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96) / 누에와 나방 - 김선향의 '누에'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news/photo/201907/55454_32631_574.jpg)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96) / 누에와 나방 - 김선향의 '누에'
누에
김선향
새벽이었다
변두리 공중목욕탕
어스름 한가운데
플라스틱 바가지를 베개 삼아
바닥에
차고 메마른 바닥에
모로 드러누운 노파
언뜻 누에로 보였다
저 굴곡의 마디들
짧고 듬성한 백발
어림잡아도 팔십 줄 이상
노역에 닳고 닳은 몸은
마지막 뽕잎을 배불리 먹고
영원한 잠에 든 노파
환기통으로 날아오르는 새하얀 나방을 보았다
-『여시아문』창간호(2019)
<해설>
지금도 서울 변두리를 가다가 목욕탕 굴뚝을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럼 어린 시절, 명절을 앞두고 아버지와 함께 공중목욕탕에 갔던 기억이 난다. 온몸이 발갛게 되도록 아버지는 나의 묵은 때를 벗겼고, 나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아버지의 ‘때벗김’을 견뎌내야 했다. 목욕비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아버지는 본전을 뽑을 생각에서인지 비누칠을 하고 나서 또다시 때벗김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비명을 지르면 조용히 해 임마! 불호령과 함께 등을 한 대 철썩 맞게 마련이었다.
화자는 변두리 공중목욕탕에서 노파를 보았다. 차고 메마른 바닥에 모로 드러누운 노파를. 목욕하다 지쳐 쉬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언뜻 누에처럼 보였다. 어림잡아도 팔십 줄 이상이라니 온몸이 누에처럼 쭈글쭈글한 것이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말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하지만 그 몸도 어느 때는 10대 소녀였을 것이고 어느 때는 20년 처녀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겪었을 테니 그 몸 자체가 훈장이다. 누에는 나방이 된다. 화자는 환기통으로 날아오르는 새하얀 나방을 상상한다. 혹자는 죽음 이후 영과 육의 분리를 이 대목에서 느낄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변태를 아름다운 완성으로 간주하고 싶다. 아니, 거룩한 승천으로 간주하고 싶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