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4) / 언어를 조율하는 뛰어난 능력 - 이은규 시인의 '조각보를 짓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4) / 언어를 조율하는 뛰어난 능력 - 이은규 시인의 '조각보를 짓다'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4.1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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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4) 언어를 조율하는 뛰어난 능력.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4) 언어를 조율하는 뛰어난 능력.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4) / 언어를 조율하는 뛰어난 능력 - 이은규 시인의 '조각보를 짓다'

 

조각보를 짓다

이은규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 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生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 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色스러움이 서려 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 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되네요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 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현빈지문(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국제신문」(2006. 1. 1)

 

<해설>

조각보는 쓰다 남은 색색의 천 조각을 이어서 만든 보자기다. 옷 같은 것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을 이용해 만든 보자기로, 옛 조상의 높은 디자인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조각보는 일상생활에서 쓰다 남은 천을 재활용한다는 의미에서 서민들의 지혜의 소산이었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시는 구어체로 슬슬 풀어나가는 말이 여간 감칠맛 나지 않아 “生의 감칠맛”을 더한다. 전설 속의 마고할미까지 등장하지만 ‘외할머니가 조각보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 외에 구체적으로 이야기된 ‘사건’은 하나도 없다. 대단한 입담이다. 시가 끝나도록 이뤄진 실제 상황은 ‘외할머니가 조각보를 다 만들었다’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 과정이 흡사 만화경을 들여다보듯 천태만상이요 점입가경이다. 의성어와 의태어, 순우리말과 한자어가 멋들어지게 어울려 한마당 언어의 놀이판을 벌이고 있다.

시의 내용에 별 대수로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구수하게 풀어나갈 줄 안다는 것은, 이 시인의 타고난 재능 덕분일까, 습작의 연륜 덕분일까. 나는 후자로 보고 싶다. 소재를 오래 삭히고 익혔기에 이런 시를 쓴 것이리라. 신춘문예용 시를 만들어 요행수를 노린 이라면 이런 시를 절대로 쓸 수 없다.

어조와 어투, 분위기와 흐름, 소재와 주제 등 모든 것이 참으로 한국적인 시임에도 상당한 세련미를 보여주는 것 역시 이 시의 돋보이는 부분이다. 조각보가 완성된 순간을 표현한 부분을 다시 보자.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는 조각보의 완성을 새로운 별의 탄생으로 격상시키는데, 무리수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시의 세계로 빨려들게 하는 언어의 블랙홀 같다.

이 시를 설화적인 분위기로 이끌고 가기 위해 등장시킨 마고할멈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마고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는 이 시의 또 다른 빛나는 부분이다. 이빨 빠진 할머니의 웃음을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는다고 하니, 원숙한 언어 조율 능력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소재 선택과 주제 설정, 그리고 언어 표현력과 대상의 형상화 부분에 있어 역대 어느 해 어느 신문의 당선작에 못지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현빈(玄牝)이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인데 새끼를 낳는 검은 암소로, 만물을 생성하는 존재를 뜻한다. 현빈지문이란 여성의 자궁을 가리킨다. 새 생명을 점지해주는 마고할멈의 도움을 받은 화자의 외할머니는 다 만든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흡사 태몽을 꾸었던 어느 젊은 날처럼.

이은규 시인은 2008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추운 바람을 신으로 모신 자들의 경전」으로 재차 당선하였고, 시집 『다정한 호칭』을 냈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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