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페이퍼 = 김상훈 기자] 장관후보자들의 자격을 검증하는 인사청문회가 지난 26일부터 진행되고 있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위장전입이나 탈세, 부동산 부당 취득의 문제 등이 제기됐다. 갈등과 피로로 점철된 한국 사회에서 책임 있는 관료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지만 모범이 될만한 인물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어둡고 긴 혼란의 시기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승하 교수는 강직한 관료의 대표격인 인물로 조선 말기 의병장이자 선비였던 최익현을 제시한다. 최익현은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난 조선의 관료이자 선비로, 일반에게는 단발령에 거부했다는 것과 일흔이 넘은 고령에 의병을 일으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승하 교수는 최익현의 삶을 오랫동안 추적해 “마지막 선비 최익현”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3월 26일 오후 5시 예술가의집 세미나실에서는 한국인물전기학회가 마련한 강연이 개최됐으며, 강연자로 나선 이승하 교수가 최익현과의 만남과 삶에 관해 설명했다.
![예술가의집 서울 세미나실에서 이승하 교수의 강연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 김상훈 기자]](/news/photo/201903/41440_25720_1523.jpg)
- 최익현 전기, 위인전 한 권도 없다는 의문에서 시작된 10년의 전기작업
일반인에게 최익현은 단발령을 거부하며 “내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는 자를 수 없다”는 말을 한 사람, 일흔이 넘는 고령에 일제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킨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다. 이승하 교수 또한 청소년 시절 최익현을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의병장이 되어 군사를 모아 일본과 대적했던 분”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 위인전을 즐겨 읽었다는 이승하 교수는 최익현에 대한 전기나 위인전이 단 한 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어째서 최익현 선생에 관한 전기작업을 아무도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익현의 전기나 위인전이 없다는 것에서 나온 호기심은 이승하 교수가 최익현의 삶을 추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와 거리가 먼 문학도일 뿐이었던 이승하 교수는 점점 역사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고, “최익현 선생을 알수록 이런 대단한 분을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최익현 선생을 알려야지 라는 생각에 전국 각지를 답사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최익현 선생이 죽음을 맞은 대마도부터 귀향을 당해 머물었던 흑산도, 제주도 등을 답사하며 사진을 찍고 흔적을 추적한 세월이 10년에 달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선비 최익현"을 들고 강연을 진행하는 이승하 교수 [사진 = 제공]](/news/photo/201903/41440_25721_5351.jpg)
이승하 교수는 답사와 연구 결과를 묶어 500매가량의 어린이용 위인전으로 작업을 했으나, 어느 출판사에서도 수익성을 이유로 원고를 받아주지 않았다. 몇 차례 좌절을 겪은 이승하 교수는 어린이용 위인전은 초고라고 생각하기로 했고 “구한말 격동의 시절, 역사적 흐름 속에 최익현 선생을 조명”하고자 평전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평전의 형태가 된 후에도 ‘근대화에 방해가 된 보수적 인물이다’, ‘생애에 극적인 드라마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반려를 당하게 된다. 10년의 취재와 연구, 수 차례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남출판사를 통해 “마지막 선비 최익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에 이른 것이다.
- 최익현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대쪽같은 상소문’
이승하 교수가 최익현의 삶에서 매력을 느낀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이승하 교수는 최익현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고종과의 사이에서 오간 상소문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최익현이 본격적으로 상소문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1868년 36살 때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사헌부는 지금의 감사원과 유사한 곳으로, 잘못된 정치 기강을 바로잡고 벼슬아치의 잘못을 탄핵하던 관청이었다. 사헌부에 임명되자마자 최익현은 고종에게 강력하게 건의하는 상소문을 쓰게 되는데 이것이 ‘시폐 4조’의 상소문이다. 시폐 4조에는 흥선대원군이 시행했던 정책의 모순점이 담겨 있었으며, 이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대원군을 모욕하는, 목숨을 건 일대의 모험이었다.
최익현은 평생 무수히 많은 상소문을 통해 고종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할 것을 꾸준히 촉구했다. 1873년에는 상소문으로 대원군을 실각시키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제주도로 귀향을 떠나게 되기도 했다. 직언을 한 상소문으로 인해 흑산도로 귀향을 가기도 했던 최익현은 귀향 중에서도 올바른 소리를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 기개는 고종과의 상소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98년 고종은 최익현에게 ‘의정부 찬정’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조정에 돌아오기를 바랐는데, 최익현은 왕명을 거절하며 이유를 다음과 같은 글로 밝혔다.
성상께서는 자질이 순박하고 인자하시며 남을 사랑하고 옛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외래품에 현혹되고 성품이 욕심 부리는 일에 습관이 되었으며, 유약함은 넉넉하나 강단이 부족합니다. 작은 일에 밝고 큰일에 어두우며, 아첨을 좋아하고 정직을 좋아하지 않으며, 안일을 알고 노고를 알지 못하시어, 삼십여 년 동안 하늘이 위에서 경고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는 데도 돌보지 않으시어 오늘날의 화를 초래한 것입니다.
이는 “임금이 정신을 차리고 정치를 잘 했으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겠냐는 책임 추궁의 글”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올바른 말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고종과의 사이에서 많은 편지를 남기기도 했던 최익현은 임금이 새겨들어야 할 국정에 관한 사항을 적은 ‘시무12조’, 을사조약 체결에 나선 다섯 명을 즉각 처벌하라는 ‘청토오적소’ 등 상소문을 꾸준히 올리며 고종이 바른길을 갈 수 있기를 꾸준히 촉구한다.
이후 애국의 길이 일본과의 싸움이라고 깨달은 최익현은 1906년 ‘창의토적소’를 써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의병을 모은다. 태인에서 봉기한 의병은 정읍, 흥덕, 순창을 거쳐 남원으로 향하려 하지만, 남원은 조선의 군대가 지키고 있었고 결국 조선 정부에 의해 의병은 해산당하고 만다. 압송되어 대마도 감금 3년 형을 선고받은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이승하 교수는 “국민과 민중을 생각하는 정치가들이 본받아야 할 인물이 있다면 최익현 같은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이야기했다. 최익현처럼 올곧은 정신을 가진 이가 있었기에 국가가 지켜질 수 있었던 것 이라는 것이다. 이승하 교수는 “대쪽같은 선비정신의 선조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는 이 시대에 최익현 선생이 선조 중 한 분이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최익현 선생은 문인은 아니었지만 시를 남기셨는데, 이분의 작품이나 상소문을 다른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에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