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시인 특집] 3. 로로와 의자 - 김성호 시인
[신인 시인 특집] 3. 로로와 의자 - 김성호 시인
  • 김성호 시인
  • 승인 2016.09.10 0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로로와 의자

 

풀려버린 낯빛이고 로로와 의자에 앉은 맨다리이다.

종이를 만지는 손길이고 로로와 의자에 앉은 빼곡한 몸통이다.

어둠은 푹신하게 지나간다.

어둠은 조용하게 지나간다.

어둠은 로로와 의자를 지나간다. 로로와 의자는 어둠을 바라본다.

 

풀려버린 살갗이고 멎으러 오는 노래의 너비이다.

로로와 의자에 앉은 희박한 연기이고 그걸 나는 목말라 한다.

오늘의 새가 운다.

새가 운다.

오늘의 새는 계속해서 나의 의자를 울도록 둔다.

낮은 인물이고 낮은 차양이며 낮은 주단. 새가 운다.

잡아 달라고. 잡아 달라고.

 

풀려버린 꺼풀이고 로로와 의자에 잠기는 작품과 지대. 그걸 내리고 내린다.

그걸 떨리게 바라보는 문 뒤의 첫 현실이다.

로로와 의자에 앉아 보는 지난 입술이고

엎드리는 거실.

로로와 의자. 웅크리게 된다.

 

로로와 의자에 앉아 생각하는 

로로와 움직임들. 부딪힘들. 일어오는 소리.

분명치 않은 거리. 두 호주머니.

오랜 시간.

로로와 의자.

하늘의 점이 파묻히는 게 내게는 쉽게 상황으로 특징지어진다.

 

풀려버린 무리이고 로로와 의자의 모형. 실내를 걸어간다.

나의 꼭 맞는 의자이다.

풀려버린 뺨이고 곡선을 잡는 정오이고 오로지 가라앉는 네모 상자이며 

나의 꼭 맞는 의자이다.

어둠을 천천히 기어가는 딱딱함이다. 딱딱함을 천천히 기어가는 밋밋함이다.

눈을 감고 싶다. 눈을 뜨고 싶다.

 

로로와 의자를 보는 나의 의자이다.

로로와 의자에 앉는

나의 꼭 맞는 의자이다.

바람이 오고 햇빛이 오고

잔잔한 나무 의자이다.

나의 꼭 맞는 의자이다. 

 

내가 바라보는 나의 텅 빈 의자이다.

로로와 의자를 싣고 가는 속도이며

로로와 의자가 있는 비행기이며 

로로와 의자에 앉는 필기구와 옷걸이.

그곳에 앉는 나의 깊숙한 등허리이다.

 

브루노 슐츠.

실비아 플라스.

두 권의 책이 놓여 있다.

 

 

언어에 처하기

요즘 자주하는 생각은(?) 짓은 뭘 써놓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방금도 '언어에 처하기'라고 써놓고 한참을 바라보고 있다가 썼다. 이런 때가 자주 있고부터는 언젠가 내가 이런 시간을 좋아하나, 물었던 적도 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고(왜냐하면 그 시간은 전혀 행복과는 연관이 없다.) 그 단어나 문장이 단지 단어와 문장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으로 보일까. 세상처럼 보인다. 세상의 풍경이나 사람, 어떤 영상을 볼 때 느끼는 시간의 와해 상태가 그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모든 단어와 문장은 세상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생각이나 논리 비슷한 것일 테고 나에겐 그것이 조금의 과장이 허용된다면, 물질적이고 물리적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거기엔 참 많은 것이 있다. 아무 단어나 한번 써보자. 마우스, 그래 마우스. 이 글을 쓰는 옆에는 마우스가 있다. 마우스. 마우스를 써놓고 한참을 본다. 마우스. 마우스에는 마우스가 있는데 마우스는 허전한 피부 껍데기 같고 그 속에는 말랑말랑한 무언가가 있다.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느낌만을 알아차리고 느낌만을 간신히 어느 순간이 되면 내보낼 뿐이다.

그렇다면 마우스에 관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방법으로 쓸 것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쓰고 바라보고 보이는 것을 옮기면 되니까. 하지만 옮긴다고 다 시일까. 좋은 시일까. 그렇다면 모든 작가가 장수했겠지. 다만 나는 이런 덧없는 시간이 제목으로 제시한 '언어에 처하기'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뭐 대단한 시인이란 말은 아니다. 내가 언어에 쉽게 스스로 처해서 세상이 뒤집어질만한 시를 쓰는 것 같지도 않다. 다만 나는 마우스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듯이 글을 쓸 때 그 무언가를 목격할 뿐이다. 혹은 목격한다고 착각할 뿐이다. 실은 나는 세상이 별 쓸모가 없고 아무 말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완벽하니까. 그대로 서 있고 그대로 정말 완벽하게 존재하니까. 왜 뭘 더 보태야 하는가.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글을 쓸 아무런 이유를 못 찾겠는데도 나는 책상에 앉아 있고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면 무언가가 써진다. 그렇다.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쓰면 무언가가 써진다. 나는 이것이 정말 놀랍다. 마우스는 그냥 그대로 있는데 나는 마우스라고 쓰고 그래도 마우스는 그냥 그대로 있고 나는 마우스라는 것에서 무언가를 보고 언어를 혹은 그 무언가가 움직이거나 언어로밖에 표현이 안 되는 무엇이 떠올라서 사실과 무관한 문장을 쓴다. 그냥 마우스 밖에 안 보이면 그냥 마우스 밖에 안 보인다고 쓴다. 마우스는 그냥 있는 건데. 그럴 땐 내가 시인이 된다. 나는 내가 시인이라고 여긴다.

한번 밖을 보라. 사람들이 지나가고 세상이 흔들린다. 사람은 사람에 풀이된 적 없고 지나감 또한 지나감에 풀이된 적 없다. 저것이 저것하는 것이다. 한다는 것도 한다는 것에 풀이된 적 없기 때문에 마침표를 찍은 문장은 헛소리이며 저것이란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지나가는 것인데 글에서는 사람이 지나간다고 쓴다. 더 많은 문장을 쓰고 더 많은 헛소리를 만든다. 마치 상대에게 입을 벌려 말을 하는 것처럼. 이것이 나는 의아하다.

언어는 있다. 언어가 있는 곳이 마음이라고 한때 생각이라고 한때 생각했지만 가소로운 생각이었다. 단지 언어가 있다는 것만 나는 확신한다. 언어는 그저 있다.(가끔은 언어가 어딘가에서 온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어디인지는 모르고 아무튼 어디선가 온다는. 시선을 두는 곳인지 밖의 소음인지. 하지만 날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고 보면 그것도 '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나는 마우스라고도 쓰고 사람이라고도 쓴다. 이럴 때 나는 시인이기 전에 꽤 성실하고 정성이 가득한 사람이다. 마우스가 마우스라고 들려준 적 한 번도 없다. 나는 마우스다, 하면서 마우스라는 걸 보다가 뱉게 된다. 나의 안팎에서 우러나와 마우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마우스라고 써진 걸 보며 이게 뭐지 생각한다. 그러다가 뭘 쓴다.

너무 힘들 땐 언어라는 게 없는 거 아닐까, 어디에서도 오지도 않고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 아닐까 생각하지만 언어는 있다. 언어가 없다면 이 외로운, 불가해한, 백지를 바라보고 있을 때의 심정을 난 설명할 수 없다. 언어가 있다는 확신만을 난 다시 확신한다.

반대로 막 시 한 편이 저절로 눈앞에 그려진다고 해도 그걸 쓰지 않으면 시가 안 된다. 당연하다. 만약 내가 그런 경지에 있어서 스스로 시를 느끼고 보고 시를 쓰지 않으면 나는 시인이면서도 보여줄 시가 없어서 시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 안타깝게도 나의 경우 언어에 처한다는 것은 '시를 쓴다.'는 것이다. 언어의 진정한 처함은 없다. 처했을 때 처한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붙잡히기 싫어서 날 갖고만 노는 귀신 같기 때문이다. 언어에 처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씀이고 그대로 완벽한 세상에 흐르고 있는 어떤 기류를 감지하려는 노력이며 그 여파로 스스로 몸에 더러운 문신을 새기듯 보이지 않는 것을 좇아 죽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노력의 이면에는 콘크리트 같이, 돌아선 연인 같이 단단한 세상과 맞서려는(살아 내려는) 의지가 희박하더라도 내포되어 있음을 부인할 순 없겠다. 그걸 당신들은 지금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웃기는 말이지만, 삶이란 것에 도달하려는 허무한 시도, 수많은 시도 중 하나일 것이다. 마무리 짓도록 하자.

 

김성호

2015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등단

 

Tag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