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늘샘의 문예담론 ‘목소리’ - 8 이른바 ‘서사성’이란 무엇인가
[연재] 늘샘의 문예담론 ‘목소리’ - 8 이른바 ‘서사성’이란 무엇인가
  • 김상천 문예비평가
  • 승인 2019.06.1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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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늘샘의 문예담론 ‘목소리’ - 8 이른바 ‘서사성’이란 무엇인가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연재] 늘샘의 문예담론 ‘목소리’ - 8 이른바 ‘서사성’이란 무엇인가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서사, 의미의 불을 일으키는 21세기 연금술! 

우연히 '서사가 있는 음악회(이희경, 경향신문 '문화와 삶'. 2018. 5.30.)라는 제목을 단 글을 보고 이끌린 적이 있다. 이야기도 있는데 왜 서사일까. '이야기'와 '서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야기story’가 평면적이라먼, ‘서사narrative’는 추상적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단순히 이것 때문일까. 대체 서사가 뭐길래 이렇게 끌리는 걸까. 머 서사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그 어떤 중요한 것something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선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즉 굳이 대중적인 기사제목으로 '서사가 있는' 하고 제목을 뽑은 것은 그것이 꼭 음악회가 아니더라도 서사가 있어야 한다는, 그래야만 대중들의 구미를 당기게 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시대의 모럴이자 가치로, 서사는 인자 이 시대의 문법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라고... 

한때 언어학이, 신화학이, 기호학이, 해석학이 일시적으로 큰 바람을 일으켰다가 미풍으로 그치고 초목이 바람에 쓰러지듯 인자 서사학이 풍미하고 있다. 서사는 이 시대의 문법이 되었다. 벼룩처럼 들끓는 생활서사로서의 대중들의 소소한 수다, 잡담, 쑥덕공론 등이 수많은 댓글의 형태로, 즉 실뱀장어 같이 작지만 위력적인 서사소敍事素 폭탄의 미시서사 뇌관들이 SNS공간을 타고 흐르먼서 긍정이든 부정이든 일상을 주도하고 있는 현실을 어티케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서 이야기니, 스토리텔링이니, 서사라는 말이 대두하고 '근대문학의 종언'이니, '소설은 죽었다'느니 하는 기표가 문학 동네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대변하고 있기라도 하듯, 한때 서자 취급을 받았던, 그러나 근대문학의 정전으로 왕자의 권위를 누려왔던 소설이 언제인가부터 ‘소설 쓰냐’ 하는 말이 그렇듯 근대소설은 이제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소설의 퇴조는 근대소설이 현실을 떠나 한가하게 살아가는 부르주아를 독자로 삼아 고독과 연애에 과도하게 몰입해 왔기 때문이다. 즉 근대소설은 부르주아 계층의 정신감정을 반영한 과잉결정의 산물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감정에 기초해 살아가고 있는 대중독자들에게, 더구나 디지털화 된 바쁜 일상에서 순간순간 빠른 결정을 내려야 하고 어덥터블하게 유연한 대응을 하먼서 살아가야 하는 그들에게 근대의 장편들은 현실적 근거를 잃을 수밖에 없다. 이는 또한 매체 헤게모니가 지식인 중심에서 대중 중심으로 자리바꿈했다는 사실을 뜻하기도 한다. 

자, 그렇다먼 이 시대의 문법이 된 서사란 무엇인가. 즉 서사를 서사이게 하는 기본 요소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서사성narrativity'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자, 말하기 좋게 비유를 통해 설명해 보자. 그림이 그야말로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우선은 오브제라고 말하는 기본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다 화가의 화심이 녹아들어가 구워져야 비로소 작품이 될 것이다. 이걸 공자 형님은 '회사후소繪事後素'라 했다. 바탕이 있고 나서야 그림도 가능하다basic first, painting afterwards는 거다. 자, 그렇다먼 이건 참으로 재미있는 야그가 아닌가. 이건 머 그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무늬의 세계이고, 문화의 세계이고, 인문의 세계이고, 텍스트의 세계 아닌가. 아니 머 ‘서사敍事’라는 게 '사실事'을 '서술한다敍'는 것이니 서사는 결국 이야기를 구워 내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주의해서 잘 보먼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어떤 것이 서사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밀가루가 빵으로 구워지듯 사실의 세계에서 가치의, 의미의 세계로의 '변환transition'이 일어나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게 양의 전환보다는 질의 전환에 더 가깝고, 더 정확하게는 베르그송(<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식으로 말해서 '질적 강도qualitative intensite'라고 볼 수 있는 요소를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정금 같은 질적 강도 여부가 서사의 서사성 여부를 결정짓는 본질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왜냐하먼 질적 강도라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서는 서사적 재미를 지녔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먼 의미 있는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서사의 사례를 보자.  

정사 <삼국지>를 보니, 돌추처럼 무거운 관우가 어느날 공명의 글을 받고 어린아이처럼 뛸듯이 기뻐하는 일화가 나와 있다. 대체 공명이 어떤 글을 써서 주었길래 그렇게 무거운 장수를 기쁘게 했는가. 공명은 관우가 마량이나 장비보다 뛰어난 장수라며 그를 '미염공美髥公'이라 칭했다. 여기, 미염공은 긴 수염으로 유명한 관우에 대한 예우로 그의 긴 수염이 천하지 않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돌추처럼 무거운 관우가 어린아이처럼 뛸듯이 기뻐하지 않았것는가. 서사는 삶을 구워내는 아름다운 인생의 미학이다. 

하나 더 보자. 

서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에 담긴 하나의 모럴이고, 이 모럴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하나의 욕망이자 꿈이고, 새로운 역사로서의 해석행위 아닌가. 삶은 해석행위로서의 이런 서사적 전망perspective을 지녔을 때 금줄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병신년(丙申年:1596년, 선조29) 유월 그믐. 강물이 불었다.”

자, 여기! 김홍정의 대서사 <금강>(솔출판사)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강물이 불었다'고...<금강>은 이 한 문장으로 금강이다. 바로 여기에 '금강'으로 상징되고 있는 백제 유역문학 대서사의 거보가 거인처럼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금강이 '불었다'고...죽은 백제의 혼과 역사와 모럴이 다시 재기하고 있다고...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한 서사적 암시implication로 재해석되먼서 금강의 역사가 부활하고 있지 않은가. 

바야흐로 대중이 주인공인 대중서사시대다...나는 지금 어떤 인생 서사전략을 가지고 있는가.중세의 마법사가 구리, 납, 주석, 철 따위의 여러 가지 비금속을 섞어 금, 은 따위의 귀금속으로 변화시켜 내듯이, 21세기 연금술인 서사는 지금 너와 내가 씨줄과 날줄로 만나 새로운 가능세계virtuality의 연금술사가,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난 그렇게 본다.

김상천 문예비평가          “삼국지 - 조조를 위한 변명” 저자

 

김상천 문예비평가          
“삼국지 - 조조를 위한 변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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