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2) 사회의 온도를 측정하는 소설가 하명희
[인터뷰]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2) 사회의 온도를 측정하는 소설가 하명희
  • 김대현(문학평론가), 하명희(소설가)
  • 승인 2019.05.20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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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19년 5월

참석자 : 김대현(인터뷰어, 문학평론가), 하명희(소설가)

김대현 : 하명희 선생님 안녕하세요. 문학평론을 하는 김대현입니다. 오늘은 웹진 〈문화다〉 특집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들’ 관련하여 박일환 시인에 이어 두 번째로 선생님과 대담을 진행하려 합니다. 대담을 준비하기 위해 선생님의 작품 『불편한 온도』(2018, 강)와 『나무에게서 온 편지』(2014, 사회평론)를 다시 천천히 읽어보았습니다. 처음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읽는 사람을 서늘하게 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그에 관련된 생각들을 선생님께 직접 듣고 싶었는데요. 이번 대담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마침 이번에 『불편한 온도』로 제22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셨는데요. 상당히 오랜 기간 정련의 시간을 가진 소설집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수상을 축하드리고요. 본격적으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읽는 분들을 위해 간단한 자기소개와 근황을 조금 들려주셨으면 합니다.

하명희 : 고맙습니다. 며칠 전에 시상식이 있었는데요, 제가 올해 등단한 지 딱 10년이 되거든요. 신인상을 등단 10년 이내의 작가에게 준다고 하더라고요. 『불편한 온도』 출간이 더 늦어졌으면 못 받을 거였어요. 그동안 작품집을 출간하려고 여기저기 투고도 하고 그랬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재작년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 〈그 후〉에 나온 강출판사를 찾아갔다가 평론하는 정홍수 선생님을 뵙고 소설을 막 들이밀었어요. 좀 봐주세요, 하고. 그때 마음이 바닥을 치던 때여서 거기서도 퇴짜를 맞으면 이건 다 버리고 다시 쓰자, 그랬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정홍수 선생님이 출간을 결정해주셔서 이렇게 좋은 상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나무에게서 온 편지』는 벌써 출간된 지 5년이 지난 장편소설인데 90년대 초 고등학생들 이야기를 누가 읽어줄까 고민하다 전태일문학상에 투고를 했었어요. 그때도 그랬던 것 같아요. 소설은 썼는데 어떻게 독자와 만나지? 저의 경우는 소설 쓰는 것만큼 그 다음이 또 어렵고 힘들더라고요. 지금은 그동안 썼던 30매 가량의 짧은소설과 단편소설들을 하나의 단편집으로 엮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온도 책 표지
불편한 온도 책 표지

김대현 : 먼저 이번 수상작인 소설집 『불편한 온도』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2009년 선생님의 등단작「꽃 땀」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작인 2017년 「눈의 집」까지 대략 10여 년에 걸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요. 아무래도 소설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각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들과 사건들이 택배 노동자, 다문화 가정의 아이, 노점상, 알코올중독자, 타워크레인 조종사, 고려 시대의 유랑족인 양수척족의 여성 등 사회의 소수자, 노동자들과 그들의 신산한 삶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등단부터 지금까지 10여 년 동안 선생님의 시선은 변하지 않고 항상 사회의 불편한 곳을 향하고 있는데요. 이는「꽃 땀」의 한 대목처럼 언제나 “지는 팀을 응원하는 서포터의 삶”을 떠오르게 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을 선택하는 선생님의 기준과 철학이 궁금합니다.

하명희 : 무슨 단어가 좋을까요. ‘소외’보다는 ‘낙오’라고 할까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저는 자라면서 성공이나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욕망이 자연스럽게 거세된 같아요. 집도 아니고 방도 아니고 포장마차에서 자고 먹고 그랬으니까, 그게 뭔지, 그걸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죠. 리어카에 포장을 쳐서 포장마차가 되는 것처럼 간혹 그걸 가진다 해도 눈앞에서 금방 부서지고 빼앗기고 다시 리어카가 되는 걸 봐버렸거든요. 내가 자란 환경을 보면 저 또한 사회적 소외자, 낙오자일 수밖에 없지요. 그들은 일어서고 싶지만 일어설 수가 없어요. 방도 없고 돈도 없고 가족도 자꾸 없어졌다가 돌아오고, 또 폭력에 그만큼 노출되어 있고. 리어카에 도둑질한 철재를 숨기듯 살아가려면 법을 어길 수밖에 없거든요. 

왜 나는 이런 글만 쓰나, 생각해봤는데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저는 ‘낙오’를 선택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낙오자이기 때문에 낙오자에 대해 쓸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낙오한 삶이어도 어쨌든 살았단 말입니다. 여기 이렇게 있잖아요. 지금의 나를 증명할 단어들, 나를 형성했던 것들을 돌아보면 쓸쓸함, 슬픔 그런 것들인데, 나를 버티고 살게 만든 것은 성공을 향한 의지가 아니라 ‘슬픔을 슬픔이라고 말하고 싶은 의지’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다 보니까 슬픈 게 좋더라고요. 슬프지도 않으면 사람은 사람이 아닌 것 같고. 자꾸 그런 것만 보이는 거죠.

김대현 : 소설을 통해 소수자의 삶을 재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의 내용이나 형식이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소재로 소수자들을 재현할 때 피할 수 없는 소설의 윤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이야기 되듯이 나는 혹시 타인이 겪는 고통을 미학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닐까? 또는 나의 휴머니즘에서 시작된 재현이 그들을 연민의 대상으로 삼아 오히려 그들을 완전히 타자화시키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이 그것입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사회적 소수자들과 그들을 소설로 재현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으신지를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소설가

하명희 : 내가 그 안에 있으면 돼요. 그러면 타자화하지 않아도 그냥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상일 수밖에 없어요. 소설 속 인물들도 소외로 통칭되는 타자가 아니라 개별적인 사람이 되는 거고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잖아요. 제가 소설의 윤리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모르는 것에 대한 접근이 없는 것, 다시 말하면 모르면 책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사건의 현장을 찾아가야 하는데 미리 내 사고로 재단해버리는 것을 경계하기는 합니다. 말씀하신 가난이나 고통을 소비하고 그들을 미학적으로 소설화하지 않으려면 우선은 내가 여과기가 되고 싶기는 해요. 그들 속에 있지만 정말 그런가 끊임없이 묻는 작업을 하는 것. 왜 그런지. 왜 그렇게 되어버렸는지. 그럴 때 제 기준이랄까 윤리랄까 하는 것은 “돌을 돌답게 하는 것이 상상력이다”라는 바슐라르의 문장을 적용해보는 겁니다. 내가 그를, 그들을 그답게 그렸나, 퇴고 과정에서 항상 그런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김대현 : 선생님의 소설을 읽다가 놀랐던 점은 평상시 독자들이 접하기 어려운 실제 삶의 현장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불편한 온도」에서 한겨울 타워크레인에 쌓인 눈을 크레인을 조종해 처리하는 방법이라든가, 「그림자들의 강」에 나오는 포장마차에서 카바이드를 이용해 불을 피우는 장면들이 그렇습니다. 자전적 경험이나 심도 깊은 취재가 아니라면 관념적 사고만으로는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는 읽는 이들에게 소설 속 사건이 가지는 특수성을 지근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소설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세밀한 묘사를 가능하게 하는 선생님의 문학적 원체험이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취재 후기 등을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직접 만나기, 만나서 보기, 듣기,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 버리기. 소설은 세부를 통해 사람이든 사건을 전달하기 때문에 현실의 질료들이 다 들어오기 전까지는 소설이 씌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불편한 온도」는 크레인 조종사를 만나고도 해결되지 않는 이런 세부들을 알고 싶어서 크레인 자격증 문제집을 풀었습니다. 크레인을 설치하고 해체할 때 조종사가 헤드에 앉아 로봇처럼 자기 팔다리를 끼워넣고 빼내고 한다는 거예요. 통계로는 최근 6년 동안 300여 명이 넘게 이 설치와 해체 과정에서 사망했어요. 사고가 아니라 사망이요. 이해가 되세요? 저는 들어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책을 찾아봤는데 의외로 책이 없어서 크레인 자격증 문제집을 풀었죠. 그림도 그리고. 그러면서 취재하고도 1년 있다가 이야기가 만들어지더라고요. 그 1년 동안 버리는 작업을 해야 했던 것 같아요. 썼다가 버리는 것은 문장은 없지만 흔적은 남더라고요. 쓰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그걸 읽어줄 때 찌르르 하고 정말 좋았어요. 아, 소설에서 버리는 작업이 이래서 중요하구나. 저도 처음으로 쓰면서 실감했던 소설입니다.

「그림자들의 강」은 자전적인 이야기인데요. 포장마차에서 살다 보니까 카바이드 돌 같은 경우는 나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튀어나오더라고요. 돌이 물을 만났는데 불이 되네, 같은 것들. 노래에서처럼 카바이드가 나오는 포장마차는 80년대 노동자들이 쓴 소주에 시름을 달래던 곳이지만, 제게 포장마차는 생활의 공간이어서 냄새나는 돌에 불을 붙이는 저녁이면 하루가 시작되는, 그런 경험을 풀어내고 싶었고요. 또 그 돌이 막걸리에 들어가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는 것처럼 리어카에 포장을 씌우면 포장마차가 되고, 그런 포장마차들도 고향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함부로 부셔질 수 없다는 것, 그런 것들이 다 제 주변의 소재들이었던 것 같아요.

김대현 : 선생님의 소설에는 빈곤과 폭력으로 점철된 불안한 가정의 모습이 종종 나타납니다. 가정폭력으로 한국인 남편에게 살해당한 베트남 여성과 그 자녀의 이야기를 다룬 「까막편지를 읽는 법」이나, 아빠의 폭력을 피해 달아난 엄마의 이야기가 있는「그림자들의 강」, 부인에 대한 폭력을 통해 자신의 결핍된 남성성을 보충하려는「늙은 물의 사랑은」들이 그렇습니다. 빈곤이라는 구조적 문제의 피해자들 사이에서 다시 젠더역학의 피해자로서 이중의 피해자인 여성들의 모습이 서늘하게 드러나 있는데요. 제가 선생님의 소설에서 주목하는 지점은 이러한 젠더역학을 다루는 방식이, 젠더의 차이를 도식화하여 피해자성과 가해자성을 강화하여 젠더의 차이를 부각시키는 최근의 주류적인 여성서사들과 결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에 있습니다. 선생님의 소설에는 여성에 대한 가해자로서 남성이 사회 구조적으로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과정이 충실히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라 생각되는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문학이 젠더문제를 다루는 온당한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질문이 어렵지만 우선은 이해요. 기본적으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가해와 피해의 도식적 사건이 되어버리고, 이것의 해결은 고발과 법적인 처벌이 되어버립니다. 문학은 모든 것을 법적으로 해결하면 끝나버리는 고발과 처벌에서, 나와 너가 다르다는 구분과 차별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숨구멍이지 않을까요. 문학은 어느 시대나 주류를 다루는 방식에서 끊임없이 예외가 있음을, 그것이 인간사임을 드러내는 작업이 아니었을까요. 그 틈에 구멍을 내고 틈이 틈이 아니게 되었을 때, 그땐 미련 없이 또 다른 틈을 찾아나서는 것이 문학의 운명이 아닐까요. 그래서 고독하고 개별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성을 회복해오지 않았을까요. 바틀비처럼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백 년도 넘게 외치잖아요. 문학이 그런 일을 해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더 할 말이 없지만, 내가 몸에 익힌 문학은 분명히 그러했고, 지금 저는 그것을 내 방식대로 하나씩 풀어내는 중이라고 느껴요. 큰 줄기는 그렇습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 문학장에서 젠더를 다루는 차별과 배제와 고발과 처벌의 방식은 제 방식은 아닌 것 같아요.

김대현 평론가

김대현 : 그래서인지 몰라도 선생님의 소설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구사대로 활동하며 다른 노동자를 폭행했던 청년의 변화과정을 다룬 「목발」이나, 고려를 배경으로 유랑족 출신이지만 고관의 첩이 되어 동료 유랑민들을 자신의 노비로 삼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눈의 집」, 부인을 폭행하는 알코올중독 남편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담은 「늙은 물의 사랑은」등은 가해자의 처지에서 사건을 기술함으로써 그 동안 단순화되었던 가해자성에 대한 고착된 관념을 전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는 가해자의 행위에 대한 변명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접근방식으로 생각됩니다. 누군가의 피해자이면서 누군가에게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는 인간이라는 복합적인 존재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한 사람 안에 있는 가해와 피해의 양상을 통해 ‘그 사람’을 보여주고 싶은데 아직도 멀었습니다. 현대소설은 개별적 인간, 즉 ‘사람’을 다룹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아니라 그 사람에 더 집중하고 갈등하고 싶어요. 아시잖아요. 사람 하나를 이해하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것만큼 어렵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어요. 다만 글 쓰는 사람으로 저의 자세는 그것에 다가가보려고 애써보는 것,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보는 것, 결국에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가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김대현 : 앞서의 물음과 연결되는 질문일 것 같은데요 사회 시스템이 점점 복잡해짐에 따라 이전의 도식으로는 쉽게 해명될 수 없는 많은 사회적 관계들이 형성되었습니다. 예컨대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대해 착취를 당하는 약자인 가맹점주가 그보다 더 약자인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착취하거나, 그 노동자가 다른 감정노동자들에게 갑질을 하는 등 가해와 피해의 관계가 일방향이 아닌 상호 교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손을 잡는 대신 서로를 피해 각자의 공간에서 고립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약자들의 연대가 불가능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선생님의 작품들에서도 각 등장인물들이 사회적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성과 피해자성을 동시에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불편한 온도」에서 정혜언니의 가르침을 빌어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같이 하면 바꿀 수 있는 거”라는 연대의 힘을 신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연대의 가능성과 그 방식에 대해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불편한 온도」의 미주가 내게 특별한 인물이 된 것은 딱 한 발짝을 더 가본 것이에요. 정혜 언니의 죽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인물이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그것 자체로 발음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것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딱 한 발짝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체불된 임금을 받지 못하고 크레인에 올라온 아저씨를 허공에 두고 혼자 내려올 수 없어서 고민이 시작된 거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같이 내려가자, 내려가서 밥 먹자, 할 수 있는 힘은 뭔가 대단한 의지와 용기가 작동하지 않더라도 행동을 요구하니까요. 어떻게 할 거니? 같은 거요. 그 이후엔 미주의 세계가 굳이 ‘연대’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아도 그 전과 다른 방식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크레인이 춤을 추는 것처럼 스스로를 움직이는 힘인 ‘행동(行動)’이란 그 한 발짝 때문에 사고(思考)의 춤, 마음의 연대가 될 수 있는 거죠.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생겨버리니까.

김대현 : 선생님의 소설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에 대한 고민도 놓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배경에 대한 묘사들이 인상 깊었는데요. 특히「목발」에서 구사대에 속했던 청년이 열쇠를 잃어버리고 일종의 패닉 상태에서 열쇠집을 찾기 위해 동네의 풍경을 가게의 이름으로 묘사하는 모습이 특별했습니다. 마치 왕가위 영화처럼 서사의 프레임이 고정되지 않고 모호한 시공간 속에서 불안정하게 부유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또한 「저녁의 목소리」는 마치 시와 희곡이 결합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명사구로 끝나는 간결한 묘사와 산문임에도 불구하고 운문의 특성을 가지는 문장들, 예컨대 ‘저녁이 반짝인다’, ‘저녁이 굴러간다.’ ‘저녁이 들썩인다.’처럼 문장 하나하나가 은유 속에서 리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들이 나타나는 배경과 소설의 형식에 대해 선생님께서 고민하는 지점을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목발」의 공간은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요. 양말공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가 공터가 되었는데, 매번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더라고요.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가 씌어진달지 며칠 후에 가보면 그 낙서에 또 다른 낙서가 덧씌워져 있고. 길도 수시로 바뀌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면서 낯선 가게가 들어서고 간판이 바뀌듯 무언가 계속 바뀌고요. 그 속도랄지 변화에 절뚝거리면서 걸어야 하는 목발을 짚은 인물이 떠올랐어요. 그 속도의 가해자이면서 노동 환경 변화의 피해자로. 왕가위 영화의 부유하는 느낌이라고 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그 속도와 변화를 기록하고 싶었거든요. 열쇠를 잃어버려야 그 궤도에서 일탈해서 뒤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저녁의 목소리」는 ‘이야기가 없는 소설도 소설이 될까’를 고민할 때 썼어요. 유령이 나타나는 시간이 저한테는 저녁이거든요. 제가 보는 유령은 살면서 만나고 싶지만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저녁이면 그 관계나 상황들로 들어가고 싶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가까운 죽음이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실종이기도 한데요. 저녁만 되면 그런 것들이 떠올라요. 그러면 유령의 시간인 저녁을 써보자 싶었지요. 그러다 보니 유령을 따라서 이야기가 해체되더라고요. 더 재밌는 건 유령의 문체는 명사형의 시가 되더라고요. 서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니까 이미지를 보여주게 되고요. 누군가 살구가 굴러다니는 산문시 같다고 해주셨는데, 딱 그렇게 써보고 싶었어요.

김대현 : 선생님의 소설을 읽다보면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는 고유어들, 예컨대 ‘곤두기침’, ‘발탄강아지’, ‘애줄없이’ 같이 사전을 찾지 않으면 익숙하게 해석되지 않는 단어들이 풍성하게 나타납니다. 이러한 낯선 고유어의 사용은 문학을 통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폭을 넓히고 사유의 경계를 확장하는 장점이 있지만, 소설에 사용될 경우 읽는 이로 하여금 온전히 서사에 몰입하는 과정을 지연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설의 언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하명희 : 대학교 때 최인훈 선생님 수업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소설 창작 시간인데도 선생님은 우리에게 소설 강독을 시키셨어요. 그때 월북 작가들의 작품이 해금되어서 막 출판이 되었던 때인데 이태준 전집을 강독 텍스트로 정하고 단편들을 수업 시간에 한 편씩 읽어나가는 거였거든요. 선생님의 주문은 모르는 단어는 무조건 찾아와라. 그거 하나였어요. 그때는 강독도 단어 찾는 것도 별로 재미없었거든요. 왜 소설 창작 시간에 합평도 아니고 이런 걸 해야 하나.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게 남더라고요. 그때 제가 단어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후에 편집 일을 하면서 그 단어장이 더 채워졌고요. 지금은 한 권 분량의 저만 보는 소설 사전이 만들어졌습니다. 

문제는 그 단어들이 대부분 현재는 쓰지 않는 사어(死語)라는 점인데요. 동사들은 죽었어도 명사나 부사, 형용사들은 되살리고 싶은 단어들이 많아요. 굳이 문장으로 쓰지 않아도 단어 하나로 해결되는 것들. 요즘 유행어로 ‘쓰담쓰담’ 같은 단어가 어떤 상태와 행동을 다 담고 있는 것처럼 발밤발밤 내려앉다, 비거스렁이를 하다, 왝댁거리고 가난살이가 뚝뚝 떨어지다…. 제 세대는 이 단어들을 쓸 수 있는 인물들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소설에 노인이 나올 때는 단어장을 활용할 수 있어서 신나요. 최인훈 선생님은 소설 창작에 대해 이런 걸 알려주신 것 같아요. 소설이란 단어 하나도 신중하게 고르고 절약해서 써야 한다. 그런 문장이 모여서 소설이 된다. 소설에 대한 어떤 큰 명구보다 선생님의 교수법이 저한테는 훨씬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나무에게서 온 편지 표지
나무에게서 온 편지 표지

김대현 : 이번에는 『나무에게서 온 편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 소설은 선생님의 첫 번째 장편소설입니다. 전교조 창립 시기에 해직된 교사들과 이에 반발하여 학생운동에 투신하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 이른바 ‘고운’을 다룬 소설인데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저 또한 그 시기에 중,고등학교를 다녀서인지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만 그렇게 깊은 사연을 가진 고등학생 선배들의 이야기는 처음 접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 당시 고운에 참여하게 되었던 동기와 고운의 활동 내용을 들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명희 : 직접 봤으니까요. 저는 선생님들이 해직되고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본 세대입니다. 그럴 때 나에게 묻게 되지요. 이게 뭘까, 인간화 교육 하자는 게 뭐가 잘못됐지? 왜 선생님들이 쫓겨나야 하지? 그 시기에 그런 질문들을 해본 거지요. 그 다음은 소설에서처럼 친구들을 만나고 고민을 나누고 또 행동을 하게 되었던 거구요. 그런데 그 경험이 왜 이렇게 사회화되지 않았을까, 가라앉아 있을까, 각자의 경험으로 숨어 있을까… 소설을 쓰면서 그것이 가장 궁금했었는데요. 제가 찾은 답은 1991년 봄, 그러니까 ‘자살정국’이라고 불렸던 그 봄이 너무 아픈 사회적 경험이었구나 싶더라구요. 단 두 달간 13명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 그들에 대해 충분히 애도할 만한 공동의 시간이 없었다고 느꼈어요. 당시 전교조 해직 교사가 1,500여 명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각 학교별로 선생님을 돌려달라고 스스로를 조직했던 학생들은 그 열 배는 될 거예요. 그들은 학교에서 퇴학, 정학 등 징계를 감수했고요. 고운 세대라고 불리는 그들의 경험이 문학작품으로 나올 만도 한데 기다려도 안 나오길래 제가 쓴 거죠. 아마 세월호의 아이들이 자라면 그들이 직접 보고 겪은 2014년을 기록하게 될 겁니다. 너무 늦었지만 저도 그런 의미에서 1991년 봄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해야 했던 것 같아요.

김대현 : 묻고 싶은 것은 더 많은데 지면의 한계상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현 시점에서 가장 궁금한 것은 다음 작품일 텐데요. 독자들을 위해 혹시 앞으로 나올 작품에 대해 간단한 소개나 현재 구상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간단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하명희 : 몇 년 전부터 30매 내외의 짧은소설을 연재하면서 한 달에 한 편씩 소설을 썼거든요. 요즘에는 단편소설 한 편을 한 자리에서 읽는 것이 힘들다고 그러잖아요. 예전엔 엽편소설이라고 했고, 최근엔 초단편, 스마트소설이라고도 하던데, 저는 외려 기존의 단편소설이 너무 길이에 제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길이가 자유로운 단편소설집을 묶으려고요.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순간들, 사건들이라 읽다가 덮어도 되고 아무 쪽이나 펴서 읽을 수 있는 소설집이었으면 해요. 무겁기도 하고 찌질하고 웃기기도 하고 또 슬프기도 한 이야기가 한데 묶이면 좋겠다 싶어서요. 

또 하나는 「그림자들의 강」을 쓰면서 내 고향이 서울이구나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요. 하도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서 그동안 저는 고향이 어디라고 말할 수가 없었거든요. 고향 있는 사람이 그렇게 부럽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서울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워낙 서울이 유튜브 같은 곳이어서 팍팍 바뀌고 있기는 하지만 터를 잡고 사는 사람들의 기억은 남아 있으니까요. 소설 연작 형식으로 서울 사람들 이야기를 한 편씩 쓰려고 합니다.

김대현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자유롭게 말씀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긴 시간동안 답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되면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하명희 : 김대현 선생님의 『당신의 징표-이름의 존재론과 성(姓)의 정치학』을 읽었거든요. 그때 깜짝 놀랐어요. 글 쓰는 사람들도 다들 대학에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지원이랄까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때에 선생님은 인문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하셨더라고요. 그 책에서 ‘이름’이라는 징표를 문화사회학적으로, 또 인류학적인 접근으로 풀어내셨는데, 특히 여자들이 자신이 거처하는 집(방)이나 출신 지역의 이름으로 불린 예들을 읽는데 너무 즐거웠어요. 사임당이나 난설헌, 혜경궁 홍씨 등이 그들이 거처한 작은 집의 이름을 쓴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자기만의 방’으로 연결시키진 못했거든요.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버지니아 울프만 알고 있었던 거죠. 그런 발견이 자극이 되더라고요. 사고를 깨고 질문을 던지는 작업들. 그건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걸 선생님 책을 보면서도 느꼈습니다. 저도 꾸준히 그런 작업들을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선생님이 짚어주신 문제들이 결코 쉬운 질문들이 아닌데 〈문화 다〉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고민해보고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위 인터뷰는 웹진 "문화 다"에서 진행한 것으로, 웹진 문화 다와 뉴스페이퍼가 공동으로 게시하였습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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