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복귀사태 칼럼] 하야했던 한국문학의 여왕 - 최강민(문학평론가)
[신경숙 복귀사태 칼럼] 하야했던 한국문학의 여왕 - 최강민(문학평론가)
  • 최강민 평론가
  • 승인 2019.06.15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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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복귀 사태] 하야했던 한국문학의 여왕-최강민(문학평론가)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신경숙 복귀 사태] 하야했던 한국문학의 여왕-최강민(문학평론가)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2015년 한국 문학계의 화두였던 표절 사건의 당사자인 신경숙 소설가가 칩거 4년 만에 활동을 재개한다. 창비는 계간 문예지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에 신경숙 소설가의 중편 소설이 수록된다고 밝혔다. 본 칼럼은 이러한 신경숙의 복귀에 따른 칼럼이다. 

'신경숙 표절 사태'란? 2015년 6월 이응준 소설가가 허핑턴포스트에 신경숙 소설가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며 시작됐다. 신경숙 소설가와 창비는 표절을 부인했으나 이는 논란을 키우는 불씨를 제공한다. 신경숙 소설가의 표절은 곧 대형 출판사가 특정 작가를 '스타화'하는 과정에서 문제점이나 비판을 모두 무용하게 만든다는 '문단권력 비판'으로 이어졌다.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폐쇄적 공동체, 수직적 구조, 특정 작가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구조 등이 크게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한국문학장에 대안 작업이나 매체가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응준이 쏘아올린 표절의 진실과 여왕의 추락

소설가 이응준은 2015년 6월 16일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란 글을 통해 소설가 신경숙을 향해 진실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응준은 1995년 신경숙이 창작하여 발표한 단편 「전설」이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해당 글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창작과비평 출판사는 해당 장면에서 일부 유사성이 있지만 이를 근거로 표절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명백한 표절로 보임에도 창비는 자신의 문학권력과 전문가의 권위를 동원해 표절의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던 것이다. 신경숙을 옹호한 창비의 첫 번째 입장문은 표절 논란을 더욱 부채질하며 창비와 신경숙 모두를 위기에 몰아넣는 자충수가 되었다. 이후 ‘신경숙 표절 논란’은 한국 문단을 넘어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첨예한 논쟁을 낳았다. 

소설가 신경숙은 표절 논란이 발생하자 《경향신문》과 인터뷰(2015.06.23.)를 하면서 「우국」을 읽은 적도 없다고 표절을 부인하면서도, 자신의 기억마저도 자신할 수 없다는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이 인터뷰 이후 신경숙은 침묵했고 칩거했다. 신경숙의 목소리를 대신한 것은 변호사 역할을 자임한 문학평론가 백낙청과 ‘창작과 비평’(창비)이었다. 신경숙의 표절 사건이 발생했을 때, 창비는 ‘신경숙 작품의 표절 부인→ 신경숙과 창비에 대한 대중과 문인들의 비판 속에 위기에 직면→ 백영서 편집주간의 문자적 유사성 인정과 신경숙의 의도적 표절 부인→ 악의적인 의도적 표절이 아니라는 백낙청 편집인의 입장 표명을 통한 지원사격’이라는 수순을 밞았다. 백낙청과 창비는 신경숙의 글은 표절이되 악의적인 표절이 아니라는 입장으로 정리된다. 그러면서 백낙청과 창비는 신경숙의 표절을 의도적인 표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착한 작가를 나쁜 작가로 내몰아 매장하려고 한다며 비판했다. 주객전도의 상황 속에 백낙청과 창비는 연약한 신경숙 작가를 보호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었고, 신경숙과 창비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졸지에 신경숙을 매장하고 창비의 문학권력을 헐뜯는 악당이 되었다.

신경숙은 과연 의도적인 표절을 했을까? 아니면 등단 전에 베껴쓰기인 필사를 자주 하던 신경숙이 무의식중에 표절을 하게 된 것일까? 신경숙을 옹호하는 측과 신랄하게 비판하는 양자의 주장은 팽팽하다. 문제는 양자가 모두 신경숙이 과연 의도적인 또는 비의도적인 표절을 했는지 객관적 근거를 확실하게 제시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신경숙 작가가 본인이 고백하지 않는 이상 ‘의도적/비의도적 표절의 진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백낙청과 창비가 의도적인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작가에 대한 믿음과 품성에 대한 개인적 평가 이외에는 내세울 객관적 근거가 없다. 만약에 신경숙의 표절이 의도적 표절로 결론이 나면 신경숙을 스카웃한 백낙청은 그 책임을 오롯이 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출판자본의 타격만이 아니라 백낙청과 《창작과 비평》의 문학적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백낙청과 창비는 신경숙의 표절이 의도적 표절이 아니라고 한 목소리로 주장했던 것이다. 이 모습은 백낙청과 창비를 신뢰했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의도적 표절을 주장하는 이응준, 정문순, 이명원 등은 신경숙의 글들이 소설가 루이제 린저, 재미 유학생 안승준, 마루야마 겐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을 표절했다는 그동안의 의혹이 지속적으로 있었다는 맥락 속에 의도적, 상습적 표절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 신경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표절 논란이 표절로 확실하게 인정되지 못한 경미한 수준이었기에 신경숙의 의도적, 상습적 표절을 주장하는 객관적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여기에서 문득 비리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재벌 회장이 최고의 변호사를 동원해 집행유예나 무죄를 선고 받는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양자의 팽팽한 주장을 함께 청취하면서 작가에 대한 개인적 품성 평가와 믿음으로 신경숙의 비의도적인 표절을 주장하는 백낙청과 창비보다 그동안의 표절 의혹을 언급하며 의도적 표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논리적 신빙성은 더 있어 보인다.

신경숙은 2012년에 수상한 ‘2011 맨 아시아 문학상’과 장편 엄마를 부탁해가 국내에서 200만부 이상 팔리고,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한국문학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표절 사건이 발생하면서 불과 3년 만에 파국을 맞이했다. 신경숙은 2015년에 표절사건이 발생하면서 여왕의 자리에서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 신경숙은 표절 논란 이후 한국을 떠나 있기도 했고, 오랫동안 작품을 발표하지도 않았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여왕은 2016년에 아시아 최초로 영국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다. 문학 독자들의 관심이 한강에게 집중되면서 신경숙은 점차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방심과 실수가 낳은 표절(?)

2019년 5월말 소설가 신경숙이 신작소설을 통해 귀환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신경숙은  문학계에 복귀하면서 「작품을 발표하며」라는 입장문을 통해 동료 문인과 독자에게 일종에 반성문을 제출했다. 신경숙은 이 글에서 자신의 표절이 방심과 중대한 실수가 복합해서 발생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신경숙은 의도적으로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표절한 것이 결코 아니라 방심과 실수로 표절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표절은 표절이되 의도적 표절은 아니라는 창비의 입장을 신경숙의 문체로 변용하여 발표한 것이다. 의도적 표절 인정은 작가에게 치명적인 비수다. 아니다. 일이 너무 커졌다. 개인이 의도적 표절로 인정하고 끝나기에는 판이 너무 커졌다. 의도적 표절의 인정은 곧 백낙청과 창비가 구축한 ‘창비 제국’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경숙과 창비는 이제 한 몸으로 묶인 공동운명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신경숙의 복귀작을 발표하는 지면은 계간 《문학동네》와 《문학과 사회》도 아닌 계간 《창작과 비평》이 되었다.

신경숙의 복귀와 관련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표절 작가로서 4년간의 자숙 기간 만에 복귀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한국문단에서 표절작가는 대개 영구 퇴출을 당하거나 상당한 자숙 기간을 거쳐야 복귀하는 것이 불문율이라고 할 수 있다. 만 4년 만에 복귀한 신경숙의 자숙 기간은 반성의 시간으로서 과연 충분할까? 상당한 자숙 기간이 과연 몇 년인지 정해진 것은 없다. 그렇다고 해도 4년 만에 복귀한 것은 좀 빠른 감이 있다. 5년, 10년 단위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한다면 만 5년 정도의 자숙 기간은 최소한 필요하지 않았을까? 글을 쓴다는 것이 작품을 문예지에 게재하고, 출판을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혼자서 작품을 꾸준히 쓰고, 신경숙에 대해 용서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시점에 작품을 발표해도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정도의 자숙 기간은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자숙 기간이 몇 년인지에 관한 논란은 이미 신경숙이 복귀한 시점에서 늦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숙 기간 동안에 과연 신경숙이 충분한 반성을 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신경숙은 복귀하면서 자신의 표절을 방심과 중대한 실수가 낳은 것이고, 표절과 관련한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고 불찰이라고 말한다. 결론 문장을 읽어보면 상당 수준의 반성을 한 것으로 언뜻 여겨진다. 그렇다면 과연 신경숙은 충분한 반성을 한 것일까? 백낙청과 창비처럼 비의도적인 우연의 산물에 의한 표절로 보는 경우 4년 정도의 자숙 기간이라면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경숙의 표절을 의도적 표절로 보는 입장에서 보면 신경숙의 사과문은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왜곡과 은폐의 산물이다. 악의적인 의도로 교묘한 표절을 했다고 보는 사람들은 신경숙의 사과문을 제대로 된 사과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양자의 주장은 합일점을 찾지 못한 채 적대적 평행선을 달린다.

젊은 날 한순간의 방심으로 제 글쓰기에 중대한 실수가 발생했고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채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저의 작가로서의 알량한 자부심이 그걸 인정하는 것을 더디게 만들었습니다. 4년 동안 줄곧 혼잣말을 해왔는데 '걱정을 끼쳐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였습니다. 저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해온 분들께도 마찬가지 마음입니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쓰게 하는 대상이 되지 못하고 비판의 글을 쓰게 하는 대상으로 혼란과 고통을 드렸습니다. 모두 저의 잘못이고 불찰입니다.  (2019.5.)

신경숙은 인터뷰에서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이 천직이라 표절 사건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절필을 선언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발표하지 못하더라도 글을 써서 항아리에라도 넣어 두겠다는 심정을 밝혔다. 이랬던 신경숙은 계간 《창작과 비평》 2019년 여름호에 소설을 게재했다. 아무리 봐도 항아리에 많이 묵혀둔 것 같지는 않다. 신경숙의 글 때문에 문인과 독자들은 큰 상처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신경숙은 자신이 글밖에 쓸 줄 모른다는 이유로 셀프 사면을 하고, 글로서 자신의 과오를 씻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신경숙의 빠른 복귀는 작가로서 잊혀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문학적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문학적 욕망, 하루빨리 복귀해야 자신의 자리를 다시 차지할 수 있다는 조바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그렇다면 신경숙의 복귀작은 어떤 작품일까?

복귀작, 성장을 멈춘 난쟁이 신경숙

복귀작인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한국에서 살다가 독일로 이주하여 사는 시인과 작가의 우정을 현재와 추억을 교차시키며 그린 중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작가 신경숙과 시인 허수경의 실제 이야기에 약간의 허구를 덧붙인 사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어보면 시인 허수경이 말년에 어떤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작가는 암 투병 중인 시인을 만나려고 하지만 오지 말라는 시인의 말에 가지 못하고 전화로만 안부를 전한다. 계속 시인을 만나지 못하고 전화로 통화만 했던 작가는 결단을 내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해 시인을 만나러 가겠다고 전화한다. 하지만 시인은 끝내 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내일 다시 연락할게.”라는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2018년 10월 3일에 위암으로 사망한 시인 허수경의 부음과 겹쳐지면서 잔잔한 슬픔을 전달한다.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는 기존의 신경숙이 보여준 소설 문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신경숙 소설에서 작중 주인공은 대개 어눌하면서 낯가림을 하는 순박한 인물이다. 영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 세계에 비추어볼 때 그녀의 작중인물은 비현실적인 순정파의 주인공들이다. 이 순정파의 착한 주인공들은 타락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주면서 일정 부분 반성하도록 만들었다. 복귀작에서 여린 성격의 주인공은 위암에 걸린 시인과 소통하면서 내면의 아픔을 드러낸다. 착한 여주인공의 안타까움과 머뭇거림, 위암 말기에 죽음을 앞둔 친구의 두려움, 신 앞에서 유한한 인생일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허망함이 소녀 취향의 감성으로 전달된다. 

허수경을 추모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미는 있겠지만 성장하지 못한 소녀 취향의 여린 감성과 폭 좁은 시야는 답답한 느낌을 준다. 장편 외딴 방에 등장했던 10대의 소녀는 세월이 20년이 넘게 흘렀어도 여전히 머뭇거리고, 부끄러움을 타고, 타인에게 말을 쉽게 건네지 못한다. 어쩌면 이렇게 변하지 않는지? 어쩌면 이렇게 고착되었는지? 신경숙의 소설은 제목과 작중인물의 상황만 조금 달라질 뿐 거의 비슷한 작중인물이 등장해서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머뭇거리는 여성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끝난다. 필연적으로 쉼표와 말줄임표가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다. 외딴 방에서 10대의 여주인공은 희재 언니의 시신을 발견하고 그 방에 들어가지 못한 채 멀리 떨어져 있다. 50대의 작가로 성장한 신경숙은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에서 위암 말기인 친구와 전화를 할 뿐 상대방의 형편을 고려한다는 핑계로 만남을 연기한다. 그러면서 위암 말기에 처한 시인의 처참한 현실 장면과 직접 만나지 않고 피할 수 있게 된다. 

신경숙의 복귀작은 작가의 문학적 전성기가 종료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소녀 취향의 작중인물을 등장시켜 문학성과 대중성을 함께 확보했던 신경숙의 소설 문법은 이제 한계에 직면했다. 복귀작은 소설이라기보다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의 빈곤을 소설이라는 장르로 은폐했을 뿐이다. 허수경 시인과 교류한 이메일과 대화를 소설적으로 변용시킨 복귀작은 소설이라기보다 고 허수경 시인을 추모하는 에세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에세이를 통해 허수경을 직접 추모하지 않고 허구적 장치를 활용해 허수경 시인을 추모하는 것도 신경숙 작가의 낯가림, 즉 소녀 취향에서 나온 산물이다. 또한 작가의 개인적 체험에서 소설의 소재를 끌어오는 상습적인 소설 작법은 신경숙이 직면한 문학적 상상력의 빈곤함과 실험성의 부재를 보여준다.

신경숙은 복귀작을 게재하는 지면으로 계간 《창작과 비평》을 선택했다. 《창작과 비평》의 문학적 영향력을 활용해 자신의 이른 복귀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잠재우려는 작가의 의도가 읽혀진다. 복귀하면서 발표한 일종의 사과문도 자신의 이른 복귀를 무마시키려는 전략적 의도로 읽혀진다. 허수경 시인의 죽음을 추모하는 성격의 소설이기에 고인과 관련한 논란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신경숙의 복귀작과 관련한 논란을 상당 부분 잠재우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월호 참사 부분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는 여주인공의 착한 마음씨를 보여주면서 시대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작가 신경숙의 알리바이를 보여준다. 아무리 봐도 신경숙의 복귀작은 작중 주인공이 착한 인물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눌해 보이지 않고 영악해 보인다.(영악한 것이 작가 자신인지, 아니면 작가 주변에서 신경숙을 돕는 사람이 영악한 것인지는 정확한 판별이 불가능하다.)

신경숙은 정말 어렵게 복귀했다면 적어도 소녀 취향의 작품과 결별하고 이전과 다른 깊이 있는 작품 세계를 보여주어야 했다. 이제 신경숙은 착한 천사표 순정만화의 주인공들과 결별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배에 실린 것을 강은 알지 못한다」라는 복귀작은 이전 작품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소재와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간 《창작과 비평》은 글머리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라고 낯간지러운 칭찬을 한다. 신경숙의 복귀작은 비판적 독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에 내재한 한계를 신경숙은 알지 못한다’라는 제목으로 다르게 번역되어 읽혀진다. 신경숙 작가에게 따스한 격려보다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를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무척 안타깝다. 이러한 안타까움은 신경숙 자신이 자초한 것이기도 하다.
 
소녀 취향으로 범벅이 된 신경숙류의 작품을 이제 그만 읽고 싶다. 더 이상 신선하지 않다.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그녀의 소설은 우리를 고문하는 매너리즘의 악취다. 50대의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10대인 소녀 취향의 세계가 아니라, 성숙한 인간을 등장시켜 역사·현실·일상과 만나 부딪치며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경숙의 소설 세계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 채 난쟁이로 머물고 있다면 때로는 절필이 약이 될 수도 있다. 어설픈 복귀는 신경숙 작가의 성장 잠재력마저 아예 없애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최강민 평론가 약력>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평론집 『문학 제국』, 『비공감의 미학』,『고독한 말』,『엘리트 문학의 종언시대』펴냄.

현재 우석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웹진 <문화 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