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픽션] 이경란 소설가의 「무슈 파비용의 굴욕」
[미니픽션] 이경란 소설가의 「무슈 파비용의 굴욕」
  • 이경란 소설가
  • 승인 2019.05.1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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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파비용입니다. 무슈 파비용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저는 지금 깊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어둠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빛이 완벽하게 차단된 오크통에서 몇 년을 견딘 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어둠에도 층위가 있음을 저는 이곳에 와서 알게 됐습니다. 오크통의 어둠은 지낼 만했습니다. 아니 지낼 만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환희의 어둠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곧 세상으로 나가게 되리라는 찬란한 약속을 담보한 어둠이었으니까요. 무려 백 년이 걸린 르 파비용 탄생의 마지막 숙성과정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의 어둠은 뭐랄까, 오크통에서 희망에 무르익어가던 나날과 비교해 보면 극명한 대조라고나 할까요. 와인으로 태어난 제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군요. 하긴 세상 모든 것들에는 층위가 있겠지요. 상승은 짜릿한 일일 테고요. 네, 그럴 겁니다. 신분이 상승하고 주목을 받고 권력을 휘두르는 주체가 된다면 살아 숨 쉬는 보람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저 파비용이 이토록 속물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군요.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태생부터가 자부심으로 충만한 존재인데 말입니다. 아, 섣부른 오해는 말아주십시오. 당신이 쉽게 상상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획득하게 되는 천박한 부유함, 위선적 명예 같은 것들을 상상하신다면 당신이 틀렸습니다. 저는 뜨겁고 척박한, 그래서 때로 가혹하기까지 한[Terroir(프). 포도를 재배하기 위한 제반 자연조건을 총칭하는 말.] 테루아를 견디며 백 년을 이어온 포도나무였습니다. 세계의 총체적 역사로서 백 년은 깃털보다 가벼운 시간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개별자로서 살아내야 하는 백 년을 상상해 보세요. 어떻습니까? 당신은 이 세계의 백 년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제 고향은 프랑스 남부의 론 지방입니다. 마르세이유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지요. 척박한 토양으로 이름난 곳입니다. 아실는지 모르지만 와인이 될 포도나무는 비옥한 토양을 허락받지 못합니다. 편안한 환경에서는 에너지가 응축되지 않는 법이지요.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위기가 없다면 절실함도 없을 테고 강하게 단련되지도 못할 테지요. 진정한 아름다움에는 상처가 깃들어야 마땅합니다. 훼손되지 않은 생래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역경을 이겨내고 스스로 우뚝해진 아름다움이야말로 갈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요? 저는 연약한 뿌리의 끝을 조심스레 뻗어 화강암 사이의 흙을 더듬었습니다. 암석에 부딪히고 긁히면서 간신히 뿌리를 내리고 제 힘으로 홀로 섰습니다. 뿌리가 땅 밑에서 자리를 잡는 동안 땅위에선 가지와 줄기와 이파리가 온몸에 상처를 입고, 그로 인한 영광을 새기고 있었지요. 낮에는 뜨거운 햇살을 견디고 밤이 되면 추위에 떠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겨울이면(Massif Central. 프랑스 남부의 고원 지대.) 마시프 상트랄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칼날에 몸을 베이는 아픔으로 진저리를 쳤지요. 해가 뜨고 지고, 계절이 흐르고, 포도밭의 농부들이 바뀌는 동안 저는 백 년을 견뎌냈습니다. 단단하고 지혜로운, 늙은 포도나무가 되어 포도송이를 맺었습니다. 거기에는 백 년 동안의 꿈이 알알이 영글어 있었지요. 사실 그 꿈이 아니었더라면 저는 세상에 태어날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꿈은 과연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정합니까? 기회는 모두에게 평등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 기준은 어떻게 마련되고 어떤 방법으로 실현됩니까?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이 세계의 백 년을 견딜 수 있는지요?

오크통을 벗어나 매끈한 병에 자리를 잡은 저는 론의 저장고에서 행복을 꿈꾸었습니다. 이제 곧 누군가의 기쁨, 누군가의 축복이 되리라는 아름다운 꿈이었지요. 설레더군요. 설렘은 곧 행복이었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차용) 행복이란 그 자체로 자족적인 것이지요. 좋은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언제까지고 그 시절에 머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회한에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저장고에서 처음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된 그날의 흥분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만약, 이건 순전히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말입니다, 만약 제가 아직도 저장고에 우두커니 자리하고 있다면, 기대와 설렘에조차 진력이 나지는 않았을까요?

저는 어느 날 갑자기 거대한 화물선의 밑바닥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아마 봄날이었을 겁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지요. 어쨌거나 저는 백 년을 계절의 변화와 함께해온 몸이니까요. 배는 홍콩행이라고 하더군요. 홍콩은,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아시아의 와인 집산지입니다. 아시아에서 소비되는 와인은 대부분 홍콩을 거친다고 합니다. 기분이 썩 괜찮았습니다. 조국을 떠나게 된 것이 못내 서운하긴 했지만 말로만 듣던 아시아라니요. 그것도 홍콩이라니요. 동서양이 공존한다는 다이내믹한 항구 도시 홍콩이 저의 또 다른 고향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에 들뜬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국적 풍물에 한껏 젖으리란 기대도 매혹적이었던 데다 무엇보다도 마침내 저의 진가를 발휘할 날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제 몸은 우아한 가넷 컬러로 빛납니다. 향은 또 어떻고요. 라즈베리와 블랙베리의 달큼한 향에, 호두와 감초의 풍미, 오크통에서 우러나온 탄내와 타르향이 어우러져 있지요. 게다가 타닌의 맛은 벨벳처럼 부드럽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요소가 훌륭하게 균형 잡혀 긴 여운을 남기는 와인이 바로 저, 파비용입니다. 이제 당신도 제가 허황된 신기루나 쫓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아시겠지요.

하늘이 유달리 높던 오후였나,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저는 그날도 다소 나른하게, 하지만 결코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 진열장에 누워 있었어요. 아, 이런 고혹적인 권태야말로 오랜 고독을 견디는 동안 제 영혼에 깃든 장엄 같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황홀한 권태를 깨는, 무도하고도 거친 어떤 손길이 제 목을 휘어잡는 것 아니겠어요? 그는 이제는 익숙해진 한국말을 하는 중년의 사내였습니다. 척 보기에도 다혈질로 보이는 그는 일행과 시시껄렁한 잡담을 큰 소리로 주고받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더군요. 저는 설마 그 사내가 저를 선택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와인을 아는 사람이라면 병에 부착된 라벨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고개를 주억거린 후에야 신중하게 손을 내미는 법이니 말입니다. 그는 제 몸값만 확인하고는 저를 데려갔습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충격의 시간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며칠이나 가방 속에 욱여넣어졌던 제가 부려진 곳은 어느 아파트의 주방이었습니다. 사내의 여자는 저를 가방에서 꺼내자마자 캄캄한 싱크대 구석에 처박아두더군요. 싱크대 구석이라니요.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온도가 조절되는 와인 셀러여야 하는데요.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홍콩달러로 사오천 불은 너끈한데 말이지요. 아, 가격으로 저를 표현하는 일이 저로서도 그리 탐탁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땅에 오고 나서 제가 겪은 일들을 돌이켜 보니 저도 이제 몸값 정도는 어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리 제가 고결한 품성과 깊은 향을 간직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런 진가를 알아보지는 못하더군요. 그저 얼마짜리, 라고 해야, 호오, 제법 고급이로군, 하고 감탄사를 한번 흘려주니 말입니다. 안타깝지만 저도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타면서 그들의 행태를 지켜보고 또 당해보고 나니 이제는 만신창이가 된 기분입니다. 스스로 얼마짜리라고 저 자신을 규정하다니요. 마치 그게 제 결정적 정체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어떠한 희망도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절망의 암흑 속에서 며칠을 지낸 후 저는 다시 사내의 거친 손길에 몸을 내주어야 했습니다. 사내의 무례함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는 흥분에 몸을 떨었지요. 어느 파티에 나를 데려가려나, 잔뜩 기대를 했습니다. 이왕이면 정결하게 다려진 테이블 보 위에서 여러 사람의 찬탄의 눈길을 받으며 날씬하고 투명한 디캔터에 담긴 후에 쨍그랑 소리마저 투명한 잔에 나뉘어 축배의 재료로 피어나길 바랐지요.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진종일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자동차 안에 널브러져 있었으니까요.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사위가 어둑해져서야 사내는 저를 다시 집어 들었습니다. 제가 다시 부려진 곳은 아마도 술집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전무라고 불리는 낯선 이에게로 넘겨졌습니다. 그때만 해도 순진했지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니까요. 질펀한 술자리를 모면하고 전무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라거나 다른 어떤 기쁜 일을 축하할 수 있다면 그것 참 보람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봉투도 아니고 와인이 다 뭐냐는 전무의 말이 아니었다면 제 안도는 조금 더 연장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이어졌습니다. 건설회사의 전무로부터 오만한 공무원에게로, 그 아내의 수술 집도의에게로, 그 의사의 아들의 담임교사에게로 저는 넘겨지고, 넘겨지고, 또 넘겨졌습니다. 그러는 동안 차 안에, 서랍 안에, 책상 아래에 며칠 씩 방치되어 있었지요. 제가 든 상자 안에는 두툼한 봉투가 비집고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절망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제 곧 빛을 보게 되리라는 희망, 누군가에게 기쁨과 위안이 되리라는 기대가 쉽사리 버려지지는 않았던 거지요. 백 년의 세월을 쉽사리 부정당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는 다시 이 무거운 암흑 속에 놓여있군요. 아, 제가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나요. 그 담임교사 말입니다. 그는 처음 저를 데려온 홍콩에서의 사내, 그의 아내였습니다. 그는 퇴근길에 저를 데리고 와서는 봉투만 꺼낸 뒤 저를 싱크대 구석으로 밀어 넣더군요. 순간 저는 충격과 절망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 자리는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동안 방치되었던 바로 그 자리였으니까요. 

또다시 어둠에 갇힌 저는 처참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될 운명임을 모른 채, 갖은 굴욕을 겪으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던 저 자신이 참담했습니다. 저는 이제 포도밭에서 영글어가던 그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기에도 힘겨워졌습니다. 오크통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냈던 시절도 아득하게만 느껴지고 홍콩행 배에 올라 설레었던 그날도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쳇바퀴 같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길이 없으리란 예감에 저는 몸을 떨었습니다. 제게 이런 불행을 안겨준 그들을 미워해야 마땅하겠지요. 세상에 태어나 단 한번 주어진 삶을 이런 식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물론 미웠습니다. 증오했지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말입니다. 제가 그토록 좌절하고 절망하면서도 자꾸 희망을 지어내게 되더라는 사실이지요. 저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그 인간들을 차마 끝까지 증오할 수가 없더라는 것이지요. 오히려 이리저리 휩쓸려 상처받는 인생들이 어찌 그들뿐이겠느냐는 퍽 너그러운 연민마저 생겨나더군요. 제 영혼에 각인된 테루아가 있는 것처럼 그들도 자신의 영혼에 각자의 테루아를 새기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저 또한 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저 역시 예기치 못하게 여기까지 흘러온 걸요. 그들이 자신들의 굴욕에 무감해져왔듯 저 또한 제가 겪은 굴욕에 익숙해지기까지 했지요. 게다가 와인으로서는 치명적이게도 저는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변질된 정체성으로 더 이상 무엇을 고수할 수 있을까요. 저는 타협이 왜 합리적인지 드디어 알게 되었습니다.

자,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싱크대에서의 나날이 더 이상은 고통스럽지 않게 느껴지는군요. 잠시만 기다리면 다시 세상으로 나가게 될 테니까요. 그 우악스런 남자의 손길에 거머채여 자동차에 팽개쳐지겠지요. 그런 다음 어느 술집으로, 어느 음식점으로, 또 다른 어떤 곳으로 건너다니겠지요. 그러다 운이 좋으면 언젠가는 저의 진가를 알아줄 주인에게 인도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끝끝내 그런 날이 오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제 자랑스러운 미감과 향의 변질을 굳이 확인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닐 테니까요. 그런 날만 오지 않는다면 제 몸값은 변함없을 테니까요. 저는 최후의 순간까지 백 년의 세월을 품은 와인 르 파비용의 자부심으로 이 굴욕적인 생을 견뎌볼 작정입니다.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경란
소설가 
2018 <문화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오늘의 루프 탑>으로 데뷔. dukpan10@hanmail.net

※ 위 미니픽션은 웹진 "문화 다"와 공동으로 게시한 작품입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intre_etc&ps_boid=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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