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1) / 헌책방에 얽힌 추억-남진우의 '낮잠'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1) / 헌책방에 얽힌 추억-남진우의 '낮잠'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7.04 22:07
  • 댓글 0
  • 조회수 182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2) / 헌책방에 얽힌 추억-남진우의 '낮잠'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2) / 헌책방에 얽힌 추억-남진우의 '낮잠'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2) / 헌책방에 얽힌 추억-남진우의 '낮잠'

 

  낮잠

  남진우


  헌책방 으슥한 서가 한구석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내 들춰본다
  먼지에 절고 세월에 닳은 책장을 넘기다
  낯익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아, 전생에 내가 썼던 글들 아닌가
  전생에서 전생의 전생으로 글은 굽이쳐 흐르고
  나는 현생의 한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고 있다
  한 세월 한 세상 삭아가는 책에 얼굴을 박고
  알 수 없는 나라의 산과 들을 헤매다 고개를 드니
  낡은 선풍기 아래 졸고 있던 주인이 부스스 눈을 뜨고
  이제 문 닫을 시간이라 말한다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

  으슥한 서가 한구석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책을 꽂고
  조용히 돌아서 나온다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문학과지성사, 2006)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2) / 헌책방에 얽힌 추억-남진우의 '낮잠'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2) / 헌책방에 얽힌 추억-남진우의 '낮잠'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해설> 

아주 오래된 책은 대부분, 지금은 고인이 된 사람이 생전에 낸 저서다. 책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죽은 사람이 쓴 책을 산 사람이 보게 마련인 것. 시인이 죽은 후에, 죽은 자를 노래한 그의 시집을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펼쳐보는 사람이 있을 터. 시인은 먼지에 절고 세월에 닳은 책장을 넘기다 낯익은 글을 보고 “아, 전생에 내가 썼던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화들짝 놀란다. 이때의 기분은 어디에 갔다가 이곳에 분명히 와봤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 번도 온 적이 없을 때 느끼는 그 신비로움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혀 알 수 없는 나라의 산과 들을 헤매다 고개를 드니 그새 날이 저물어 있다. 

인생은 짧고 낮잠은 길다는 구절을 보니 남가일몽이나 한단지몽 같은 고사성어에 얽힌 이야기가 생각난다. 인생이란 아무리 길어봤자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을. 전생에서 전생의 전생으로 굽이쳐 흐르는 글이 적혀 있는 책을 서가 한구석 아무도 모르는 장소에 꽂고 조용히 돌아서 나오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