. 또한 같은 해 러시아 크론호름 직물 공장의 노동자 숙소를 둘러보던 중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녀는 ‘지저분한 공기가 견딜 수 없이 역겨웠다. 빽빽이 들어찬 침대 사이에서 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고, 한쪽에 보모인 듯한 늙은 여자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의 눈길은 아들 또래인 한 작은 아이에게서 멎었다. 아이는 너무 조용히 누워 있었다.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니까 늙은 여자는 흔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잠시 뒤 누군가가 들어와 시체를 들어냈다’라고 당시를 회고하며 당시 심경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성과 그들의 운명은 내가 살고 있는 동안 나를 사로잡았고, 그들의 운명에 대한 걱정은 나를 사회주의로 이끌었다.” 콜론타이는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혁명가로서의 삶을 결정지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짐승처럼 살고 있는 이상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며 이후 친정집에서 제공하던 혜택을 모두 포기하고 정치 활동에 뛰어듭니다.
취리히에서 콜론타이는 그리스 철학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들을 구해서 읽었으며 자신의 눈이 열렸다고 회고합니다. 여성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하여 여성 해방의 길을 모색하게 되고 여성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 해결을 사회주의 체제에서 찾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여성에 대한 착취를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동일 선상에서 이해합니다. 노동자가 임금을 얻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듯이, 여성은 매춘부나 첩 혹은 아내로서 자신의 성을 남성들에게 제공한다고 보았습니다.

피의 일요일, 1905년 혁명 속으로
그녀는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탐욕을 비판하는 글과 칼럼을 발표하면서 여성 해방 운동을 벌입니다. 1898년 초에 러시아에 귀국하여 러시아사회민주당과 러시아공산당에 참여하면서 러시아 혁명에 뛰어듭니다. 러시아의 사회주의자들조차도 여성은 가사를 돌보아야 하는 존재라고 주장하던 시대에 그녀는 노동하는 여자들의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여성들이 공장 등으로도 적극 진출하여 여성 노동계층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녀는 러시아 짜르 제정에 반대하는 전국적 총파업과 전함 포템킨의 반란이 벌어지던 러시아 1905년 혁명(Revolution of 1905)에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참여합니다.
막심 고리키(Maxim Gorky)의 1903년 소설 『밑바닥에서』에는 자물쇠공의 아내 안나의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옵니다. “나는 하루도 배고프지 않은 날을 기억하지 못해요. 먹을 것이 없어 두려움에 떨어왔어요. 비참한 내 인생은 평생 누더기 속에 갇혀 있어요. 왜 그래야 하죠?”
1905년 1월 22일 러시아 민중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상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손에 들고 비폭력시위를 벌였는데, 당시 실권자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유혈진압이라는 가혹한 탄압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죽은 사람만 500∼600명, 부상자 수천 명이나 된 이 유혈사태를 피의 일요일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고, 40만 명이 넘는 노동자가 1월 말까지 참여합니다. 이 파업은 곧 폴란드와 핀란드, 발트해 지역의 공업 지대로 전파되어 며칠 후 바르샤바에서 100명이 넘는 파업 참가자가 길거리에서 사살되었습니다. 10월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은 순식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총파업으로 발전했고 단기간이지만 200개가 넘는 공장에서 파업을 조직하는 노동자협의회가 결성되게 되어 200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합니다.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콜론타이는 1905년 혁명에서 여성 노동자가 혁명에 대규모로 참여했다는 점을 체험하며 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참여와 여성의 노동 참여로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콜론타이는 좌절하지 않고, 여성 노동자 계층을 만들기 위해 여자들도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함을 적극 홍보합니다. 또한 여성 노동자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해야 함을 역설하고 여성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시킵니다.
콜론타이는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에 대해서>라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성노동자 운동은 노동자 운동 전체에서 따로 뗄 수 없는 일부이다. 여성 노동자는 모든 반란에서 남성 노동자와 함께 일어났다. 그럼에도 남성 노동자들만큼의 권리를 찾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 소심하며 짓밟힌 채 무권리 상태에 처해 있던 여성은 파업과 격동의 시기에 빠르게 성장해 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여성 해방의 실천
그녀는 레닌의 볼셰비키와 함께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이끌며 참여합니다. 혁명이 성공한 후 후생복지담당 인민위원이 되어 모성과 아동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방법을 만들어나갑니다. 정책적으로는 결혼과 이혼 절차의 간소화, 사생아에 대한 사회적·법적 낙인의 제거, 사생아도 정식 결혼으로 태어난 자녀와 동등한 권리와 상속권 부여 등을 추진 등 러시아의 여성 관련 정책들 대부분은 이 시기 콜론타이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갔습니다.
이혼의 자유가 보장되자 남편의 폭력에 평생 시달리던 여성들은 이혼의 자유를 환영했지만, 남편을 생계수단으로 여기던 여성들은 오히려 이혼의 자유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혼의 자유를 두려워하던 여성들은 그의 남성 편력을 문제 삼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콜론타이는 여성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오직 여성 스스로가 사회적으로 경제적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남성도 하는 일을 여성은 왜 하지 못하느냐며 반론합니다.
1918년 1월 콜론타이는 여성이 집안의 대표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을 건의하여 성사시키고 가족관계법의 제정, 정비를 시도합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가족법의 제정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남녀 관계를 제시합니다. 이 가족법에는 부부의 법적 평등, 여성의 재산권 행사의 자유, 이혼의 자유 보장, 자녀 양육비의 문제 등이 명시되었습니다. 또한 여성 문제를 전담하는 정치 기구인 제노텔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여성 해방 사업을 실현해 가려 했습니다. 소외 계층의 여성과 어린이, 청소년 문제에 국가 공권력의 적극 개입을 추진했고 가사노동해방론, 무상교육론, 미혼모보호론, 이혼의 자유 보장, 자유연애운동 등을 주장하고 실현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주장을 지지하고 지원한 것은 레닌이라는 사실입니다.
1923년에 쓰여져 새로운 소비에트 사회의 성도덕과 가족 문제를 다루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콜론타이의 소설 『붉은 사랑』은 그녀의 자유연애론이 담긴 작품입니다. 자유연애론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고,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여성이 이혼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제도로 성사시킵니다. 혁명 이후에 러시아인들은 이혼의 자유를 얻었지만, 일부일처제를 여전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소설 『붉은 사랑』은 농산물 판매와 소기업 경영, 상거래를 허용한 네프 체제 아래 남녀 혁명가의 일과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성 노동자인 주인공 바실리사는 공동주택 사업에 복무하는 헌신적인 볼셰비키로, 혁명동지 블라디미르와 사랑에 빠져 부부가 되지만, 남편은 네프 체제 아래서 기업 경영에 골몰하며 물질적 안락함에 안주하고자 합니다. 그는 성별분업 관념에 바탕하여 집안에서의 아내 바실리사의 헌신을 요구합니다. 임신 중이던 바실리사는 남편이 다른 여성 니나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되고 니나가 남편의 아이를 가졌다가 지운 것을 알게 되자, 자신은 아이를 혼자 기르겠다고 결심하고 남편을 떠나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 바실리사는 니나를 적대시하지 않고 축복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자유연애사상과 날개달린 에로스
콜론타이의 ‘자유로운 사랑’은 경제적, 사회적 권력자가 마음대로 여성이나 남성에게 사랑을 행하는 방종이나 방탕이 아니었습니다. 콜론타이는 가정에서 사회와 국가로 의무가 전이되는 개혁들만이 ‘자유로운 사랑’의 원칙이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으며, 자유로운 사랑은 여성이 자본과 남편에게 이중적으로 의존하는 모든 물질적인 짐에서 해방될 때만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남자에게 의존하는 사랑은 여자를 남자의 전리품, 물건으로 만들며, 남자 역시 여자의 경제적 노예로밖에 되지 않으며 결국 결혼생활이나 연애가 행복해질 수 없는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남녀 간의 관계에 돈과 금전이 오고 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매춘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녀는 자유연애 또는 자유결합을 옹호했으며 부르주아 사회의 소유 관념에서 벗어난 참다운 사랑은 남성 이기주의와 여성의 노예적 억압을 끝장낸 평등한 관계 속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남성이 주가 되고, 여성이 종 또는 부속물이라는 것은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관계이며, 일부일처제는 그러한 관계를 공인하는 하나의 수단 밖에 안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일부일처제 너머의 이런 사랑을 콜론타이는 ‘날개 달린 에로스’로 제시합니다.
그녀는 자유연애사상을 자신의 소설 『위대한 사랑』과 1923년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지에 젊은 노동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 ‘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Make Way for Winged Eros)에 담습니다. 날개 달린 에로스와 날개 없는 에로스의 관계를 대비시켜 자신의 자유연애사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콜론타이는 새로운 노동자들에 의해 건설된 공산 사회는 동료애와 공동의 연대성 원리에 기초해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동의 연대성이란 단순히 공동의 이익 창조에만 관심을 갖는 사회가 아니라 상호 간의 정신적, 내적 연합을 이루어가는 사회를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내적 연합이 이루어지는 노동공동체 속에서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를 소유한 당원들 간의 사랑의 연합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콜론타이는 첫째, 상호 관계에서의 평등성을 인정하며 남성의 독점과 여성의 노예적 굴종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타인의 권리를 상호 인정한다, 셋째, 함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동료의식을 갖고 이해하며 주의 깊게 그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합니다. 이런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가리켜 콜론타이는 '사랑-동료애'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남녀 간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 속에서 인간의 모든 영적, 정신적 잠재력뿐만 아니라 심리적 잠재력까지도 현실화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새로운 유형의 사랑을 가리켜 ‘날개 달린 에로스’라고 불렀습니다.

볼세비키 민주화를 위한 활동과 생애 후반
콜론타이는 1920년대 이후 더 많은 볼셰비키 당내 민주화에서 노동자들이 더욱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요구하며 ‘노동자반대파’ 활동을 벌입니다. 노동자반대파는 중앙당기구가 지방의 당조직과 노동조합을 지배하는 것, 당이 공장을 통제하는 데 있어 노동자들의 역할을 무시하는 것, 공장에서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보다 많이 쓰는 것, 당이 공장에 대한 집단통제를 1인 관리로 대체하려는 것 등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며, 콜론타이가 주도하게 됩니다.
노조를 국가가 관리하며 국가 계획의 선봉대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콜론타이는 정면으로 맞서고 이러한 생각을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합니다. 1926년까지도 노동자반대파는 다른 세력들과 연합하여 스탈린의 독재를 막아보려고 애썼으나 실패로 끝나고, 1933년 모든 지도자들이 당에서 축출되었으며 콜론타이를 제외한 전부가 제거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민주적 참여는 배제되고 국가 주도하에 독재적인 정책들이 시행되기 시작하였고 노동자를 위해 일어난 혁명 이후 노동자들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콜론타이는 권력은 노동대중과 인민에게 있다며 레닌을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을 실행하며 독재체제를 구축해 나가고 콜론타이는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져 버립니다.
노동자반대 그룹 해산 이후 그녀는 1922년 소비에트 연방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이 되었습니다. 1922년 레닌은 당내의 모든 파벌 활동을 금지했지만, 콜론타이는 그 뒤에도 당의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뒤 1923년 노르웨이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가 현지에서 노르웨이 공사관 공사로 파견되어 이후 26년까지 노르웨이에서 근무한 세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 되기도 합니다. 콜론타이는 스탈린이 집권한 뒤에도 공산당 내의 야당 역할을 계속해 나갑니다. 1940년대에는 독일에 파견되어 독일과 소련의 협상에 소련 대표단의 한사람으로 다녀왔고 1944년에는 핀란드와의 휴전협상 정책을 건의, 추진하여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과 핀란드 간의 갈등을 중재하였습니다.
콜론타이는 여성의 경제적 독립과 성적 문제에 대한 통제를 위한 여성의 권리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해석, 남성을 지배자, 여성을 피지배층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1969), 『공산주의와 가족』(1920), 『사회와 모성』(1913),『성적 관계와 계급투쟁』(1972) 등을 남겼습니다. 스탈린의 견제로 정부 요직에 나서지 못했지만 저술 활동과 강연 활동에 전념하였으며, 1952년 3월 9일 80세 생일을 한 달 정도 남긴 상태에서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그녀의 많은 글과 작품에 담긴 사상이 세월을 뛰어넘는 큰 울림을 주는 것은 가정과 사랑, 그리고 여성 해방이 여전히 미완성의 진행형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1918년 11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1차 ‘러시아 여성 노동자·농민대회’에서 여성이 경제력을 갖추고 가정의 주도권을 행사하는 새로운 가정의 비전을, 그리고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이란 글에서 그녀는 전통적인 혼인관계를 맺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며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깁니다.
“남성에게 기댈 필요도, 남성들에게 예속될 필요도 없는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에 마음을 여십시오. 가정은 여성을 종속시킬 뿐 아니라 비생산화함으로써 집단의 발전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노동자 국가는 남성과 여성, 두 평등한 노동자가 자유롭게 결합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국가는 여성에게 일자리를 주고 아이를 돌볼 것입니다. 유치원과 탁아소에서 집단 활동은 아이들로 하여금 내 것, 네 것보다 모두의 것을 깨쳐 사유재산 관념을 갖지 않도록 해줄 것입니다.”
“남녀 사이에는 예전 관계 대신에 새로운 관계가 발전하고 있습니다. 애정과 동지애의 결합. 더는 여성에게 가사의 굴레는 없습니다. 더는 가족 안에서 불평등은 없습니다. 더는 여성이 아무런 지원 없이 남아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더는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녀의 일에 의존할 수 있습니다. (...) 결혼은 서로 사랑하고 믿는 두 사람의 결합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