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8) / 겁이 사람을 살렸다 - 마종하의 '겁'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8) / 겁이 사람을 살렸다 - 마종하의 '겁'
  • 이승하 시인
  • 승인 2019.07.1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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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8) / 겁이 사람을 살렸다 - 마종하의 '겁'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8) / 겁이 사람을 살렸다 - 마종하의 '겁'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8) / 겁이 사람을 살렸다 - 마종하의 '겁'

 

  겁

  마종하

 

  비결은 ‘겁’이다.
  겁으로 산 것이다.
  빌어먹을 눈치보기라니.
  1ㆍ4후퇴 때 어머니께서
  바가지를 쥐어주시며
  흙담에 몸을 가리고
  소리지르라고 하셨다.
  “밥 좀 주세요!”라고.
  나는 못하겠다고
  울먹였으나, 어머니께선
  목소리를 높이라고
  얼굴을 떨며 주문하셨다.
  그때부터, 뿌리의 겁,
  질린 찬밥이 되었는지.
  가난은 이제 친숙하다.
  죄 없는 마음으로
  기름 뺀 힘살만으로
  저 널린 허무를 가꾸며,
  마른 바가지와도 같이
  겁마저 가볍게 꾸린다.

  -『창작과 비평』(2004년 겨울호)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8) / 겁이 사람을 살렸다 - 마종하의 '겁'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88) / 겁이 사람을 살렸다 - 마종하의 '겁'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해설>
 
  어떤 일이나 대상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 ‘겁’이다. 아마도 시인이 겪은 이 시의 내용은 실제 체험이 아니었나 싶은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텨야 했던 1ㆍ4후퇴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바가지를 쥐어주시며 흙담에 몸을 가리고 소리를 지르라고 하셨다. “밥 좀 주세요!”라고. 화자는 못하겠다고 울먹였으나 어머니는 목소리를 높이라고 얼굴을 떨며 주문하였다. 겁이 원래 많았던 것일까, 그때부터 “뿌리의 겁”이 질린 찬밥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가난은 이제 친숙하여, “죄 없는 마음으로/ 기름 뺀 허무를 가꾸며” 겁마저 가볍게 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그런 끔찍한 ‘겁’의 체험이 겁의 순치를 가능케 한 것이다. 

  우리는 겁쟁이라는 말을 안 좋은 뜻으로 쓰고 있지만 겁이 사람을 살리는 경우가 있다. 파란 많았던 한국 근ㆍ현대사를 살펴보면 용기가 사지로 몰아넣고 겁이 목숨을 건지게 한 경우가 꽤 있었다. 하지만 이육사나 최익현을 생각해보면 용기가 옳고 겁은 비겁한 것이다. 청나라와 러시아와 싸워 이긴 일본의 침략 위협에 우리가 겁을 먹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겠는가.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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