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시] 이설야 시인의 '랩'
[신작 시] 이설야 시인의 '랩'
  • 이설야 시인
  • 승인 2019.08.12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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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설야(시인)


바람인형이 허리를 굽히며 춤추는 초특가 할인 상점
카트들이 줄지어 들어간다.

커다란 시계가 저울처럼 매달려 있고
대형냉동고 안은 죽은 물고기들로 가득하다.
랩을 붕대처럼 감고 있는 싱싱한 채소들
저울 눈금 속에서 흔들리는 것들

카트가 멈추다가, 지나간다.
유통기한 임박한 돼지고기들
점원은 랩을 뜯어버리면서도, 감사합니다.

“랩은 쉽게 찢어지지 않는 속성을 가집니다.”

오렌지는 정말 오렌지 같고
생새우는 정말 생새우 같은데
나는 더 이상 나 같지가 않고
랩처럼 얇은 막이 둘러쳐진 나를 
카트가 끌고 다닌다.

이동잡화점이 된 카트들 계산대에 서자,
비닐 얼굴들 위로 바코드가 지나간다.

“랩을 얼굴에 두를 경우 질식할 위험이 있습니다.”

카트가 바람처럼 다 빠져나간 문 닫은 상점  
바람 인형도 바람에 실려 가고
축축한 밤안개가 랩처럼 거대한 도시를 감싼다.

양손 가득 집으로 도착한 나는,
얇은 플라스틱 막을 찢고 한쪽 발을 문 안으로 들어놓는다.

지붕 위에는 별들의 성시

질식한 얼굴들 위로 랩이 잠처럼 내려앉는다.

이설야 
시인.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발간. 제1회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수상. 

※ 위 시는 웹진 "문화 다"와 공동으로 게시한 작품입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intre_etc&ps_boid=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