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시 : 2019년 8월
참석자 : 김지윤(인터뷰어, 문학평론가, 시인), 최종천(시인)
인간과 달리 고통도, 피로도, 죽음도 알지 못하는 기계는 생명이 없는 대신 영원을 얻을 수 있다. 대신 기계는 사색하지 않는다. 죽음이 없으니 삶을 성찰할 필요가 없고 끝이 없으니 지나간 시간과 현재를 사유할 필요가 없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다. 인간은 갈대처럼 약하고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귀하다고. 최종천 시집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반걸음, 2018)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이 시집을 읽고 시인의 변모에 놀라워했다. ‘노동이 가치의 원천이고 노동하는 ‘손’이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고 말했던 그가 이 시집에서는“모두가 다 노동 때문이다”라고 쓰고, “긍지와 자부심으로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참 가엾은 사람들아 지구는 더워지고 있다./ 당신의 그 긍지와 자부심은 자본주의의 밑천이다./ 긍지와 자부심도, 넥타이도 다 풀어버려라.”(「넥타이」)라고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명과 미래에 대한 시인의 철학적인 사유가 워낙 깊고 심오하여 읽으면 읽을수록 질문만 늘어나게 되었다. 몇 번을 다시 읽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직접 최종천 시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이 궁금증과 목마름이 좀 해소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를 만났다.
김지윤: 안녕하세요. 인터뷰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심오한 책이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 두렵지만 제 짧은 소견으로는, 꾸준히 노동이란 주제에 천착해 오신 선생님께서 현재의 맥락에서 노동시를 다시 쓰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준 시집이라 생각되었는데요. 삶 전체가 노동으로 전락해버린 시대에 노동자를 억압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통치 기술을 벗어나는 길로 근래에 포스트사회주의자들이 적극적 노동 거부(최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노동력의 흐름을 자본의 흐름으로부터 단절시키자는 취지로 노동거부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런 주장은 가라타니 고진의 노동력 판매 거부 전략 등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지만, 전면적인 노동 거부가 합의되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성사된다 해도 자본이 노동 거부의 유효성을 상실시킬 충분한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반론이 만만찮은 것이 사실입니다.)를 말하고 있는데요. 혹시 이러한 흐름에 대해 인지하시거나 동의하는 부분이 있으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저의 부족한 이해를 보충하기 위해, 이 시집을 쓰실 무렵 선생님의 생각과 출간 후 1년이 지난 지금의 소감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시인의 말’에서 “노동해방은 원천 봉쇄되어 있는 세계”이며 이 시집이 “노동해방을 굳게 믿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드리는 진혼곡”이라고 쓰신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으며(「노동의 종말」)” “그를 찾으려면 집을 태울 것이 아니라 해체해야 한다”(「집」)고 쓰셨습니다. 노동의 폐기가 아닌 ‘해체’라는 뜻으로 보이는데 노동을 완전히 해체해버린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최종천: 우선 노동해방의 문제부터 풀어봅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열심히 읽어온 책이 기독교 텍스트인 성경/성서입니다. 이 성경과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는 저술들이 있는데, 우선 노자의 『도덕경』. 화이트헤드의 『이성의 기능』.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입니다. 『이성의 기능』에서 화이트 헤드는 목적적 인과관계를 말하고 있는데, 동물의 몸은 목적적 인과관계에 의한 몸이라고 합니다. 동물의 몸은 어떤 특별하고 개별적인 목적에 맞게 진화했다는 것입니다. 원숭이는 나무를 잘 타고, 기린은 목이 길어서 높은 나뭇가지의 잎을 먹을 수가 있고, 등. 그런데 이러한 존재는 또 있습니다. 인간이 만드는 기계가 바로 그러한 것이죠. 목공기계는 목제의 가공에, 땅을 파는 기계는 땅을 파는 데에만 특수화된 기계죠. 화이트헤드는 이제 인간은 그러한 목적적 인과관계를 탈피한 보편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신이 아주 보편적인 기계인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개별적인 기계를 만들 수가 있습니다. 기계는 노동을 저축해 두고 꺼내서 쓰는 것입니다. 인간이 기계를 만드는 이유는 자신의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하는 육체의 진화를 반영한 것입니다.

김지윤: 김지윤 선생님 사진.jpg“몸 노동만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은 진화하게 되어 있는 것”(「제곱이란 무엇인가?」)이라는 선생님 시 속 구절처럼 ‘로보칼립스’에 대한 예감은 우리를 두렵게 하곤 합니다. 우리가 알던 노동이 점점 사라져버리는 세상에 대한 어두운 상상 때문이지요. 선생님께서는 노동의 미래 -더 나아가 어쩌면 ‘인간의 미래’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 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최종천: 성경을 읽어보면 인간의 미래가 보입니다. 지금 종교와 과학이 뜨겁게 대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은 자연의 진화와 일치합니다. 성경은 오로지 인간에 대하여 말합니다. 내가 창조한 자연의 법칙과 논리가 이러이러 하니 너희는 그 법칙에 복종하라! 요컨대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자연/세계에 너를 일치시켜라! 그것이 행복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사리질 것이다. 이거죠. 최근에 나온 스티븐 호킹의 거대한 질문에 대한 단순한 대답? 인가요? 읽어보면 앞으로 인간은 우주를 식민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아닌 인간이 제작한 기계를 먼저 행성에 보낸다. 이겁니다.
그는 앞으로 최단 시간 안에 인간이 지구를 떠나야 계속 인간이 우주 안에 생존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인간이 지구 밖의 행성을 식민지로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또 인간의 개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이런 말은 호킹이 숨기고 있는데요, 미래에 지구 밖의 행성에 갈 수 있는 인간은 현생하고 있는 우리가 아니고 우리가 개조한 인간입니다. 자연의 진화를 돌이켜 보면 네안데르탈을 멸망시킨 존재가 바로 우리 사피엔스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개조하여 탄생시킨 인간, 그들이 우리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호킹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우주가 논리적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논리에 의하여 전개될 인간의 비참을 우리의 이성을 통하여 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기계/문명의 발전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면 아닙니다. 스피노자는 이 문제를 분명히 했습니다. 거부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계는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다.” 내가 이성을 통하여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죠. 오늘날 인류는 자신이 발전시키고 있는 기계문명으로 인해 지구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곧 원시 노동사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연으로 돌아가 노동을 하며 사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논리적입니다. 논리의 끝까지 가 봐야 합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또 다른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핵전쟁을 하여 인류의 절반 그 이상을 순간에 덜어 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삽시에 거의 모든 문제, 환경파괴나 오염 지구의 온난화 기온의 상승.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휴머니즘을 말하면서 그런 반 인간적은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구 곳곳에서 전쟁을 하며 사람들을 죽이면서도, 인간이 얼마나 지겨운 존재입니까?
저러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자연을 일단 인간의 소용에 닿게 가공하는 노동이 있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 세계는 일어나는 모든 것이다.”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지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바다 속의 고등어는 그대로 두면 사물이지만, 노동이 가해지면 사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물을 사실로 하는 것은 노동입니다. 논고에 의하면 “이 세계는 논리로 가득 차 있습니다.” 논리의 밖은 우연입니다. 내가 논고를 읽으면서 두려움을 느낀 것은 ‘가능성’ 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그는 이 세계는 “가능성의 총체로서 논리 공간.”이라고 합니다. 논리의 내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인간의 미래를 단언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인간이 발전시키고 있는 기계문명은 분명히 논리적이기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가능성은 어디까지 논리 내의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논리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신동엽 시인은 일찍이 「시인정신론」에서 ‘원수성 차수성 귀수성’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논리 안에서 맴도는 자연의 순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도 이 세계의 논리적 구조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계 3차 대전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울지 알 수 없지만, 4차 대전은 분명히 망치와 도끼를 가지고 싸우게 될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통하여 무궁한 진화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진화가 일직선일까요? 직선으로 쭉 나가는 것이 아니라, 원을 그리고 있을 것입니다. 직선으로 쭉 나간다면 그것은 인류가 전멸하는 것이고, 논리의 안에서 원을 그린다면 인간은 전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이 지구의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김지윤: “예술의 완성은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에 몰두하는 이유이다.”(「노동의 십자가―현악사중주」) 라고 쓰신 구절을 보면 노동의 예술화, 유희화에 대한 생각이 엿보입니다. 그간 ‘노동하는 시인’으로, 예술보다는 노동을 우위에 두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예술-노동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시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노동과 예술의 관계, 노동의 예술화에 대한 생각을 여쭤보아도 될지요.

최종천: 화이트헤드가 『이성의 기능』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까지의 진화를 견인 한 것이 바로 이성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성/정신의 총체인 인간은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진화론과는 정 반대의 견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이트헤드의 견해가 옳을 것입니다. 이성은 자기초월성, 자신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이겁니다. 이 저술은 전멸은 각오하고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문명을 추구하는 인류에 대한 조롱과 풍자 해학 서늘한 비애를 문체에 담아내고 있으며, 합리적인 순서로 말하지 않고 도치법을 사용하여 박진감 넘치는 문장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 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100쪽이 못 되는 극히 압축된 저술입니다.
성경의 에덴동산은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동해방은 노동을 손에서 놓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 자연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에덴동산을 읽어보면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 노동을 하면서 득한 인식이 아직 막연한 대상인식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낙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창세기 2장 에덴동산을 말하고 있는 장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러니까 이 이전에 이미 인간은 노동을 한 것이지요. 창세기는 자연을 대상으로 노동을 하면서 득한 인간의 인식이 발전해 가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것이 실제 인간 진화와 일치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를 통하여 자연과 노동으로부터 인간은 아주 멀리 도망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오직 인간이 문제입니다. 문학은 별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논리는 각각 따로 있지 않고 연쇄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논리에서 어떤 일은 일어나고 어떤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없습니다. 논리가 이렇게 사슬로 되어있기 때문에 논리의 끝까지 인류가 문명의 진화를 밀어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바로 바둑을 축으로만 두는 경우입니다. 결국에는 막혀서 모두 따내게 되지요. 논리의 끝에서는 논리는 전복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요.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은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합니다. 다른 모든 학문이 밖에다 자신의 전제를 두고 있지만, 논리학은 자신 안에 전제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끝에 가서는 전복되어 돌아 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것을 알았다면 논고의 명제들의 행간에 나타냈을 것인데, 그걸 요즘 찾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게 독서의 흥미입니다. 이것이 “논리의 한계이고 세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문명의 진화도 그렇게 될 것이 확실합니다. 인류는 다시 원시사회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구를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따라 이 지구는 금성 같은 초열지옥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이전에 지구는 자신에게 필요한 수만을 남겨 두고 인류를 도태시켜버릴 것입니다. 인류가 넓은 지구에 작은 마을 공동체 단위로 서로 떨어져 알지 못하는 상태로 산다면, 거대한 문명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노자는 마을들이 서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류의 수가 극히 적어진다면 이러한 문명의 건설은 불가합니다. 태양이 폭발하여 지구를 삼키는 그 순간까지 인류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문명이 진화함에 따라 자연이 임계점까지 축소되고 그러면 인류의 수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다시 자연이 풍요롭게 살아나고. 문명이 부흥하고 이렇게 반복하는 진화를 이어갈 것입니다.
김지윤: 2019년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일까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현실의 반영, 시에서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싶은 부분이 있으셨다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운 질문일 수 있겠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이 사회에 뭘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최종천: 저는 시가 예리함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날카롭고 모나고 인간의 영혼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구박하고 처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를 읽어 보면 한심합니다. 대부분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두루뭉술하게 인간을 위로하고 걱정하고 자기 연민에 젖어 듭니다. 문학상을 받은 작품집을 모두 모아 놓고 보면 통달한 척 하거나, 가난을 간절히 노래하거나, 인생의 깊이를 말하거나 하는 작품집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그에 비해 시대의 문제를 다룬 작품은 적을 것 같습니다. 우리 문학은 이러한 협소성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가 동물의 언어와는 다른 분절음인 것은 인간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메타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분절음은 논리입니다. 이 세계의 전제가 논리가 아니라면 신은 굳이 분절음을 이용하는 인간을 창조할 필요가 없었고, 자연의 진화도 인간을 창조한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저 우연히 나타난 존래라고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만약에 논리가 이 세계의 전제가 아니라면 언어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인간도 없을 것입니다. 신은 이렇게 우리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는 자신을 본떠서 인간을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이성의 자기초월성.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데, 자기보다 더 좋지 않거나 더 못하다면 그건 창조가 아닙니다. 이 말은 즉 자신보다 더 좋은, 더 나은 존재로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이것을 자기지시/자기언급라고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돌본다.“ 이 격언의 본 의미는 우주의 제 존재는 스스로 자신을 창조한다. 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 태초에 논리가 있었다. 언어가 없다면 세계가 없다. 세계는 무엇인가? 인간에게만 물어지고 있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답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곧 언어다. 언어가 곧 세계다, 라고.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 -요한복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이는 언어가 곧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세계란 언어에 다름 아닙니다. 신은 언어를 통하여 이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빛이 있으라!; 빛. 어둠. 이라는 대상을 통하여 형식/질서를 부여한 언어!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입니다.
김지윤: 평소에 어떤 취미 활동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께서 최근 일상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무언가가 있다면 말씀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최종천: 우선 노동은 지금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쓰고 읽고 듣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음악을 듣습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 시장에 갑니다. 그리고 농담을 나눌 단골을 만들고 있고요. 복덕방 책방 카페 공방 같은 곳들을 찾아요. 하루 2킬로 걷기도 실천하고 있죠. 그리고 어린이들 만나러 일주일에 서너 번 이마트에 갑니다. 그곳에 애기들도 어린이도 많이 가족과 같이 옵니다. 요즘 젊은 어머니들 중에는 아이들을 카트에 싣고 다니면서 어른들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시키는 엄마들이 있습니다, 손을 쥐고 악수를 하고 그럽니다. 하루에 꼭 한번은 어린이얼굴을 보라! 이게 나의 신조입니다. 기족을 잃어버린 어린이를, 가족을 찾아주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하지말자! 지구의 수명을 늘리자. 노자적 무위의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다 끝내고 난 후에도 나는 내가 최종천 시인과 그의 시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놀라운 열정과 지식욕에 감탄하고, 깊은 사유와 독특한 시각을 담은 시인의 말에 빠져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지나버린 시간이었다. ‘세계의 한계’에 해당하는 언어의 한계와 인간의 유한함을 성찰하는 시인은 오늘의 우리의 시가 시대의 문제에 파고들어 천착하는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로지 인간만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라는 주제에 비하면 문학은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시인이 시장 복덕방 책방 카페 공방..을 찾고 하루 2킬로를 걸으며 노자적 무위의 날들을 보내는 이유는 그 인간들 사이에서 인간을 만나기 위함이다. 그는 리얼리스트란, “사물을 바르게 보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 시대의 드문 리얼리스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바르게 보는 눈’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모두가 기울고 비뚤어질 때 똑바로 바라보기를 원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어둠처럼 드리운다. 그러나 그의 걸음과 시선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곁에서 걷는 사람들이 부디 점점 늘어나기를.
저자 소개
최종천(시인), 김지윤(인터뷰어, 문학평론가, 시인)
※ 위 인터뷰는 웹진 "문화 다"에서 진행한 것으로, 웹진 문화 다와 뉴스페이퍼가 공동으로 게시하였습니다.
http://www.munhwada.net/home/m_view.php?ps_db=power_interview&ps_boid=50