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0) / 고독한 투병-최춘희의 '도드리'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0) / 고독한 투병-최춘희의 '도드리'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7.03 19:54
  • 댓글 0
  • 조회수 158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0) / 고독한 투병-최춘희의 '도드리'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0) / 고독한 투병-최춘희의 '도드리'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0) / 고독한 투병-최춘희의 '도드리'

 

도드리*

최춘희

 

부패된 향기 병실 안을 꽉 채우고 있다 닫혀진 문틈 사이 물컹거리는 살집 헤집고 딱딱한 비눗갑 같은 영혼 시궁쥐처럼 갉아먹으며 상처난 곳에서 뿜어지는 역한 핏물과 고름 발효된 엑기스 되어 흘러넘친다 코에 연결된 산소줄, 오줌보에 꽂혀진 소변줄, 시퍼렇게 멍든 팔목 힘겹게 매달린 링거병, 수술 부위에 박혀 끊임없이 선홍빛 토마토 주스 같은 핏물 게워내는 피주머니 주렁주렁 매단 채 몸밖으로 주르르―, 함부로 내다버린 개숫물 같은, 주워 담을 수 없는 생이 쏟아진다 나 그동안 세상과 나를 향해 너무 악쓰고 살았다 한번도 내 안의 당신에게 귀 빌려주지 못했고 세상 밖 무수한 소리 쓸어 담을 줄 몰랐다 걸신들린 아귀처럼 닫혀진 문 두드리며 발길질한 죄, 남들 다 잠든 한밤중 거리 휘젓고 고성방가한 죄, 나만 아픈 것도 아닌데 나만 아프다고 비명소리 꽥꽥 질러댄 죄, 무엇보다 세상을 향해 시끄럽게 아우성치며 남의 소리는 듣지 않으려 한 죄 너무 크다 어둠 속에 하얀 실금의 박테리아들 엄청난 식욕으로 뚱뚱하게 알뿌리 키우고 있다 식도에서부터 입천장까지 푸른곰팡이 피고 허옇게 버캐 낀 삶의 미세한 기침소리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 찧는 소심하고 예민한 회복기의 당신, 이른 봄 눈뜨는 참나무 새순처럼 실핏줄 밀어 올린다 등칡에만 알을 낳는 사향제비나비의 꿈을 꾼다 빛의 생장점에서 날아오르는 극채색 무늬가 한없이 느리고 고요하게 흘러간다

 * 국악 장단의 한 가지로서 또는 이 장단에 맞춘 악곡이나 춤. 6박 1장단으로 구성되는 보통 속도임.

-『현대시』(2003. 3)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0) / 고독한 투병-최춘희의 '도드리'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0) / 고독한 투병-최춘희의 '도드리'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해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중환자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선홍빛 토마토 주스 같은 핏물 게워내는 피주머니”는 생명을 지탱케 해주는 생명선이다. 환자가 시인 자신인지 타인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병실 공기를 부패된 향기로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찰자의 입장이다. 환자의 이런 모습을 보고 화자가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시의 중반부는 간절한 참회록이다. 내 생도 어느 시점에 가면 저런 참혹한 상황을 맞이할지 모르는데, 타인을 위해 배려할 줄도 몰랐고 온갖 죄를 저지르며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고백이 끝난 뒤에도 몇 마디의 말을 덧붙이는데, 이 부분에 시의 주제가 담겨 있고 제목과도 연결된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몸은 하얀 실금의 박테리아들이 영양분을 공급받는 숙주다. 그리고 암을 우리가 몸으로 인지했을 때는 이미 암세포가 장기 가득 퍼져 있다. 우리는 사실 하루도 빠짐없이 발암물질을 호흡하고 씹어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회복기의 당신은 어떠한가. 소심하고 예민하지만 생명체는 또 ‘어떻게든 살려고 하는’ 존재다. 회복기란 참나무 새순이 실핏줄을 밀어 올리는 것과 같다. 그 속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도드리 가락이 그러하듯이. 

회복기의 당신은 등칡에만 알을 낳는 사향제비나비의 꿈을 꾸고, 결국은 빛의 생장점에서 날아오른다. 날아오른다고 하여 쏜살같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다. 아주 짙거나 치밀한 채색으로, 한없이 느리고 고요하게 흘러가듯이 날아오른다. 앞날을 점칠 수 없기에 회복기란 정말 지겨운 것이다. 병 깊은 본인에게도, 환자의 나날을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