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시인 특집] 4. 측도 가는 길 - 박선희 시인
[신인 시인 특집] 4. 측도 가는 길 - 박선희 시인
  • 박선희 시인
  • 승인 2016.09.24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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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도 가는 길

 

풀독이 맨종아리를 타고 오른다

 

메마른 손금에 물길을 내던

그와의 첫여름

열리는 바닷길에 나를 세워놓고

파도는 처음부터 이별을 노래하고 있었지

 

가시리 가사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 하고

 

열었다 닫았다 

마음에 지퍼를 달고

여러 날 그늘을 떠돌며 지냈다

눅눅한 어제를 말릴 붉은 태양이 필요했지만

멀쩡한, 날들을 서성였을 뿐

 

검지손가락 끝으로 되짚어 온 바다는

오래 전 연인의 몸으로 

빛나던 말을 걸어온다

물 속 길 따라 박혀있는 전신주

그 기둥에 새겨넣었던 돌의 말

하루에 두 번 물이 길을 낳을 때마다

상처를 열어 말리며

달을 향해 푸르게 웃었을까

밖으로 드러난 불안을 어루만지며

흔적을 수장할 물때를 기록 중일까

 

어둔 기억을 잡아끄는 환한 하늘

더 이상 물때는 없고

물의 손, 그를 지우고 있다

 

 

<시작노트 >

끝없는 질문

 

얼마 전 다시 가게 된 바다는 물이 빠져 속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에 의해 길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바닷길이다 모래자갈이 깨끗하게 펼쳐진 길을 걸어 섬으로 향했다 측도를 향한 길을 품고 물속에 세워져있던 기둥 곳곳에 ♡이니셜과 머리를 맞대 듯 새겨 넣은 이름들과 다녀간 날짜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많은 약속들은 안녕하신가

 

처음 그 바다에 갔던 날, 길이 지워진 바다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곳에서 노래를 불러 주고 싶었어” 라고 말하던 사람이 있었다 물 속 길 따라 석조기둥들이 머리에 전등 하나씩 밝히고 서 있던 늦은 저녁 그가 불러 주는 노래를 들으며 우리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믿음은 위험한 희망일까

 

물길이 열리고 닫히듯 한 사람을 만나 약속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일, 로 오랫동안 떠돌며 지낸다 흐릿한 각도 속에 들어앉은 그를 찾아가는 일은 지난 나를 하나씩 지워 가는 일, 열린 길을 지우며 이따금씩 내게 와 울음이 되는 그를 물처럼 노래한다 내 안의 불을 끄고 나니 밖이 보인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는 시이고 시는 끝없는 질문이다

 

 

박선희

2014년 월간문학 데뷔, 2016년 아르코 창작활동 지원금 수혜 

저서로 시집 『건반 위의 여자』, 수필집 『아름다운 결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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