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소설가, '종이책'의 가치에 대해 말하다
[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최근 많은 사람들은 기존의 활자보다 영상에 관심이 많은 듯해요.” 강지희 평론가의 이야기를 들은 한강 소설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다 입을 뗐다. “물론 요즘 가장 뜨거운 매체는 유튜브인 것 같아요.” 한강 소설가는 일부 동의를 표하면서도 “근데 그 매체로 어디까지 깊게 들어갈 수 있는지는 생각해보게 돼요.”라고 말했다. 유튜브를 통한 영상 콘텐츠가 사용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우리가 마음 속 깊이 들어가 고찰할 수 있게 하는 매체는 ‘책과 문학’이라는 것이다.

19일 2019 서울국제도서전의 막이 올랐다. 올해 도서전의 주제는 ‘출현’으로 작년 도서전에서 ‘확장’이라는 주제 아래 다른 영역으로 뻗어나간 책 콘텐츠들이 어떻게 우리 앞에 ‘출현’할지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결정됐다. 도서전이 열리는 5일 동안 서울코엑스 B홀 책마당에서는 오후 2시부터 3시 30분까지 주제 강연이 진행된다. 첫날 강연을 맡은 한강 소설가는 “영원히 새롭게 출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강 소설가에게 있어 ‘영원히 새롭게 출현하는 것’은 바로 책과 문학이다. “물론 제가 책을 좋아하고 쓰는 사람이니 편애하는 걸 수도 있어요.” 머쓱하게 웃은 한강 소설가는 “문학은 우리에게 영원히 새로운 주제이고 여러 세대에게 닿고 있다. 그래서 문학은 새로 탄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어떤 세대든 문학에 애정을 가진 이들이 존재하며, 그만큼 종이책을 향한 관심도 꾸준하다는 것이다. 한강 소설가는 유튜브 콘텐츠나 새로운 형태의 책들이 각광 받고 있으나 “유튜브 다음에는 무엇일까 고민하면 다시 종이책이 아닐까 낙관적인 생각을 한다.”며 최근에는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한 종이책이 새롭게 출현”하는 듯 보인다고 말했다.
책의 장점으로 한강 소설가는 실물이 있다는 점을 꼽았다. “지금의 사람들은 아날로그에 굶주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며 현대에는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성’이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모든 책이 종이책으로 남아있으면 좋겠어요.”라며 한강 소설가는 나아가 “나중에는 책을 사랑하는 취향이 아주 특별한 것이 되어서 우리가 공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연예인들이 책을 읽는 모습”이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현상이 “앞으로 올 책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패션의 완성은 책’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책’ 자체가 특별하게 받아들여지리라는 생각이다.

한강 소설가는 지난 4월 노르웨이 ‘미래 도서관’의 프로젝트 작가로 선정됐다. ‘미래 도서관’은 100년 동안 매해 한 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총 100명의 작품을 2114년 출판하는 공공예술 프로젝트이다. 주최 측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원고를 건네줄 것이냐.”는 질문을 받은 한강 소설가는 고심 끝에 저서 “흰”의 한 장면을 구현하기로 결정했다. 태어나자마자 죽은 언니를 위해 “하얀 천으로 배내옷을 짓고 실과 천으로 애도”하는 모습이다. 한강 소설가는 원고를 흰 천으로 싸고 흰 실로 묶어 전달하기로 했으며, 이때 쓰이는 천은 숲으로 가는 동안 끌고 가기로 했다. 흰 천이 땅을 스치면서 숲과 만나는 과정을 담기 위함이다.
“흰 천을 끌고 가는 동안 누군가가 천을 막 밟고 문제도 생길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오히려 더 재밌겠다 싶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죠.”
그러나 한강 소설가는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동안 아무도 자신을 앞서 걷지 않았다며 이것이 무척이나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고 말했다. 매장지로 향하는 모든 사람들은 한강 소설가의 뒤를 따라 걸었는데 땅에 끌리는 흰 천보다도 몇 걸음이나 더 멀었다.

이윽고 매장지에 도착한 한강 소설가는 원고를 매장하기 전 “흰”의 마지막 부분을 낭독했다. “이 세상의 모든 흰 것 속에서 너를 보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라는 문구이다. 낭독을 마친 한강 소설가는 “(원고를) 막상 주려니 너무 슬프더라. 그래서 마지막으로 꼭 안고 있다 줬는데 그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고 말했다. 이상한 기분을 느낀 것은 한강 소설가뿐만이 아니었다. 원고를 받아 든 담당 지역 시장은 “기분이 이상해. 아기를 안고 있는 것 같아.”라고 이야기하며 “백년 후에 출간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강 소설가로서는 되레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너무 쉽게 약속을 해서 놀랐다.”며 “사실은 그게 약속할 수 있는 일일까 생각했고, 그들의 낙관이 부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백년간 매장되어 있을 소설은 누구에게 읽힐까. 그때면 한강 소설가는 물론 지금의 독자들은 모두 죽고 없을 확률이 높다. 한강 소설가는 “앞으로 백년은 긴 시간이 아닌데도 아득하다.”며 그 이유는 “백 년이라는 시간이 우리의 죽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몇 십 년 앞을 내다볼 수도 없는 현실 속에서 백년 뒤를 기약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한강 소설가를 비롯한 100인의 작가가 쓴 작품은 백년 뒤 후손들의 앞에 불현듯 ‘출현’할 것이다. 그리고 이 출현은 무수한 시간과 죽음을 뛰어넘어 미래의 독자들에게 문학적 울림을 가져다줄 것이다.
또한 한강 소설가는 책을 매장하는 과정에서 ‘불확실성 속에서도 계속해서 남아있는 것’의 가치를 읽어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그녀는 “많은 건물이 무너졌다가 세워지고 언제 자연이 파괴될지 모르는 아무것도 영속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을 겪었다. 그러나 시에서 관리하는 노르웨이 숲은 개발 예정이 없는 땅으로 숲 관리인은 “100년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노르웨이의 숲에는 오랜 시간이 잠들어 있고, 그렇기에 문학 작품들 역시 영원히 출현할 수 있다.

“여전히 책을 읽고 나면 강해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한강 소설가는 바빠서 책을 못 읽다가도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스스로 ‘이제 강해졌다’, ‘씩씩해졌다’라는 생각이 든다며 그것이 책을 붙잡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쓰는 일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강 소설가는 올해 남은 시간은 새로운 책을 출간하는 데에 힘을 쏟으려 한다고 말했다. 또한 행사장을 찾아준 독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책 속에서 계속 만나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이 짧은 인사는 책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있고 오직 그것만이 불확실함 속에서 확신을 느낄 수 있는 안도감을 준다는 암시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