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필의 쓸쓸한 날] 바이올렛 에버가든 ‘되기’ — 장혜령, 최백규, 김건영, 김종연, 이소호의 詩
[문종필의 쓸쓸한 날] 바이올렛 에버가든 ‘되기’ — 장혜령, 최백규, 김건영, 김종연, 이소호의 詩
  • 문종필 문학평론가
  • 승인 2019.03.25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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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장에서 보인 그의 모습을 자네도 보지 않았나
그가 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뿐이라는 것을
그밖에는 어디 써먹을 데가 없어
그는 살인 기계라고.
바이올렛 에버가든 ⓒ 교토 애니메이션 [이미지 = 한송희 에디터]
바이올렛 에버가든 ⓒ 교토 애니메이션 [이미지 = 한송희 에디터]

‘되기’

어린 시절부터 소녀는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살인 기계‘화’ 된다. 길베르트는 소녀의 이러한 행동을 안쓰럽게 쳐다보며 부끄러워했지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소녀를 ‘도구’처럼 사용해야 했다. 하지만 마지막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길베르트는 오랜 시간 숨겨 둔 말을 꺼내놓는다. “자유롭게 살아야 해, 마음속 깊이 너를 사랑했어”라고 말이다. 

소녀는 이 말을 듣고 자유롭게 산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오랜 시간 살인 기계로 살아온 탓에, 사랑한다는 말을 뱉지도 느낄 수도 없었던 소녀는 길베르트가 남긴 단어 뜻을 느끼기 위해 긴 여정을 시작한다. 이 의지가 <바이올렛 에버가든>을 끌고 간다. 

소녀는 사람을 죽이는 전쟁 도구로 사용되었고, 전장에서 살인 기계로 불렸다. 소녀의 ‘쓸모’는 사람을 죽일 때만 빛났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이러한 ‘쓸모’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종이 화폐가 화폐의 기능을 상실하면 쓸모가 사라지는 것처럼 사람을 죽일 수 없는 장소에서 소녀의 ‘쓸모’는 무용지물이 된다. 

소녀가 해왔던 ‘쓸모’는 지독한 관성 안에서 작동된 것이다. 관성만큼 지독한 것은 없다. 멈추고자 노력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 관성의 힘이지 않겠는가. 인간의 정서도 마찬가지다. 소녀는 오랜 시간 살인 기계로 살아온 탓에 도구적인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이올렛 에버가든" 에피소드 8
"바이올렛 에버가든" 에피소드 8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소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길베르트의 친구인 우편사 사장 하진스의 도움으로 ‘쓸모’에 쏟았던 에너지를 전혀 다른 쪽으로 쏟게 된다. 의뢰인들의 편지를 대필해주기로 한 것이다. 

편지는 의뢰인들의 절박한 사연을 공감하지 않고서는 대필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을 직감한 소녀는 기계화된 자신의 몸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의뢰인들의 감정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궁극에는 길베르트가 남긴 마지막 말을 이해하게 된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 작동되는 언어의 본질을 잘 드러내 보여줄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해야 효과적인지를 잘 다룬 만화이다. 낭만적일 수 있으나, 이런 낭만적인 만화가 나는 ‘진정한 참여문학’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 지면에서는 바이올렛 에버가든 ‘되기’를 통해 『창작과 비평』 183호에 수록된 시를 읽고자 한다. 만화 속 주인공처럼 대상(편지=시)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바이올렛 에버가든 ‘되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하지만 바이올렛 에버가든 ‘되기’에 수동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항 없는 수동은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어리석은 일이니까.

5인의 시 

날것을 맛있게 씹어 삼킬 수 있지만 신선하지 않으면 탈이 난다. 그래서 익혀 먹고 잘라먹고 저린 후 목구멍으로 흘러가게 놔둔다. 감정의 영역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무작정 토해낼 수 없다. 토해내는 방식이 앞에서 논한 명제를 배반하는 때도 있지만, 날것을 쏟아내는 방식은 개별성을 위협하고 독자를 지루하게 만든다. 그래서 시인들은 감정을 더욱 잘 전달하기 위해 적합한 형식을 고안해냈는지 모른다. 

곽문영, 김건영, 김유림, 김종연, 박은지, 배수연, 서윤후, 안태운, 이소호, 장혜령, 최백규, 최윤빈 시인의 시를 읽는 작업은 즐겁고 괴로웠다.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이들의 언어를 만지는 과정은 아름다운 물고기를 바라보는 경험이었다. 터진 몸과 손끝이 스칠 때면 이들이 품은 사연을 셈하며 천천히 이불을 덮었다. 

이 짧은 지면에 12명의 시인을 모두 다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시인들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언급하기도 싫다. 내 마음을 끌어당겼던 장혜령, 최백규, 김건영, 김종연, 이소호 시인에 대해 ‘취향’의 영역에서 짧게 논하도록 한다. 

인간처럼 비밀과 고백을 좋아하는 존재는 없다. 누군가의 은밀한 사연을 엿듣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과 눈빛을 숨기며 말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비밀을 손쉽게 털어놓는지 모른다. 

이소호 씨의 『캣콜링』을 재미있게 읽은 것은 그의 거친 고백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모든 고백이 의미 있다고 할 수 없으나, 소호 씨의 고백은 단단하고 위태로웠다. 이 흐름이 『창작과 비평』 183호에도 여감 없이 발휘되었다. 하지만 단단한 고백에 면역된 독자 입장에서는 매력을 느끼기 힘들다. 「자기혐오 예술가 1인의 유언록(有言錄)」도 반복이지만, 소호 씨는 『캣콜링』에 실린 마지막 시 「이경진, 「행복한 부모에게 어떻게 우울증을 설명할 것인가*(How to explain depression to happy parents)」, 단체영상, 17,529시간, 2013년」에서 사용한 방법을 위의 시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했다. 반복은 차이와 의미를 생성시키지만 이런 반복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매체를 시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방식이 새롭다고 할 수 있으나, 이러한 행위는 “문단이라는 곳에서 살아남고자 매번 새로운 것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작동한 심리로 보인다. 그의 장점이 빛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만들고자 하는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것은 멀리 있지 않다. 가까운 곳에 있다. 새로움은 ‘매체’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자신 안에 있는 숨겨진 그 ‘무엇’으로 인해 작동한다. 

하지만 이런 몽상이라면 다르다. 두 번째 시집 ‘전체’를 새로운 매체를 통해 꾸며보는 것이다. 미친 방법일 수도 있으나,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시집 ‘전체’를 이렇게 실험한 시집이 없었다는 점에서 미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두 번째 시집은 현란한 미술관이 되는 것이다. 둘 중 하나다. 고백을 두 번 반복하거나, 미치거나.    

1

 

사랑하지 않지, 텔레비전을 켜둔 모텔 방 
침대 위에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 당신은 
내 허벅지에 다른 손을 뻗거나
목을 조르며
뒤를 파고들 뿐이지

 

창밖엔 진눈깨비 흩날리고, 이 골목이 
거리거리가 
더러운 비닐을 덮고 누운 
남자의 살냄새

 

쇼원도 앞 
쓰레기차가 지나간 자리 
누군가 핏빛 오수를 
튀기며 걸어가고

 

저기, 비명처럼 
묶어도 새어나오는 것

- 「고해(呱咳)」 부분

간밤 온 비로 
얼음이 물소리를 오래 앓고

 

빛 드는 쪽으로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

 

이른 아침
맑아진 이마를 짚어보고 
떠나는 한 사람

 

종소리처럼
빛이 번져가고

 

본 적 없는 이를 사랑하듯이

 

깨어나 
물은 흐르기 시작한다

- 「물의 언어」 부분

장혜령 씨의 신작 시 「고해(呱咳)」와 「물의 언어」는 흐물흐물 날아다니는 담배 연기 같다.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일반적으로 고해는 ‘苦海(ⓑ)’ 또는 ‘告解(ⓒ)’라고 쓰는데, 시인은 고해를 비틀어 ‘고해(呱(ⓓ)咳(ⓔ))’라고 제목을 적었다. 사전에 없는 말이다. 한자의 쓰임을 확인했을 때, 이 의도는 울고 웃는 감정 상태를 ‘고해’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서로 다른 두 감정이 교차되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겠으나, 이 시에서는 “침대 위에서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는 당신” 때문이다. 

과거에는 웃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감정 상태를 이 시는 자연스럽게 흘렸다. 시에서 사용된 반점(,)은 당신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창출한다. 특이한 것은 그가 운영하는 감각(시각, 청각, 후각)이, 당신과 멀어질 수밖에 없는 심리 상태를 부담 없이 펼쳐 보인다는 사실이다. 「물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얼음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담백하게 표현했다. 이 의도가 과하지 않다. 

저 화상

배를 가르고 나온 애비는 흰 종이였다 
수술이 끝나도 깨어날 줄을 몰랐다 
아버지가 누운 침대가 자라고 있다 적출된 간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나머지가 이제야 태어난 것을 알았다 모든 일에 프로가 되라고 하셨지요 나의 장래희망은 프로크루테스입니다 남은 평생 라면을 먹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 「일요일-사전(蛇傳)7」 부분

김건영 씨는 연작시 「일요일-사전(蛇傳)7」과 「파롤의 크리스마스-사전(蛇傳)8」을 들고나왔다. 시인마다 연작시를 쓰는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건영 씨는 “꼬인” 언어를 통해 세상과 나를 부정하고, 부조리한 사회가 내세우는 통념을 유쾌하게 고발한다. 이 방식을 풍자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으나, 그는 높은 위치에서 연민을 꺼내놓지 않는다. 거리를 끊고 직접 사회 안에 들어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펼쳐 보인다. 그의 고백은 그래서 개별성과 보편성 ‘사이’에 존재한다. 누군가는 시인의 노골적인 실험을 비판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의도가 오히려 더 매력적인 것 같다. 예측 가능함이 지루하지 않다. 

화자는 모든 사람이 매일 야근해야 하는 세상이 와야 한다고 기도한다. 이 행위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조롱하기 위한 발언이다. ‘아멘’이라고 기도하는 행위는 ‘라면’으로 발음되는데, 이 지점에서는 부조리한 세상을 창조한 신과 사회적 시스템이 도마 위에 오른다. 더 나아가 라면은 화자 자신으로 비유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로 확장된다. 이 말을 곱씹어 보면, 웃기고 슬픈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라면은 매일 먹기 힘들다. 오랜 시간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본 사람은 안다. 밥은 매일 먹어도 지루할 틈이 없지만, 매일 먹는 라면은 속이 느글거려 불쾌한 기분을 달고 살아야 한다. 건강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면 소화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이 시에서 등장하는 화자는 라면조차도 온전히 먹지 못한다. 눌어붙은 라면을 먹어야 하고, 끓인 라면이 아닌 컵라면을 먹어야 한다. 그에게 라면은 맛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채워야 하는 물질이다. 건영 씨의 「일요일」은 유쾌하고 상쾌해서 덜 아프지만 씁쓸하다.

월요일에 죽은 아버지가 좋아하던 비가 월요일마다 온다 어머니도 불 앞에서 차를 달이는데

 

마주 앉아 쌓인 여름옷을 개는 오후 같은 것이 좋았다 사이좋게 오늘의 저녁이나 정하며

 

숨을 오래 마시면 이곳이 녹슬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흰 돌과 우주에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침대에 누워 뜨거운 가슴을 움켜쥔 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 바라보았다

 

그립지 않아서 슬퍼할 수가 없다

- 「천국을 잃다」 부분

나는 타오르는 목련나무를 맹렬히 노려보고 서 있다

 

너무 뜨거워 설핏 녹아버릴까봐 겁이 난다 캄캄한 동굴 같은 눈으로 나를 전부 집어삼킬 것만 같다 죄악감을 태우는 냄새가 번지기 시작한다 흰 날갯짓이 돋아나듯이

 

누가 계속 올라와야 할 시간이라 부르고 있어서

 

목련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나갈 것이다

- 「비행」부분

최백규 씨는 신작시 두 편 「천국을 잃다」와 「비행」을 선보였다. 이 시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포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포즈가 물러난 장소에서 조심스럽게 산책할 수 있다. 위의 두 편의 시는 죽음을 응시하면서 지금 현재의 삶을 긍정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응시하면서 삶을 움켜잡는다. 죽음의 문턱에선 “사랑에 대해서 아름다움에 대해서 감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백규 씨는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자다. 그가 “목련을 밟으며 앞으로 걸아나갈 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함께 발을 맞추게 된다. 봄날에 백규 씨의 의지를 독자 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여기서는 지금까지 느끼던 서정을 바닥에 내던져 깨뜨리고 유리조각 사이에서 꺼내 갈기갈기 찢어 던져버린다.

 

“미래라고 현실문학이 유행하겠니?”

 

이 모든 건 하나의 장면이고
한 장의 이미지로 축약이 가능하며 
정지된 상태를 촬영하는 방식으로 영상이 된다.

 

이것은 그런 씬이다.

 - 「A-long take film」 부분

김종연 씨는 「A-long take film」에서 자신의 시론과 감정을 단숨에 적은 것 같다. 그는 “이것은 그런 씬이다”라며 자신의 시가 영화처럼 알레고리화 될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이 시는 하나의 장면이고, 이미지는 축약이 가능하다. 

문학이 예술을 끌고 가는 시대가 아니라, 영상이 예술을 끌고 가는 시대인 것 같다. 서로 다른 장르가 오염될 수밖에 없는 시대이지만, 영상이 압도적으로 시대를 이끌어 가고 있다는 몽상을 한다. “시를 영상으로 옮기”(ⓖ)는 방법에 차별화를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9년 3월 19일

문종필 : 문학평론가. 
웹진 <문화 다> 책임 편집동인. 1980년생. 2017년 <시작> 문학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ansanssunf@naver.com

*이 글에서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이소호, 「사과문」, 『캣콜링』, 민음사, 2018, 53쪽.  
ⓑ 고해(苦海): 현세의 괴로움이 깊고 끝없음을 바다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 고해(告解):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받기 우하여 하느님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고백하여 용서를 받는 일
ⓓ 울 고 
ⓔ 기침 해, 방긋 웃을 해, 어린아이 웃을 해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2018, 221쪽.  
ⓖ 이승하, 『이승하 교수의 시쓰기 교실』, 문학사상사, 2004, 110쪽.

※ 위 평론은 웹진 "문화 다"와 공동으로 게시한 작품입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letters_ko&ps_boid=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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