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훈 평론가, 'SF만을 위한 비평 요구, 게토화되고 편협한 생각일 수 있어'
복도훈 평론가, 'SF만을 위한 비평 요구, 게토화되고 편협한 생각일 수 있어'
  • 김상훈 기자
  • 승인 2019.05.3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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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불화하는 언어들’ 한국문학평론가협회 2019 학술대회 개최

[뉴스페이퍼 = 김상훈 기자] 한국문학평론가협회(회장 오형엽 고려대)가 주최하고 교보문고와 대산문화재단이 후원한 2019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학술대회가 5월 25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132호에서 개최됐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불화, 비평의 존재 방식”으로, ‘불화’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비평의 현황과 가치를 살펴보았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1971년 설립된 평론가들의 단체로, 400여 명을 넘는 평론가와 교수가 가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1월 오형엽 고려대 국문과 교수가 제26대 회장으로 선출됐으며, 오형엽 교수는 학계와 문단의 소통, 문학 진영 간의 소통, 중진과 신진비평가의 소통을 통해 한국 문학계를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5월 25일 개최된 학술대회 또한 한국문학의 활성화를 위해 마련됐으며, 비평의 위상을 점검하고 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고자 했다.

오형엽 학회장(고려대 교수) [사진 = 김상훈 기자]
오형엽 학회장(고려대 교수) [사진 = 김상훈 기자]

이번 학술대회는 크게 3부로 나뉘어 진행됐으며 각 부에서는 평론과 불화하고 있는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 다루었다. 발표자로는 복도훈, 노태훈, 박혜진, 황현경, 강지희, 이은지 등 6명이, 토론자로는 강동호, 박상수, 심진경 등 3명이 참여했다.

​- 장르문학과 불화한 비평... ‘장르문학만을 위한 비평 요구는 위험’

​1부는 “문학 장르 · 매체의 불화”라는 주제로 진행됐으며 발표자로는 복도훈, 노태훈 평론가가 참여했다. 1부에서 장르를 다루게 된 까닭은 최근 장르문학계에서는 제도권 문학계의 비평적 시선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장르문학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너무 많기에 자생적 비평 담론을 갖추고자 하는 목적으로 비평팀 ‘텍스트릿’이 발족했으며, 1월 31일에는 장르로서의 한국문학 비평에 대해 살펴본 “요즘비평포럼” 제6차 포럼이 열리기도 했다. 요즘비평포럼에 참여한 SF 소설가들은 제도권 문학계 비평이 가진 시선으로 인해 SF가 평가절하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제6차 요즘비평포럼이 열린 창비서교빌딩 2층 대회의실 [사진 = 김상훈 기자]
제6차 요즘비평포럼이 열린 창비서교빌딩 2층 대회의실 [사진 = 김상훈 기자]

​발표자로 참여한 복도훈 평론가는 ‘SF에는 SF만의 비평이 필요하다’는 시선과 ‘SF나 리얼리즘 소설이나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 모두 잘못됐다고 밝혔다. 복도훈 평론가는 듀나의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와 어슐러 르귄의 “밤의 언어”를 언급하고 “두 책에는 작가이자 비평가로서 SF에 대한 사색, 장르문학으로서의 SF가 본격문학과 벌이는 신경전과 갈등, 판타지 등을 비롯한 다른 장르문학과 SF의 가족 유사성과 차이, 팬덤 문화의 생태계, 젠더와 젠더 재현의 문제 등이 꽤 깊이 다뤄지고 있다.”며 두 책을 통해 SF를 어떻게 읽을 수 있는가를 논의했다.

발표 중인 복도훈 평론가 [사진 - 김상훈 기자]
발표 중인 복도훈 평론가 [사진 - 김상훈 기자]

‘SF에는 SF만의 비평이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대해 복도훈 평론가는 팬덤 문화의 게토화를 제시했다. 복도훈 평론가는 “팬덤 문화는 SF의 오락성, 즐거움의 요소를 그들만의 게토화된 문화적 향유로 특권화하고 제한하며, 새롭게 그 문화에 들어오려는 팬과 독자 또는 저자에 대해서 경계심과 공격성을 내비친다.”며 듀나와 르귄의 말을 인용했다.

순수한 도피를 위해 놀이동산에 오듯 이 세계를 선택한 사람들은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끊고 변화를 거부하기 마련입니다. 이들 중 가장 보수적인 층이 모여 일종의 종교적 근본주의자가 되어 그 세계에 변화를 가져오려는 새 창작자와 새로 유입된 팬들에 저항하는 것이죠. (중략) 팬덤의 순수성을 더 경계해야 합니다.

게토는 편안하고 근심 없는 거처지만, 동시에 그곳에 살다보면 몸이 상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게토의 본질은 그곳에 살도록 강제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넓은 공동체에 살 수 있는데도 굳이 게토를 선택하는 것은 겁쟁이의 행동이다.

물론 게토 상태를 비판하기는 어려운데 “그들의 특정 흥미 분야에 대한 지식인 또는 주류 문필가 사회의 태도 때문에 이런 자세를 굳히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귄은 이에 대해 “차별과 경멸이 멈춘 후에도 회피와 방어에 매달리면, 한때의 반항아는 결국 불구”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복도훈 평론가는 “한국 SF에는 SF만을 위한 별도의 독법이 필요하며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SF비평이 없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어쩌면 르귄이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였으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SF만을 위한 독법이 따로 있는 것처럼 간주하거나 드물게 시도되었던 SF 비평을 없었던 것으로 지워버리는 언표 또한 문단문학을 장르문학에 적대적인 단일한 집합체로 간주하고 게토화되고 편협한 생각의 표출”이라고 지적했다.

​SF가 리얼리즘 소설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 또한 문제가 있다. 이를 논의하기에 앞서 복도훈 평론가는 르귄이 정의하고 있는 SF에 대해 먼저 논의했다. 르귄은 판타지를 “비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초논리적”인 장르로 설명하고 있다. 판타지의 근본 계율은 “규칙을 직접 세울 수는 있지만 일단 세운 다음에는 자신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마법에 걸린 양탄자’에 올라가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규칙을 세웠다면 이는 초논리적이지만, 이렇게 규칙을 세운 후 마법이 걸리지 않은 아무 도구나 사용해 하늘을 난다면 이는 비논리적이다. 

​SF에 대해서 르귄은 “SF는 이 계율을 한 단계 정제한다. 규칙을 직접 세울 수 있지만 한도가 있다.”고 설명한다. 주인공이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마법에 걸린 양탄자가 아니라, 중력이 훨씬 낮은 행성이나 그런 조건을 갖춘 실험실로 주인공을 데려가야만 한다. 복도훈 교수는 “르귄은 하나의 개념을 격렬하고 일관성 있게 따르며 적용하는 과정에 SF만의 독특한 심미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리얼리즘 소설과 SF의 차이는 ‘낯설게하기’에서 비롯된다. 복도훈 평론가는 “SF는 리얼리즘 소설만큼이나 엄격한 방식으로 목성에서 양팔로 하늘을 나는 사람을 등장시킬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며 이때 “지구인 대부분에게 자명한 중력 법칙을 바깥에서 탈중심화 해 중력을 생경하게 보여주는 것”이 SF에서의 낯설게하기라고 설명했다. 복도훈 교수는 다르코 수빈의 ‘인지적 낯설게하기’ 장르로서의 SF의 위치를 도표를 통해 제시했으며, ‘인지적 낯설게하기’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어떻게 만드는가와 관련이 있다고 전했다.

  자연주의 역사주의
인지적/다차원적 리얼리즘 문학 SF (&목가)
비인지적/일차원적

리얼리즘의 하위

(준) 문학

형이상학적 : 신화, 민담, 판타지 

노태훈 평론가는 ‘순문학이나 장르문학을 구분하는 태도는 이상하며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이 있을 뿐’이라는 태도가 오히려 ‘시혜적’인 태도이자 순문학의 문학적 편견을 감추는 알리바이라고 지적했다. 노태훈 평론가는 ‘순문학’이 제도이자 굉장히 이상한 ‘장르’이며, “순문학이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인 개념이라고 여기는 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순문학을 장르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대체로 순문학은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고, 문장의 깊이를 중시하면서, 묘사에 공을 들이며, 이야기 자체의 흥미보다는 삶이나 인간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사유에 가까워지려는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노태훈 평론가는 “물론 순문학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고, 장르문학에도 그러한 성격이 없다고 할 수 없”으나, 이러한 장르적 구분은 궁극적으로 “순문학은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인 개념이라고 여기는 것은 착각일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노태훈 평론가는 “장르문학이 그 장르의 문법을 얼마나 잘 구사하는지, 또 얼마나 새롭게 상상해 내는지에 따라 작품의 가치를 평가받는 측면”이 있다면 “순문학은 그 작품이 얼마나 ‘깊이’를 확보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순문학은 ‘문학성’이 그 평가 기준”이지만 이때 문학성이나 깊이라는 말이 굉장히 모호하다고 말했다. 때문에 “문학성은 각자가 만들어가는 개념이며 합의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결국 ‘취향’”에 속하며, “여러 문학의 장르들 중에 나의 취향이 순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때 순문학은 명확히 하나의 장르문학”인 것이다.

​한편 노태훈 평론가는 “순문학 장에서 ‘문학주의’의 입장으로 타 장르에 완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위기는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더 문제적인 것은 약간의 진입을 허용하면서 균형을 갖췄다고 생각하는 시혜적인 태도”라고 지적했다. 이를 가리켜 “순문학의 문학적 편견을 감추기 위한 알리바이이고, 아주 낭만적이고 순진하게, 대결 구도를 설정하는 일이 무용하다는 원론적인 주장을 하면서 개별 작품의 계보와 특성을 무시해버리는 무책임한 비평적 무능”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 노태훈 평론가는 순문학이라는 장르를 인정했을 때 비로소 위계와 경계, 배제의 논리가 허물어질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 ‘더 많은 가치 평가 요구되는 새로운 비평의 시대’

​2부의 주제는 “독자 · 대중 · 세대의 불화”이다. 이러한 주제의 배경에는 비평무용론이나 비평에 대한 반성의 반동이 기인하고 있다. 2015년 신경숙 표절 사태와 문학권력 논쟁 이후 비평은 한국문학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후 주요 문예지 출판사의 편집위원이 대거 사퇴하거나 새로운 문예지가 등장하는 등 변화가 이뤄졌으나, 이 과정에서 비평의 영향이나 입지가 대거 축소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비평가만이 비평작업을 수행하던 과거에서 벗어나 다른 위치와 영역에서의 비평작업이 모색되고 있다.

박혜진 평론가 [사진 = 김상훈 기자]
박혜진 평론가 [사진 = 김상훈 기자]

“82년생 김지영”의 편집자로도 알려진 박혜진 평론가는 “82년생 김지영”의 출간과 이후 일어났던 변화를 살펴보며 비평의 변화를 점검했다. 박혜진 평론가는 “82년생 김지영”의 출간에는 어떠한 비평적 관점이 개입되지 않았으며, 비평의 언어는 “82년생 김지영”의 100만부 기념 에디션을 통해 출간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때 “비평가들은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독자들을 경유해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며 이는 “비평가→작품→독자로 이어지던 구도가 작품→독자→비평가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례는 비평의 위기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박혜진 평론가는 “독자에 앞서 문학작품을 선별하고 그 가치를 호명한 뒤 출판을 통해 가치를 실현시키는, 1970년대 이후 유효했던 이른바 ‘계간지 시스템의 비평’의 위기일 뿐”이며 “시스템 밖에도 문학은 있다.”고 강조했다.

​박혜진 평론가는 2015년부터 시작된 문학계의 ‘윤리적 카오스’로 인해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텍스트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82년생 김지영’의 독자를 통해 문학과 독자의 관계, 문학에 요청되는 새로운 미학 등의 주제를 담론의 장으로 이끌어오며 비평은 대중과 불화하는 대신 대중을 읽으며 새로운 비평의 길을 모색”했다고 보았다. 이때 새로운 비평의 시대는 비평 없는 세계가 아니라 비평에 “더 많은 가치 평가가 요구”되는 시대이며, “비평가들은 이제 무작위로 발생하는, 사건사고처럼 터져나오는 독자들의 읽기를 관찰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 김상훈 기자]
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 김상훈 기자]

황현경 평론가는 비평에 가해졌던 지적에 항변하면서 대안에 대해서 고민한 내용을 발표했다. 황현경 평론가는 “82년생 김지영”과 관련해서 비평이 선도적으로 담론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김지영 현상’은 비평이 ‘할 수 없다’가 아니라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셈”이라고 보았다. 또한 ‘문장웹진’ 익명대담 3화와 6화에서 평론가들에 대해 이야기한 대목을 인용하며 비평가들이 자기 개인의 ‘감’을 통해 작품을 선별해왔음을 인정하고 작가와 편집자의 개입을 통한 ‘선별’의 대안 가능성을 모색했다.

​황현경 평론가는 “비평이 ‘담론’과 동의어라면 담론의 생산뿐 아니라 유통과 활용을 더 적극적으로 고민하거나, 혹은 고민하고 새롭게 시도하는 중이라면 액션이라도 취해야만 신뢰와 역할과 자리를 조금이나마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며 “작가와 독자 사이의 자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전했다.

​- ‘페미니즘, 이분법과 치환 경계하고 아토포스(atopos)로 나아가야’

​3부의 주제는 ‘페미니즘 · 퀴어의 불화’지만 페미니즘이나 퀴어가 비평과 사전적 의미로 ‘불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페미니즘은 한국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되었고, 젠더와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요구되며 퀴어 또한 한국문학의 주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페미니즘과 퀴어는 한국문학의 두 축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지희 평론가는 “문학에서의 ‘나’와 퀴어 지리학”이라는 발표를 통해 김세희의 “항구의 사랑”과 한정현의 “줄리아나 도쿄”를 살펴보고 ‘나’의 자리를 확인했다. 강지희 평론가는 “한국소설 속에서는 ‘여성 서사’와 ‘퀴어 서사’가 활발하게 창작되며, ‘독자’의 자리가 새롭게 마련되고 있다.”며 특히 많은 서사가 1인칭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이와 관련하여 인아영 평론가는 ‘TMI를 위한 변론’에서 “아무리 ‘모순’을 ‘보충’한다 한들 어떤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도달할 수 없다는, 혹은 그러한 진실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철저한 자각”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보았다. 강지희 평론가는 “이 많은 ‘나’들의 이야기가 결국에는 사회에 정합적으로 들어맞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당연시되어온 사회적 규범들에 도전하고자 하는 것”이며 지금의 소설에서 드러나는 1인칭은 “자신 외에도 많은 규범 바깥의 ‘나’들이 있음을 상정하고 있는 ‘함께-쓰기’”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 김상훈 기자]
학술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 = 김상훈 기자]

강지희 평론가에 이어 발표를 진행한 이은지 평론가는 페미니즘 비평이 활발한 시점에서 페미니즘 비평이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분법과 서사적, 신화적 치환을 경계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은지 평론가는 “페미니즘적 비평이 공통적으로 견지하는 ‘태도’는 페미니즘에 대한 특정한 비판적 견해가 존재함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은 관철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서사”인데 이 당위의 서사는 “거대 서사 이후의 시대와 더불어 호흡하며 사유 되어온 페미니즘이 내용적으로는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페미니즘이라는 이론 자체를 작동시키는 보편 형식으로 잔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은지 평론가는 이와 같은 ‘~주의’는 “생성 및 전개 과정에서 그 자체 완결된 서사의 꼴을 갖추기를 욕망하는 개별적인 유기물처럼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며 이때 발생하는 치명적 오류는 “이론이 대상으로 삼는 현실을 서사화하는 것, 즉 현실을 서사에 부합하는 개연적인 것으로 치환해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표적 예시로는 맑스의 해방 서사가 있다. 지배를 받는 이들이야말로 지배체계를 끝장낼 수 있으리라는 주장을 뒤집으면 “지배체계를 끝장내려면 지배를 받아야만 한다는, 즉 지배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오류에 봉착”하고 만다. 이에 대해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 강의”에서 지배에 대한 극복을 “일종의 자연법칙으로서 전제”하여 “그것이 와야만 하고 그리고 그것이 심지어 곧바로 그렇게 올 수밖에 없다고 상정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시작한 실천들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상황 전체가 하릴없이 무의미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이은지 평론가는 “페미니즘이 사회의 진보와 해방을 필연적으로 추동하리라는 믿음은, 그러한 믿음의 대상으로서의 페미니즘을 추동한 가부장제의 억압 또는 필연적인 것으로 고정시키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믿음이란 “모성애가 자연발생적이라는 다윈주의적 신화만큼이나 미신에 가깝”고 “우리는 다가오는 것들을 액면 그대로 환대하되 신화화하거나 서사화하고픈 욕망으로부터 항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은지 평론가는 이밖에도 페미니즘 백래시, 현실을 유사현실로 대체하는 경향 등을 논의했으며, 테드 벤턴과 이언크레이브의 “사회과학의 철학”을 인용했다. 이들은 페미니즘이란 “오로지 그것이 여성 또는 여성주의자의 시각으로부터 도달되기 때문에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통적 인식론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개혁을 위한 통찰과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은지 평론가는 “이는 페미니즘을 그 자체 통약불가능한 것으로 고정하지 않아야 하는 근거, 사회적 규범을 구성하는 여러 인식들과 끊임없이 부딪쳐 해체하고 재구축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고 밝혔으며 “페미니즘이 더는 페미니즘이지 않게 되는 어딘가(atopos)야말로 페미니즘이 도달해야 할 곳”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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