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79) / 연민과 존경심-고영의 '종이의 말씀'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79) / 연민과 존경심-고영의 '종이의 말씀'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7.02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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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79) / 연민과 존경심-고영의 '종이의 말씀'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79) / 연민과 존경심-고영의 '종이의 말씀'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79) / 연민과 존경심-고영의 '종이의 말씀'

 

종이의 말씀

고영

 

가벼운 무릎 위에 올려져 있는
종이 한 장의 처세가
웅숭깊다

승객들 무릎과 무릎 사이를 옮겨 다니는
종이 한 장의 표정을
더듬더듬 읽는다
공복에 기댄 탓인가, 공손한 글자들이 자꾸
시선 바깥으로 떨어져 나간다

종이의 말씀을 새겨들을 줄 알아야
좋은 시인이라고
어머니 살아생전에 목구멍에 칡이 돋도록
말씀하셨는데

더듬더듬, 띄엄띄엄 읽어 나가는 동안에도
종이의 공손함은 변함이 없다

손가락 없는 손이, 고개 숙인 노파의 손이
죄 많은 무릎에 닿을 무렵
자세를 고쳐 앉아
무릎과 무릎이 벌어지지 않게
종이를 떠받들고
나는

웅숭깊은 나무를 품은
연필 한 자루를 공손히 받아 들었다

-『딸꾹질의 사이학』(실천문학사, 2015)


  
<해설>

요즈음엔 단속이 심해 전동열차 안에서 종이를 나눠주며 구걸행각을 하는 사람을 보기 어렵지만 예전에는 사흘도리로 만났었다. 고영 시인도 그랬으리라. 노파가 공손하게 승객의 무릎 위에 놓은 종이를, 시인 자신도 밥을 굶어 눈앞이 희미하지만 더듬더듬, 띄엄띄엄 읽어 나간다. 종이의 의인화가 재미있다. 무릎을 벌리면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손가락 없는 손이/ 고개 숙인 노파의 손이/ 죄 많은 무릎에 닿을 무렵/ 자세를 고쳐 앉아/ 무릎과 무릎이 벌어지지 않게/ 종이를 떠받들고” 있는 모습이 왠지 눈물겹다. 

마지막 연에 나오는 연필은 필기구였는지 노파가 팔고자 한 물건이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어떻든 연필도 종이도 나무로 만든 것이다. 종이에는 슬픈 사연이 적혀 있었으리라. 세상의 모든 슬프고 설운 사연을 적은 종이에 대한 경외심으로 시인은 연필 한 자루를 공손히 받아 든다. 웅숭깊은 나무를 품은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을. 우리가 아무렇게나 쓰고 버리는 A4지 한 장도 나무가 준 것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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